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일은 오직 곧이곧대로 잘라 말해야 하며 위곡(委曲)하거나 완전(宛轉)하는 식은 필요치 않으니 아무리 저촉되고 거슬리는 점이 있더라도 성을 내어 서로 격하지 말아 주었으면 오죽이나 좋겠소. 내시(來示)에 이른바 삼처(三處)의 전심(傳心)과 오종(五宗)의 분파(分派) 따위도 역시 지난날의 이른바 옛사람의 성어를 주워 모은 것이 어찌 아니겠소. 이는 다 지상(紙上)의 공언(空言)일 뿐 결코 사의 마음속에서 터득한 것은 아니니 이는 이른바 구두선이라는 거요. 사가 다시 또 이와 같이 갈등하여 마지않을 줄은 생각도 못했구려. 무엇으로써 사의 마음속으로 터득한 것이 아님을 아는가 하면 이에 앞서 대략 여러 선백(禪伯)들과 더불어 선을 논할 경우 이를 들어 말을 삼지 않는 이가 없어서 바로 오늘날 총림(叢林) 중의 한 가지 문면어(門面語)로 되어 있으니 이러한 때문에 근래의 총림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법당(法幢)을 세울 만한 땅이 없고 혜등(慧燈)을 이어갈 곳이 없는 거요.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 살인(殺人)·활인(活人)·대기(大機)·대용(大用)이 사의 본래 면목에 무슨 관여가 되기에 그처럼 죽음을 구하느라 겨를을 못 챙기는 꼴이 되는 건지요. 지금 살인 활인을 어느 곳에 베풀고자 하는 건지요. 더구나 적어보낸 뜻을 살피면 삼처의 전심은 도검(刀劍) 상의 일이 아닌 것 없는데 그렇다면 황면노자(黃面老子)의 사십구 년 동안 설법한 것이 필경의 귀취(歸趣)는 도검(刀劍)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 아니겠소. 구족(具足)의 상(相)을 가지고도 오히려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인데 지금 도검의 상으로써 여래를 본다 이른다면, 모르괘라, 여래가 그것을 수긍하겠는지요. 살인도(殺人刀)와 활인검(活人劍)이 각기 다 얻는 바 있다면 사의 전해 얻은 것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것인가요,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것인가요? 살·활을 병용하는 것은 이미 전한 바 없는데 또 어떻게 그 살·활이 병용되는 것을 알았단 말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할밖에요. 이는 다 말세 이래로 선지(禪旨)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고인의 성어에 나아가 입에 나오는 대로 말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차츰차츰 미혹에 빠지고 만 거외다. 화두로 사람 가르치는 것도 역시 한 모양의 맹갈할봉(盲喝瞎棒)에 불과한 거요. 화두의 이전에는 깨달아 통한 자가 많았는데 화두의 이후로는 깨달아 통한 자가 적음은 어째서인가? 화두 이전의 제불(諸佛) 제조(諸祖)는 화두를 말미암지 않았으니 이는 다리 세울 곳[立脚處]을 알지 못했는데도 또한 깨달아 통할 수 있었겠는가. 여래는 밝은 별을 보고 도를 깨쳤는데 지금 사람은 밤마다 별을 보지만 일찍이 한 사람도 도를 깨치지 못한 것은 또 어쩐 일이며 설사 한 사람이 화두를 인하여 도를 깨쳤을지라도 다른 사람은 또 어떻게 화두를 인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이는 그 근성(根性)에 따라서 가르침도 각각 등분이 있으니 화두로써 한결같이 덮어씌워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만약 화두로써 한결같이 덮어씌운다면 준동(蠢動)하는 것들도 영(靈)을 머금어서 다 불성이 있는데 어찌하여 구자(狗子)에게 화두를 가르쳐 그로 하여금 악도(惡道)를 벗어나게 하지 아니하였겠는가? 