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백파에게 주다[與白坡][1]

천하한량 2007. 3. 9. 17:59
백파에게 주다[與白坡][1]

백파 노사(白坡老師) 선안(禪安)하신지요? 이미 더불어 거리낌없이 말을 마구 했는데 어찌 체면을 보아 자제할 이치가 있으리오. 전후 지묵(紙墨)의 사이에 일호라도 노여움을 숨겨 둔 뜻은 없었는데 보내 온 깨우침이 갑자기 이렇게 중언부언한 것을 보면 이는 사(師)가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라 나도 몰래 웃음이 터져 머금은 밥알이 튀어나와 서안(書案)에 가득하구려.
사의 나이 장차 팔십이요, 더구나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명안(明眼)의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기봉(機鋒)을 누가 들어서 발전(撥轉)해 주리오. 정문(頂門)도 따라서 인색(湮塞)하게 되어 침침한 귀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그저 넘기고 말다가 갑자기 목놓아 말하는 사람의 큰 사자후(獅子吼)를 부딪치니 의당 그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내 비록 천박한 사람이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고서 아울러 그 선장(先狀)에까지 언급하였겠소. 사는 하나의 속세 문자에 있어서도 오히려 깊이 궁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심심(甚深)한 불지(佛旨)를 꿰뚫어 갈 수 있으리오. 이에 나아가 사의 무너지고 빠침이 여지가 없음을 알겠으니 어찌 더욱 터져 나오는 밥알이 서안에 가득하지 않겠소.
지금 이 열다섯 가지의 조례에 대하여 앞의 일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뒤의 일설은 도로 다시 몽롱하여 수미(首尾)의 천 백 말이 한 구절도 마음에 터득되어 폐부 속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은 전혀 없고 예전 그대로 박잡하고 윤척(倫脊)이 없는 성어만을 주워 모아 구차스레 설명해 가는 것뿐이니 어찌하지요.
지난날에 한 산중의 노고추(老古錐)와 더불어 선(禪)을 논한 일이 있었는데 역시 이와 같은 말을 하여 묵은 먹과 식은 밥이 한 판에 찍어낸 것 같으니 이것이 바로 치문(緇門)의 베껴 전하는 묵은 종이[故紙]로서 굳을 대로 굳어져 깨뜨리지 못하는 것인지요?
이를테면 불설(佛說)은 화두(話頭)의 활구(活句)가 아닌 것이 없고 《법화경(法華經)》과 《화엄경(華嚴經)》은 바로 교적(敎迹)의 사구(死句)라 하였는데 두 경은 유독 불설이 아니던가요?
《소초(疏抄)》나 사기(私記)도 역시 묘유(妙有)이나 《법화》·《화엄》은 다 선문의 상승(上乘)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 이른바 《소초》·《사기》는 별도의 한 서(書)로 수다장(修多藏) 속으로부터 새로 번역해 온 것이어서 이 두 경과는 판연히 두 건의 물(物)인데 또다시 두 경의 문자보다 뛰어나다는 말인가요? 경은 상승이 아니요 소초가 도리어 묘유라는 말은 듣지 못했소.
더구나 그 입을 열면 대기(大機)에 대용(大用)이요 마음에 발작하면 살인(殺人)과 활인(活人)이라 하지만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에 대기·대용을 어디에다 쓸 것이며 청평(淸平)의 세계에 살인·활인도 장차 무엇을 할 건고? 대기·대용을 두 사람에게 나누어 맡긴 것도 족히 가소로운 일이며 살인·활인은 한 때의 기(機)에 당한 말인데 어찌 상투로 답습하여 평소의 능사로 삼으려 드는 건가?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를 나누어 두 문으로 만들어 마치 아울러 서고 쌍으로 일어나는 것과 같이 하니 어찌 한 마음이 다심(多心)으로 반복하는 건지요? 이는 《기신(起信)》을 잘못 읽은 사람들로서 총림(叢林) 속의 잡설과 만담이 이와 같이 몰이해하여 그 내력이 이미 오래였으니 또 어찌 전혀 사만 허물할 게 있소.
