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을 대신하여 왕맹자 희손 에게 주다[代權彝齋 敦仁 與汪孟慈 喜孫]

천하한량 2007. 3. 9. 17:59
권이재 돈인 을 대신하여 왕맹자 희손 에게 주다[代權彝齋 敦仁 與汪孟慈 喜孫]

고염무(顧炎武) 강신수(江愼修) 이래로 음운(音韻)의 학(學)이 멀리 천고(千古)를 넘어서서 전(前) 세대에는 비례(比例)가 없을 것 같소. 애초에는 단씨(段氏)의 십칠부(十七部)로써 정론을 삼아 다시는 여온(餘蘊)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급기야 왕회조(王懷祖 이름은 염손(念孫)) 선생의 서(書)를 보고 또 강씨(江氏)의 서를 보니, 단씨(段氏)의 십칠부는 오히려 결정짓지 못한 것이 있고 따라서 왕 선생의 이십일부는 또 강씨의 이십일부와 더불어 너무도 다르더군요. 단씨·왕씨가 강씨의 서에 대하여는 다 깊이 허락하는 바이니 이제 강씨의 서를 귀결로 삼아야 하겠습니까?
강씨 서의 《당운재정(唐韻再正)》은 일찍이 잠깐 열람한 바 있거니와 《시운(詩韻)》 등의 서 같은 것에 있어서는 상기도 읽을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왕 선생의 서에 있어서도 그 예(例)를 든 일편(一篇)만을 본 바 다만 입성(入聲)에 있어 단씨 설을 고정(考正)했을 따름이요 따로 저술을 남겨 일부의 전서(全書)를 만들기를 고씨(顧氏)의 《오서(五書)》나 강씨의 《표준(標準)》같이 한 것은 없었습니까?
단씨 서는 거성(去聲)을 두지 않았는데 왕 선생은 또 거성을 남겨두어서 입성만 고정한 데 그칠 뿐이 아니었으니 전서가 있다면 그 업(業)을 마칠 수 있게 되겠습니까? 강씨의 전서도 역시 다 간행되었습니까?
천문(天文) 산술(算術)은 오늘날의 급선무로 되었는데 건륭 초년에 《시헌서(時憲書)》를 수정(修正)하여 지금 하마 백년이 가까워서 황백대거(黃白大距) 같은 것은 이미 어긋나고 틀린 게 많으니 더욱 오늘에 미쳐 개측(改測)해야 될 줄 아나 이는 바로 중조(中朝) 대인(大人)들의 책임일 뿐 소방(小邦)에 있어서는 오직 공경히 따를 따름이외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를 비근(卑近)하다 하여 경홀히 여기고 있으니 진실로 감히 납득되지 않사외다.
대개 옛사람들은 일월(日月)의 교식(交息)과 오성(五星)의 지속(遲速)에 있어서는 측후(測候)로써 하지 않은 것 같으며 근세의 심과당(沈果堂) 같은 이에 이르러는 이 논(論)을 굳건히 지켰는데 과당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니 만약 목성(木星)으로써 기세(紀歲)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측후의 한 증거가 될 것이외다.
또 화성(火星)에 대해서는 일정(一定)이 없다는 것에 있어서는 비록 추보(推步)에 정(精)한 서양 사람들로서도 오히려 규정짓지 못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화성을 형혹(熒惑)으로 삼는 것에 있어서도 그 이름지은 의의를 규명해 보면 형혹이 아닌데도 측탁(測度)할 수 없어서 그대로 형혹으로 별이름을 한 것인 줄을 또 어찌 알겠습니까. 이는 중국의 측탁이 더욱 서양보다 정하여 이 역시 화성을 측탁한 하나의 증거로 삼을 수도 있으니 어떻게 여기시는지요.
동쪽 사람들은 거개가 궁벽하고 고루하여 천문 산술에 있어서는 더욱 너무도 엉성한 형편이지요. 저 나명향(羅茗香)·서군청(徐君靑)·심협후(沈狹侯) 같은 정심 고예(精深孤詣)한 학문은 일찍이 자나깨나 상상하던 터이었소. 이 여러분들의 저술이 모두 동쪽에는 건너오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한탄스러운 일이외다.
《상서(尙書)》의 학에 대하여는 매양 금문(今文) 고문(古文)을 들어 그대로 고정시키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생각되는군요. 왜냐하면 공벽(孔壁)의 서에도 역시 고문이 있는 동시에 금자(今字)가 있으며 복벽(伏壁)의 서에도 역시 금자가 있는 동시에 고문이 있으니 《상서》를 다스리는 이들이 고문을 위(僞)로 삼고 금문을 진(眞)으로 삼는 것도 정핵(精核)하지 않은 것 같으며, 오늘날 현재 통행하는 《상서》는 고문이 아니요 또 금문도 아니며 위고문(僞古文)이지만 역시 구본이 아닌 것이 있고 위포(衛包)의 개자(改字)한 본(本)도 있으니 단 선생의 서에 곧장 고문으로써 표한 것은 바로 고문 금문을 통괄한 바 있는 탁견인 것이외다. 위묵심(魏黙深)·유익남(柳翼南) 같은 금문을 전치(專治)한 자들은 따로 《후안(後案)》·《소증(疏證)》·《찬이(撰異)》 등 서의 밖에 따로 발명할 것이 있습니까?