이것이 바로 대혜(大慧)의 화두를 가르치는 어긋나고 결흠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화두로 사람을 가르치는 자도 역시 자신이 깨치고 또 남을 깨칠 수 있다고 보는가? 자신의 깨침이 없이 다만 옛사람의 성어만을 사용하여 그 깨치고 안 깨치고를 논할 것 없이 마구 사람 가르치는 방편으로 삼으며 따라서는 또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한마디 말로써 입증할 것이 있으니 《금강경(金剛經)》의 ‘응여소교(應如所敎)’를 주천로송(住川老頌)에는 ‘가지례(可知禮)’라 일렀고 또 《염송(拈頌)》 임제권(臨濟卷)의 ‘승편갈(僧便喝)’을 규암(珪庵)은 ‘가지례(可知禮)’라 일렀으니 승편갈을 어떻게 ‘가지례’라 이를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말이 서로 입증할 것이 있으니 사는 《조상경(造像經)》의 생반삼분(生飯三分)의 해(解)를 연어(鳶魚)의 비약(飛躍)으로써 풀이했다고 하니 생반삼분이 연어의 비약과 더불어 어떻게 부합된단 말인가. 만약 이 두 가지에 대하여 밝은 해석을 얻는다면 사의 살인·활인·대기·대용을 증명할 수 있으니 행여 자세한 가르침이 있었으면 하외다. 천(喘)의 의는 아마도 피로(披露)하고 선양(宣揚)하여 남김이 없을 것 같은데 마침내 깨우치지 못할 곳이 있으니 밝은 눈을 가진 사람 앞에도 과연 삼척(三尺)의 어둠이 있다는 것이 이를 두고 이름이었던가? 유문(儒門)의 독서하는 법을 구두를 익힌다고 이르는데 어찌 이와 같은 독서의 법이 있으리오. 서너집 마을 속의 동홍(冬烘) 선생도 이와 같지 않으니, 모르괘라, 공문(空門)에서는 《화엄(華嚴)》 《수릉(首楞)》을 구두 익히는 도구로 삼는 건가? 거듭 웃음이 터져나올밖에요. 논(論)에도 종·석(宗釋)이 있어 경을 종(宗)으로 하여 논을 지은 것도 있고 경을 풀이하여 논을 지은 것도 있는데 《기신》은 본시 《능엄》을 종으로 하여 논을 지은 것이지요. 어찌 《능엄》의 논례(論例)가 원래 의거가 없이 논을 만든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겠소. 《기신》의 논 된 것은 비록 이것이 요의(了義)이기는 하나 어찌 의거가 없이 논을 만들었으리오. 사는 다만 석론(釋論)이 석경(釋經)이 되는 줄만 알고 종론(宗論)이 종경(宗經)이 되는 줄은 몰라서 이와 같이 말한 것인가? 어찌 사가 모르리오. 미처 점검하지 못해서이겠지요. 오늘날의 할 일은 먼저 삼처의 전심과 간가(間架)의 도(圖)를 버려 버리고 경솔히 화두도 추겨 들지 말며 염송사(拈頌師) 되기를 좋아도 말며 머리를 숙이고서 《안반수의경》을 읽으면 거의 혹 일선(一線)의 광명이 앞에 있게 될 거외다. [주D-001]오종(五宗)의 분파(分派) : 선종(禪宗)의 분파를 말함. 초조(初祖) 달마(達摩)로부터 오조 홍인(弘仁)에 이르러 홍인의 밑에서 북종(北宗) 신수(神秀)와 남종 혜능(慧能)의 두 파로 나누어졌다. 북종은 북지(北地)에 행하여 후세에 분파가 없고 남종은 남지에서 행하여 오가(五家)·칠가(七家)의 구별이 있는데 오가는 규앙종(潙仰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이요, 칠가는 이에 황룡(黃龍)과 양기(楊岐)를 더한 것이다. [주D-002]문면어(門面語) : 가법(家法)과 같은 말로 쓰여지고 있음. [주D-003]맹갈할봉(盲喝瞎棒) : 갈봉(喝棒)은 불가어로서 사람의 미오(迷誤)를 일깨우는 것을 이름. [주D-004]동홍(冬烘) : 촌숙(村塾)의 몽학 선생을 이름. 《척언(摭言)》에 "정훈(鄭薰)이 안표(顔標)를 노공(魯公)의 후손이라 이르고 그로써 장원(狀元)을 만드니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主司頭䐉太冬烘 錯認顔標作魯公'이라 했다." 하였음. [주D-005]요의(了義) : 불요의(不了義)를 상대하여 한 말인데, 분명히 구경(究竟)의 실의(實義)를 실시하는 것을 요의라 이르고 미진(未盡)한 말을 마치지 못한 것을 불요의라 이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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