염화(拈華)의 소식을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迦葉)만이 알고 아난(阿難)도 몰랐는데 누가 들어서 역력히 설명하여 이와 같이 적확하고 분명하게 말한단 말이오. 언어의 길이 끊긴 곳에는 문자가 역력하여 증거할 수 있어 마침내 묘유문(妙有門)이라 생멸문(生滅門)이라 수연(隨緣)이라 보리(菩提)라 관조반야(觀照般若)라 활인검(活人劍)이라 잡화포(雜貨鋪)라 이르지 않았소.
묘유·생멸·수연·보리·관조반야 등 어와 불설에 대하여는 경(經)치고 없는 데가 없어 팔만의 권속(眷屬)이 듣지 못한 사람이 없고 믿어 받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또 어찌 염화를 들어 중(衆)에게 보여 줄 것이 있겠으며 중이 다 모르는데 가섭만 유독 알았단 말이오?
염화의 소식이 만약 과연 이에 있다면 또 어찌 문자를 세우지 않은 데 있겠는가.
황면(黃面)의 노자(老子)도 오히려 이를 언어나 문자에 나타내지 못했는데 사(師)는 마침내 다반사(茶飯事)로 말하니 문자도 본시 한 선(禪)이요 문자를 세우지 않은 것도 한 선(禪)이란 말인가? 하나의 선인데 혹은 문자를 세우고 혹은 문자를 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이는 다 말이 되지 않는 거외다.
이는 또한 사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후세의 선가(禪家)들이 거개 이와 같았는데 사 같은 이는 바로 또 그것을 주워 모아 구두선(口頭禪)을 만들어 주체(湊砌)하여 마지않고 천착하여 마지않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은가.
달마(達摩)가 서역에서 와서 진단(震旦)의 문자가 번역으로 와전되고 붓으로 받아 쓰는 데서 와전되고 윤색하다 와전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일체를 소제해 버리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으니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던 거요.
그러해도 달마는 오히려 《능가경(楞伽經)》을 이조(二祖)에게 부쳐 주어 서로 전하여 오조(五祖)에 이르렀는데 《능가》의 문자가 간회(艱晦)함으로써 《반야경(般若經)》으로 바꾼 것은 그것이 간직(簡直)하고 평이하여 사람마다 즐겨 따르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어렵고 쉬운 사이에 달마의 본지와는 사뭇 다름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시 수정을 더한 일이 없어서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러 《능가》는 폐해지고 《반야》가 크게 행세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육조(六朝) 이래로 해석하는 자가 가장 많았는데 혹은 얕은 데 잃고 혹은 깊은 데 잃고 혹은 간략한 데 잃고 혹은 번다스러운 데 잃었던 거지요.
이를테면 삼십이분(三十二分) 같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소롭게 하는데 이는 사람이 망령되이 조명(照明)을 의탁한 것이니 바로 깎아버려도 되며 천친(天親)의 이십칠의(二十七疑)와 무차(无差)의 십팔주(十八住)는 반드시 보존하지 않아도 되며 또한 그것이 과연 두 대사(大士)의 손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거고요.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설은 이것이 바로 육조의 친필이란 말이오? 본래 글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가서 얻어왔단 말인가요. 구결(口訣) 두 글자는 곧 그것이 파탄나는 곳이니 이 역시 망탁(妄托)인 거요. 사는 헛설사로 한번 이마에 땀 쏟는 경우를 면치 못할 거외다.
함허(涵虛)의 설은 내유(來喩)로 보아 더욱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반야경》엔 어찌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또 이미 공종(空宗)이라 일렀는데 내유를 들어 말하면 성종(性宗)이라 일러도 되고 조사종(祖師宗)이라 일러도 되지 않겠소? 매양 조사선을 위하여 따로이 문자를 세우고자 하니 역시 이상한 일이지요.
앞뒤가 비끗해지고 전부가 어긋져 떨어짐이 또 이와 같이 말한 자는 전혀 없으니 이는 망설이요 두찬(杜撰)인 것이며 지난날에 사의 말한 ‘생반삼분(生飯三分)' 같은 것은 당초에 《대교왕경(大敎王經)》의 한 구절 한 대문도 얻어 보지 못하고서 함부로 만들고 함부로 풀이한 것인데 지금 또 《반야경》에다 사마귀를 붙이고 혹을 달 작정인가? 함허의 무리도 역시 이 병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점점 끝이 되는 사 같은 이에 있어서랴.
