▒ 완당김정희 ▒

백파에게 주다[與白坡][3]

천하한량 2007. 3. 9. 18:00
백파에게 주다[與白坡][3]

보내 온 뜻은 아울러 살폈거니와 사는 마침내 육십 년의 대강사(大講師)로 자처하며 저 사람은 곧 속인이니 저 속인이 무슨 지견이 있겠는가 하면서 설사 우자(愚者)의 일득(一得)이 있을지라도 끝끝내 마음을 비워 체험 강구하지 않고 서로 머리 숙이고자 아니하여 ‘가지례(可知禮)’나 ‘생반삼분(生飯三分)’ 같은 등의 해석에 이르러는 바로 교가(敎家)나 선가(禪家)를 천만 부당한 의체(義諦)에 몰아 넣으면서도 그것이 날로 마경(魔經) 귀굴(鬼窟) 속으로 떨어짐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일이요, 이 사람의 입이 마르고 혀가 닳도록 중언 부언하는 것이 마침 사의 분노의 장애만 키워줄 뿐이외다.
화두 아닌 게 없다라는 한 마디 말은 이야말로 근일 왕복하던 중에 약간의 미목(眉目)을 나타낸 것이니 이것이 선(禪)과 교(敎)의 융합되는 뜻이지요. 이처럼 투철한 깨달음이 있다면 의당 닥치는 대로 촉발되어 칼날을 받은 대가 짜개지듯 할 터인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횡설수설하여 전혀 착락(着落)이 없으니 모를 일이오.
만약 제불(諸佛)·제조(諸祖)의 한 말 한 구절이 화두 아닌 게 없다 한다면 《방등(方等)》·《반야(般若)》·《화엄》·《법화》에서 소승(小乘)의 《아함(阿含)》 제경(諸經)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인들 화두가 아니리오. 다만 천칠백칙(千七百則)에 따라 화두를 삼는다는 것은 이미 가소로운 것이며 사람 가르치는 방편이 ‘무(無)’자 등의 수삼 가지 말에 벗어나지 않는데 또 교를 나누고 선을 나누며 선으로서 또 허다의 문호가 나눠지니 선지(禪旨)가 만약 또 이와 같이 갈등이 된다면 누가 이를 곧이곧대로 잘라서 향상(向上)의 법문(法門)이라 이르겠는가.
《구곡설화(龜谷說話)》 같은 한 서는 산가(山家)에서 떠받들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고 있으나 황잡하기가 이와 같은 서는 없는데 이와 같은 서에서 선지(禪旨)를 찾으려 하고 있으니 그 얼버무리고 무조리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며 비록 《전등록(傳燈錄)》·《염송(拈頌)》 같은 것도 황잡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전혀 공안(公眼)을 가진 사람이 가려서 취한 것이 없으니 또 어찌 《설화(說話)》에만 책비(責備)할 수 있겠는가.
이렇기 때문에 가벼이 화두를 뽑아 들려 말고 염송사 되기를 좋아도 말라는 것은 정히 오늘날 산가의 정문 일침(頂門一針)이 될 만한데 끝끝내 이 애달픈 마음을 체험 강구하려 하지 않고 오직 견강(牽强)하여 이기기를 다투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아 속인을 꺾어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속인이라고 해서 어찌 한 척(隻)의 정법안(正法眼)이 없으리오.
사의 기(氣)를 써서 장황하게 늘어 놓는 것을 보면 속인이 알지 못하는 그 밖에 따로 한 가지 격외의 심오한 지의(旨義)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종경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며 그 하수(下手)하는 곳도 역시 고양이가 쥐잡듯이 닭이 알을 품듯이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구려.
사는 《태식경(胎息經)》을 들어 하학(下學)의 소승(小乘)으로 삼는데 고양이와 닭의 비유는 곧 《태식》의 처음 배우는 공부인 것이니 사는 그림자를 피하고자 해도 그림자가 더욱 몸을 떠나지 않는 격이외다.
대개 선·교(禪敎)의 두 문은 다 같이 하나의 마음 심자를 벗어나지 않는데 교의 문은 너그럽고 느리다면 선의 문은 급하고 절연하다 할 거요. 불법(佛法)이 동으로 중국에 들어와 천 년이 못 미쳐서 교문(敎門)은 하마 갈등이 많으므로 서역에서 온 달마는 부득불 한번 쓸어 없애지 않을 수 없기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 곧장 본심을 가리켰으니 이 역시 팔만 사천의 방편 가운데 때를 따른 방편의 하나인 것이며, 방편을 의방(醫方)에 비하자면 대승기탕(大承氣湯)과 같은 거요.
이때를 당하여 남악(南嶽)·마조(馬祖) 같은 여러 사람들이 기운은 큰 바다를 삼키고 힘은 수미산(須彌山)을 밀어 버릴 만하여 족히 ‘대승기탕’ 한 제를 당해 낼 만하였는데 송 나라 이후로는 사람의 근기(根基)가 점점 전과 같지 못하고 근자에는 기운이 이미 쇠진된 데다 진원(眞元)이 크게 내려가서 달마와의 거리는 또 천여 년이 되었으니 부득불 큰 의왕(醫王)이 때를 따라 사람을 구제하는 다시 하나의 방편이 있고서야 또 목숨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터인데 지금 만약 ‘대승기탕’을 원기가 크게 탈진된 뒤에도 한결같이 시용한다면 당장에 죽지 않는 자는 없을 거외다.
오늘날 산가(山家)에서 이러한 도리를 알지 못하고 단지 맹갈할봉(盲喝瞎捧)으로써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어찌 크게 슬프고 민망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반드시 하나의 눈 밝은 사람이 나와 이 화두를 일소하여 없애 버려야만 법당(法幢)을 다시 일으킬 수 있고 혜등(慧燈)을 다시 불붙일 수 있을 거요. 만약 평심하여 자세히 궁구해 보면 반드시 인합(印合)이 있을 거외다.

[주D-001]방등(方等) : 일체 대승경(大乘經)의 총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