화두는 지난날에 또한 누누이 말했는데도 마침내 반성하여 깨치지 못하고 또 이와 같이 황잡(荒雜)하게 말해 오니 비록 대방(大方)이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거요.
화두는 비록 조주(趙州)의 화(話)로써 화두를 삼지만 조주가 어찌 일찍이 사람에게 화두를 가르쳤는가? 특히 조주뿐만 아니라 달마(達摩)가 이조(二祖)에게 화두로써 가르쳤던가? 삼조·사조도 역시 화두 속에서 왔는가? 오조가 육조에게 의발(衣鉢)을 전하면서도 역시 일찍이 화두에 미치지 않았으며 남악(南岳) 마조(馬祖) 백장(百丈) 황벽(黃蘗)들도 화두를 들어 사람을 가르쳤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화두는 조송(趙宋) 이후부터 차츰 행해진 것인데 지금은 마침내 불어(佛語)는 화두 아닌 것이 없어 의리(義理)로써 설파하면 교의(敎義)가 되고 몰의리(沒義理)로써 타파하면 화두가 된다고 이르니 조송 이후의 불을 섬기는 것은 무엇 때문에 미리 옮겨 쓰고 거슬러 취하여 혹은 의리(義理)로 설파하고 혹은 몰의리(沒義理)로 타파한다는 거요?
불설은 장경(藏經)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 장경 속의 팔만이 의리가 있지 않은 것은 없어 사람마다 이해할 수 있는데, 모르괘라, 어느 경이 몰의리의 경이 되는지요? 지금 화두를 불어(佛語)와 불의(佛意)로 삼는다면 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에 어찌 한 구절도 화두가 없었던가?
지금 교적(敎迹)을 사구(死句)로 삼아서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했는데 스스로 구하는 일도 끝내지 못한 처지로서 어떻게 더 넓히어 팔만대장(八萬大藏)의 당상(唐喪)의 타진(唾津)을 하려 드는가?
화두로 사람 가르치는 것은 곧 상계(像季) 이래의 말법으로서 가장 강흔(剛狠)한 자들이 제멋대로 쓰는 것이니 화두로 사람 가르친 이후로는 다시 남악 마조 같은 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혹 한두 사람이 깨쳐 얻은 것이 있다 할지라도 심히 기특한 것은 없으며 그도 또한 열 백에 하나인 것이외다. 이 밖에는 허랑되이 세월만 낭비하여 오늘날 영남(嶺南)의 칠불선실(七佛禪室)과 같을 뿐이니 이 어찌 사람을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으며 대혜(大慧)가 그 화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어찌 면할 수 있으리오?
대혜의 문하에서 화두로부터 깨쳐 들어간 것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장자소(張子韶)보다 나은 사람이 없는데 꾀어서 자소를 데려다가 양인을 천인으로 만들었으니 그 자소를 가르친 것은 곧 하나의 음모(陰謀)와 비계(祕計)로서 심지어는 사람들이 여불위(呂不韋)에게 비한 일도 있는데 사의 두대(頭戴)한 것은 바로 곧 이와 같을 따름인 것이외다.
종풍(宗風)의 문(門)은 문대로 호(戶)는 호대로 서로서로 분열되고 서로서로 형극이 되었는데 사는 단지 대혜(大慧)만을 알고 대혜의 법형(法兄)인 법일(法一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 호(號)는 설소(雪巢))을 알지 못하며 단지 청허(淸虛)만 알고 청허의 법형인 홍정(弘正)을 알지 못하니 이는 다 대혜·청허보다 한 등을 넘어선 자들이라오.
중고(中古)에 있어 외도(外道)를 변파한 주굉(袾宏)이나 근세에 반선(班禪) 서천의 활불 을 면척(面斥)한 달천(達天)이라든가 또는 육신(肉身)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덕청(德淸) 같은 이와 사리가 비[雨] 같았다는 성공(性空)의 여러 대덕들은 또 어찌 진묵(震黙)·환성(喚醒)·설파(雪坡)의 무리들에게 넘어 설 뿐이겠소.
사의 성문(聲聞)으로는 반드시 이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며 지금 칭술한 것은 편방(偏方)의 한 문호(門戶)의 작은 소견으로서 썩은 쥐새끼를 놓고 봉에게 소리 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외다.
선(禪)의 교법(敎法)은 체식(體式)이라 이른 것은 도대체 선을 어떻게 체식한다는 거요? 이미 문자를 세워 놓고 또 하나의 체식을 더하니 어찌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을 수 있는지 이는 모두가 진부한 것만 주워 모으고 하나도 신심(身心) 상의 체험·연구가 없이 날랜 이뿌리로 말만 늘어 놓는 것이며 또한 말을 가리지 못하고 떠들어댄 것이외다.
지난번에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읽으라고 권한 것은 어찌 《반야》와 《법화》를 몰라서리요. 특히 사의 근기(根器)와 식해(識解)가 이로 말미암아 들어가야만 문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안반수의》로써 이 방편의 교체(敎體)를 세워 사람마다 다 그렇게 하라는 것은 아니지요. 비유하자면 《법화》중의 화성(化城)과 같아서 비유하여 말한 것이니 실로 사를 슬퍼하고 민망히 여겨서 그런 것이며 사를 얕잡아 보거나 업신여긴 것은 아니오.
사의 문하의 작은 도리(闍黎)도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에게랴. 사는 끝내 이 의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사부(士夫)의 거만으로 여기니 어찌 평심하여 자세히 강구하지 못하시오. 사부의 거만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산승의 거만이겠소.
오늘날의 할 일을 위해서는 종전의 갈등을 일체 다 소제해 버리고 빨리 사의 신상에 나아가 회광반조(回光反照)하여 먼저 진·치(嗔癡)의 두 가지 독소를 도려내 버리고 다음으로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과 갈마비니(羯磨毗尼) 등의 법을 취하여 한결같이 마감 증험해 나가면 거의 혹 앞에 나타나는 광명이 있을 것이나 사는 지금 늙지 않았소.
그러나 우리 성인의 말씀에 이르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가하다."하였으며 사의 가문(家門)에도 역시 "소 잡는 칼을 내려뜨리고 당장에 부처를 이뤘다."는 말도 있으니 사의 앞길은 상기도 한량이 없지 않소. 격(格) 밖에 위로 향하는 그 한 구멍에 이르러는 또 문자나 언어로써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 삼아 다시 생각하고 또 거듭 생각하기 바라오.
개중(個中)의 설은 더욱 낙착이 없으니 만약 개중을 논한다면 어찌 초목 곤충의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말할 게 있는가. 축생(畜生)과 아귀(餓鬼)에 이르러는 어떻게 개중을 들어 논하리오. 초목 곤충의 유정 무정에 대하여 그 소식을 탐득(探得)하면 장차 무엇을 하자는 거요?

[주D-001]선지식(善知識) : 지식은 그 마음을 알고 그 형(形)을 아는 뜻이다. 선(善)이란 나에게 유익함이 되어 나를 인도하는 것이다. 《법화문구(法華文句)》4에 "문명(聞名)을 지(知)라 하고 견형(見形)을 식(識)이라 하는데, 남이 나에게 보리(菩提)의 도를 더해주면 선지식이라 이름한다." 하였고, 《법화경(法華經)》묘장엄왕품(妙莊嚴王品)에 "선지식이란 것은 바로 대인연(大夤緣)인데 이른바 화도(和導)하여 부처를 얻어보게 하여 아누다라삼막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발(發)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음.
[주D-002]기봉(機鋒) : 석씨(釋氏)가 선(禪)을 말할 때 그 언사(言辭)는 적상(跡象)에 떨어지지 아니하면서 봉망(鋒鋩)이 예리한 것을 이름. 소식의 시에 "鈍根仍落箭鋒機"가 있음.
[주D-003]정문(頂門) : 침구(鍼灸) 법의 뇌문(腦門)으로부터 씻어내리는 침을 이름인데 이를 들어 행사(行事)의 액요(扼要)에 비유하여 씀.
[주D-004]두타(頭陀) : 범어(梵語)에 중을 칭하여 두타라 하는데 그 뜻은 번뇌를 두수(抖擻)한다는 것임. 세속에서는 승려의 행각 걸식(行脚乞食)하는 자를 말하며 또한 행자(行者)라고도 칭함.
[주D-005]윤척(倫脊) : 도리(道理)를 이름. 《시(詩)》소아(小雅) 정월(正月)에 "維號斯言 有倫有脊"이라 하였음.
[주D-006]노고추(老古錐) : 노고(老古)한 송곳도 능히 물건을 뚫는 용(用)이 된다는 것인데, 노고라는 것은 존칭이고 사가(師家)의 설득하는 기봉(機鋒)이 초준(峭峻)함을 말한 것임. 《허당백엄록(虛堂柏嚴錄)》에 "版齒生毛老古錐 夜深聽水爐邊坐"라 하였음.
[주D-007]치문(緇門) : 승려는 치의(緇衣)를 입으므로 승문(僧門)을 이름.
[주D-008]《소초(疏抄)》 : 《화엄대소초(華嚴大疏抄)》를 이름인데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의 약명으로 징관(澄觀)이 스스로 대소(大疏)를 해석한 것임.
[주D-009]묘유(妙有) : 불가의 용어인데 비유(非有)의 유(有)를 묘유라 함으로써 비공(非空)의 공(空)에 대하여 진공(眞空)이라 이름.
[주D-010]상승(上乘) : 상인(上寅)이라고도 하는데 대승(大乘)의 이명(異名)임. 《세친섭론(世親攝論)》에 "如是三藏 下乘上乘 有差別故 則成二藏"이라 하였음. 승(乘)은 운재(運載)로써 의(義)를 삼아서 교(敎)의 법을 이름한 것임.
[주D-011]수다장(修多藏) : 수다는 수다라(修多羅)인데 범어로 경(經)의 뜻임.
[주D-012]대기(大機)에 대용(大用) :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언어로는 미치지 못하는 기미 징오(機微徵悟)를 들어 마음을 써서 학자(學者)에게 베푸는 것을 이름. 《곡향집(谷響集)》9에 "대기는 종사(宗師)에게 있고 학자에게 베푸는 것을 대용이라 한다." 하였음.
[주D-013]살인(殺人)과 활인(活人) : 검(劍)을 지(智)에 비한 것인데 진성(眞性)의 기용(機用)을 부활(復活)하는 것을 이름.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16 암두전활조(巖頭全豁條)에 "不霜雖有殺人劍 但無活人劍"이라 하였음.
[주D-014]기신(起信) : 즉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약명임. 마명보살(馬鳴菩薩)이 지은 것으로 두 역(譯)이 있는데 하나는 양(梁) 진체(眞諦)의 역 1권이고 하나는 당(唐) 실차난타(實叉難陀)의 역이다. 정신(正信)을 일으키기 위하여 대승의 극리(極理)를 말한 것임.
[주D-015]염화(拈華)의 소식 : 《연등회요(聯燈會要)》석가모니불장(釋迦牟尼佛章)에 "세존(世尊)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뽑아들어 중(衆)에게 보이니 모두 묵묵히 말이 없었는데 유독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하므로 세존이 말하기를 '나는 정법안장(正法眼藏)·열반묘심(涅槃妙心)·실상무상(實相無相)·미묘법문(微妙法門)에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교외(敎外)의 별전(別傳)이 있다.' 하고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付囑)하였다." 하였음.
[주D-016]황면(黃面)의 노자(老子) : 석가를 가리켜 말한 것임. 여래(如來)가 금색신(金色身)이 되기 때문에 황면이라 하였음. 《무문관(無門關)》에 "黃面瞿曇 傍若無人"이라 하였음.
[주D-017]주체(湊砌) : 포개진 것에 더 포갠 것으로 층첩비차(層疊比次)를 말한 것임.
[주D-018]달마(達摩) :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중으로 천축인(天竺人)인데 양 무제(梁武帝) 때에 영접하여 금릉(金陵)에 와서 불리(佛理)를 담론하고 강을 건너 위(魏)로 가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 들어앉아 면벽(面壁)한 지 9년 만에 화거(化去)하였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주D-019]진단(震旦) : 인도의 고대에 중국을 진단이라 하였음. 《번역명의집(繙譯名義集)》에 "동방은 진(震)에 속하여 바로 해 돋는 지방이므로 진단이라 한다." 하였음.
[주D-020]이조(二祖) : 선종(禪宗)을 이름인데 불교의 일파로서 곧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을 여래(如來)로부터 가섭(迦葉)에게 부촉(付囑)하여 제1조(第一祖)가 되었고 28세(世)를 전하여 달마(達摩)에 와서는 동토(東土)의 초조(初祖)가 되었다. 양(梁) 나라 때 바다에 떠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의발(衣鉢)을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여 이조가 되었음. 혜가의 초명(初名)은 신광(神光)이요, 북위(北魏) 낙양(洛陽) 사람인데 달마대사가 소림사에 있을 때 도(道)를 청하기를 심히 진지하게 하여 눈이 내리는 어느날 밤에 그 왼팔을 자르니 달마가 보고 느껴서 허락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혜가라고 고쳤으며 뒤에 승(僧) 찬(璨)에게 전하여 삼조가 되고 도신(道信)이 사조가 되고 홍인(弘忍)이 오조가 되고 혜능(慧能)이 육조가 되었는데, 다 그 의발로써 서로 전하였음.
[주D-021]육조(六朝) : 오(吳)·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이 서로 이어 건강(建康)에 도읍하였으므로 육조라 이름.
[주D-022]천친(天親) : 사람 이름임. 범명(梵名)은 파수반두(婆藪槃豆), 또는 파수반타(婆修槃陀)라고 함. 혹은 천제(天帝)의 아우이기 때문에 천친이라 한다고 함.
[주D-023]함허(涵虛) : 조선 세종 때의 승(僧). 법호는 득통(得通), 속성(俗姓)은 유(劉)이고 충주(忠州) 사람임. 21세에 관악산(冠岳山) 의상암(義相庵)에서 중이 되었으며 세종대왕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기도 하였다. 저술로는 《원각소(圓覺疏)》·《반야경오가해설의(般若經五家解說誼)》·《현정론(顯正論)》·《반야참문(般若懺文)》·《윤관(綸貫)》 등이 있음.
[주D-024]생반삼분(生飯三分) : 생반은 출반(出飯)이라고도 함. 밥을 먹기 전에 중생을 위하여 밥을 조금 덜어 시여(施與)하는 것으로서 지계(持戒)하는 자의 법식임.
[주D-025]조주(趙州) : 제4권 주 38) 참조.
[주D-026]남악(南岳) 마조(馬祖) : 마조는 승명(僧名)으로 당(唐) 강서(江西) 도일선사(道一禪師)를 이름인데 남악양(南岳讓)의 법사(法師)가 되었다. 속성이 마씨이므로 당시에 마조라 칭하였고, 원화(元和) 중에 시호를 대적(大寂)이라 내렸다. 《전등록(傳燈錄)》6에 "육조(六朝) 혜능화상(慧能和尙)이 양(讓)에게 이르기를 '향후의 불법은 너의 변(邊)에서 나올 것이니 마구(馬駒)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강서(江西)의 법사가 천하에 퍼져서 마조(馬祖)라 불렀다." 하였음.
[주D-027]백장(百丈) 황벽(黃蘗) : 홍주(洪州) 황벽선사(黃蘗禪師)의 이름은 희운(希運)이요, 민인(閩人)인데 어렸을 때 복주(福州) 황벽산에서 출가(出家)하여 강서(江西)에 가서 백장사(百丈師)에게 참알(參謁)하여 종교(宗敎)를 부양(敷揚)한 지 무릇 40여 년에 그 도를 통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입실 제자(入室弟子)가 41인이었음.
[주D-028]세 곳에서 전심(傳心)할 때 : 선종(禪宗)을 이름. 세존(世尊)이 세 곳에서 가섭(迦葉)에게 전심하였는데 하나는 영산(靈山)에서의 염화미소(拈華微笑)요, 하나는 다자탑(多子塔)에서 반좌(半座)를 나눈 것이요, 하나는 쌍림수(雙林樹) 아래에서 관(棺) 속으로부터 발을 내민 것임. 《선종상감(禪宗象鑑)》에 "세존이 세 곳에서 전심한 것이 선지(禪旨)인데 한 시대에 말하는 자들은 교문(敎門)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禪是佛心 敎是佛語'라 한다." 하였음.
[주D-029]당상(唐喪) : 미상함. 상(喪)은 장(裝)의 오자로서 당 나라 현장(玄裝)을 말한 것이 아닌가 함.
[주D-030]상계(像季) : 불가의 용어로 말세를 이름. 불멸(佛滅)한 뒤 5백 년은 정법(正法)이라 하고 정법 후 1천 년은 상법(像法)이라 하는데 법이 행할 때와 같다는 말임. 계(季)는 상법의 계세(季世)를 가리킴. 《서방요결후서(西方要訣後序)》에 "生居像季 去聖斯遙"라 하였음.
[주D-031]장자소(張子韶) : 송(宋) 염관인(鹽官人)으로 이름은 구성(九成)임. 소흥(紹興) 연간에 정시(廷試) 제일로 누천(累遷)하여 예부 시랑 겸시강(禮部侍郞兼侍講)으로 제수되었는데 진 회(秦檜)에게 거슬려 낙직(落職)하고 남안군(南安軍)에 거주하였다. 이에 앞서 경산(徑山) 승(僧) 종고(宗杲)가 선리(禪理)를 잘 이야기하여 종유하는 자가 많았는데 구성도 가끔 그 사이에 왕래하였다. 진회는 그가 자기를 거론할까 두려워서 사간(司諫) 첨대방(詹大方)을 시켜 그가 종고와 더불어 조정을 비방한다고 논죄하여 남안으로 귀양보냈던 것이다.
[주D-032]대혜(大慧) : 송(宋) 항주(杭州) 경산(徑山)의 불일선사(佛日禪師)로 이름은 종고(宗杲)인데 효종(孝宗) 융흥(隆興) 원년 8월 10일에 경단 명월당(明月堂)에서 입적하였다. 수(壽)는 75세, 시(諡)는 보각(普覺), 탑(塔)은 보광(寶光)이다. 《어록(語錄)》 30권이 있어 대장(大藏)에 칙입(勑入)하였음.
[주D-033]청허(淸虛) : 조선 승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법호임. 자는 현응(玄應)이고 속성(俗姓)은 최씨이며 안주(安州) 사람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오래 있어서 서산대사라 칭한다. 10세에 부친을 여의고 안주 목사를 따라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서 공부하다가 동학(同學) 몇 사람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열람하다가 선가(禪家)의 돈오법(頓悟法)을 얻고 마침내 중이 되었음.
[주D-034]홍정(弘正) : 서산대사와 동시의 승인데 도력(道力)이 서산이나 한무외(韓無畏)의 위에 있었다고 함. 본집(本集) 권10 금선대시(金仙臺詩)의 완당 자주(自注)에 보임.
[주D-035]주굉(袾宏) : 명 나라 운서대사(雲棲大師)의 이름. 자는 불혜(佛慧), 호는 연지(蓮池)임. 처음에는 유생(儒生)으로 있었는데 30세 이후에 출가하여 다년간 행각(行脚)한 나머지 항주(杭州)의 운서산(雲棲山)에 머물러 선림(禪林)을 창건하고 염불을 장려하여 계율(戒律)을 엄히 하였음. 신종(神宗) 만력 43에 81세로 입적하였으며 32종의 저서가 있음.
[주D-036]덕청(德淸) : 명 나라 금릉(金陵) 전초인(全椒人)으로 속성은 채씨(蔡氏), 이름은 덕청, 자는 증인(澄印), 호는 감산(憨山)임. 11세에 출가의 뜻을 품고 이듬해 보은사(報恩寺) 서림(西林) 영녕(永寧)에게 투신하여 경교(敬敎)를 송습(誦習)하며 또 유학(儒學)을 닦다가 19세에 서하산(棲霞山) 운곡법회(雲谷法會)에 참알(參謁)하여 참선의 뜻을 결심하고 영녕에게 청하여 삭발하였음. 세상에서는 감산대사라 칭함. 저술로는 《감산대사몽유전집(憨山大師夢遊全集)》이 있음.
[주D-037]성공(性空) : 일본 승임. 《日本高僧傳》에 보임.
[주D-038]진묵(震黙) : 승명(僧名)은 일옥(一玉). 조선 때 만경(萬頃) 사람임. 7세에 출가하여 전주(全州)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棲寺)에서 불경을 배워 글을 한번 보기만 하면 외웠다. 득도(得道)하여 신기한 이적(異迹)의 전설이 파다하였으며, 72세에 입적하였다. 저술로는 《어록(語錄)》이 있음.
[주D-039]환성(喚醒) : 속성(俗姓)은 정(鄭)이요, 충주(忠州) 사람임. 12세에 미지산 용문사(龍門寺)에서 중이 되어 상봉정원(霜峯淨源)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7세에 월담설제(月潭雪霽)의 법을 이어 경전을 힘써 연구하였음. 그 후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대법회(華嚴大法會)를 베푸니 모인 학승(學僧)이 1천 4백 명에 달하였음.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喚醒詩集)》이 있음.
[주D-040]설파(雪坡) : 속성은 이(李)요, 무장(茂長) 사람인데 어려서 어버이를 잃고 19세에 선운사(禪雲寺) 희섬(希暹)에게 계(戒)를 받아, 호암(虎巖)의 법을 잇고 33세에 용추사(龍湫寺) 판전(板殿)에서 개강(開講)하여 십여 년 동안 정업(淨業)을 닦다가 일생을 마쳤다. 나이는 85세, 법랍(法臘)은 66세요, 저술로는 《구현기(鉤玄記)》가 있음.
[주D-041]썩은……것 : 《장자(莊子)》추수(秋水)의 "夫鵷鶵 發於南海 而飛於北海 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 於是鴟得腐鼠 鵷鶵過之 仰而視之曰嚇"에서 나온 말임.
[주D-042]화성(化城) : 불가어인데 일시에 화작(化作)한 성곽을 이름. 《법화경(法華經)》에 "화성의 유품(喩品)이 있는데 그 비유한 뜻은 일체 중생이 성불(成佛)하는 곳을 보소(寶所)라 하며 이 보소에 이르자면 길이 하 멀고 험악하다. 그러므로 가는 사람이 피로하여 퇴각할까 두려워서 가는 도중에 하나의 성곽을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머물러 쉬면서 그곳에서 정력을 길러 마침내 보소에 이르게 한 것이다." 하였음.
[주D-043]도리(闍黎) : 범어(梵語)임. 또한 아도리(阿闍黎)라고도 하는데 승도(僧徒)의 스승이다. 행실을 바르게 하여 능히 제자의 품행을 규정(糾正)하는 승려를 이름.
[주D-044]회광반조(回光反照) : 도가(道家)의 수련하는 법을 이름. 《참동계(參同契)》 주(注)에 "사람이 능히 회광반조하여 출식(出息)은 미미(微微)하고 입식(入息)은 면면(綿綿)하여 간단(間斷)하게 말면 신기(神氣)가 뿌리로 돌아가서 오래오래 하면 호흡이 다 없어진다." 하였음. 《태상순양진군경(太上純陽眞君經)》에 "回光返照中 神歸氣穴裏"라 하였음.
[주D-045]사분율(四分律) : 경(經)의 이름. 사율(四律)의 하나로 60권인데 오부(五部) 중 담무덕부(曇無德部)의 율장(律藏)임. 본서(本書)에 대한 주석 및 본서에 관한 저술은 《사분율소(四分律疏)》 6권 도부(道覆)의 찬(撰)과 《사분율소》 4권 혜광(慧光)의 찬과 《사분율소》 20권 당(唐) 법려(法礪)의 찬 등이 있음.
[주D-046]오분율(五分律) : 서명(書名)으로 《미사새부화해오분율(彌沙塞部和醢五分律)》의 약명인데 오부율(五部律) 중 미사새부의 율본(律本)을 말한 것임.
[주D-047]소 잡는……이뤘다 : 《산당사고(山堂肆考)》에 "도아(屠兒)가 열반회상(涅槃會上)에 있어 도도(屠刀)를 내려뜨리고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었다."라 하였는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빠름을 말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