위묵심이 삼가시(三家詩)를 다스린 것에 있어서는 동쪽 사람들도 역시 흠앙하는 바이며 시고미(詩古微) 같은 것도 혹 유전된 것이 있는데 대개 묵심의 학은 근일의 한학(漢學) 문호(門戶)에 대하여 또 한 격이 나아가 서경(西京) 금문의 유법으로서 곧장 칠십자(七十子)의 유언 미의(遺言微意)에 접하였으니 역시 학을 닦고 옛을 좋아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하는 자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십사박사(十四博士)의 가법(家法)이 정학으로 인하여 다 없어졌다고 운운한 것은 논을 세움이 아무래도 너무 준(峻)할 성싶습니다.
근일의 전문가로 장고문(張皐文)·유 예부(劉禮部) 같은 두 경사(經師)의 《우역(虞易)》과 《공양춘추(公羊春秋)》는 실로 절학(絶學)을 수천 년 뒤에 열어놓았으니 가위 해와 달을 매달아 불간(不刊)이라 이를 것이며, 혜씨(惠氏 혜동(惠棟))의 《주역술(周易述)》·《역한학(易漢學)》은 비록 광취 박수(廣取博蒐)했다 해도 경사의 가법 같은 것에 이르러는 후생(後生)의 가외(可畏)가 될 성싶으며 공씨(孔氏)의 《공양통의(公羊通義)》도 역시 전문(專門)이라 하겠지만 하소공(何邵公)의 끼친 법이 아니니 마땅히 유씨에게 일주(一籌)를 양보해야 할 것이외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현재 끊기지 않은 실낱 같은 정학이 장차 이 두어 분들로 인하여 없어지고 만다면 되오리까. 경(經)을 말하는 자들은 말을 세움에 더욱 삼가야 할 것이니 어떻게 여기는지요?
유군(柳君)의 서 같은 것은 전혀 얻어보지 못했으며 진석보(陳碩甫)·유보남(劉寶楠)·호묵장(胡墨莊)은 역시 동쪽 사람의 익히 듣던 바이며 호죽촌(胡竹邨)·주무조(朱武曹)의 서도 역시 동국에 유전된 것이 있으며 이신기(李申耆 이조락(李兆洛)) 선생은 이 분이야말로 폐우(弊友) 김추사(金秋史)가 일찍이 깊이 흠모하는 바인데 그 본 것은 영성(零星)한 문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전부의 저술에 대하여는 낮과 밤으로 우러러 축원하며 고대하는 것이외다.
등완백(鄧頑伯) 선생의 전서(篆書)·예서(隷書)는 천하가 받들어 규얼(圭臬)로 삼아 당초부터 다른 말이 없었으며 동방에도 혹 묵탑(墨搨)은 있으나 진적(眞跡)에 이르러는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단 전서·예서만이 아니라 그 해서(楷書)·초서(草書) 역시 몹시도 기굴(奇崛)하여 김동심(金冬心)·정판교(鄭板橋)와 더불어 서로 오르내리며 장고문 형제가 그 전·예의 진수를 체득하여 역시 동쪽 사람의 깊이 흠모하는 대상이 되어 있는데 지금 장씨 집 일문(一門)을 보니 전세(篆勢)와 예법(隷法)이 모두 선세의 업적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여 흠앙하고 칭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양연경(楊蓮卿)은 혹시 양도생(楊道生)의 근친(近親)인지요? 그 전세는 장씨의 가학(家學)과 더불어 함께 등법(鄧法)에서 나왔으니 어찌 이다지도 기이합니까.
《광주경해(廣州經解)》는 대략 그 대의를 살펴보았거니와 존록(存錄)의 취사(取舍)에 있어 실로 양공(良工)의 고심한 곳이 있기는 하나, 《통지당경해(通志堂經解)》의 보는 대로 있는 대로 따라 모아 각(刻)한 것만 같지 못하며 염백시(閻百詩)의 《고문상서소증(古文尙書疏證)》 같은 것은 이야말로 상서가(尙書家)의 필로 남루(蓽路藍縷)라 하겠으니 후일에 상서학을 하는 자는 미상불 이로써 개산(開山)의 제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로 상량할 곳이 있으니 마침내는 《사서석지(四書釋地)》 등 서의 다시 정핵(精核)을 더한 것만은 같지 못할 듯하며 호비명(胡朏明)의 《역도명변(易圖明辨)》 같은 것도 역시 그러하니 지금 이 두 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전벽(全璧)의 큰 흠을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겠지요. 더구나 《연경집(硏經集)》 중의 경을 말한 문자로서 당연히 수록될 것도 수록하지 않은 것이 역시 많으니 이는 수록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역시 양공(良工)의 고심한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외다.
나명향(羅茗香)의 《춘추삭윤표(春秋朔閏表)》 등 서 같은 것에 이르러는 혹시 모아 각할 때에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했는지 모르겠으며 주무조(朱武曹)·유주수(劉州倅)·왕 진사(王進士)의 서 같은 것도 그 뒤에 얻어 추각(追刻)하여 하단에 붙이게 됨을 면하지 못했거나 혹은 각서(刻書)할 때에 미처 보지 못했더라도 역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견(愚見)으로는 다시 보유(補遺)의 한 서(書)를 모아서 비록 각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먼저 그 하나의 목례(目例)를 들어서 후학(後學)에게 끼치고 또한 먼 나라에도 보내어 견문을 넓히게 하여 주길 마음으로 축원하여 마지않으니 행여 빨리 도모해 주기 바라오. 《춘추삭윤표》는 예전 사람들의 고변(考辨)이 손꼽아 헤아릴 수 없으며 지금 이 나씨의 설에 대하여도 반드시 더욱더 발명된 것이 있을 것이니 이런 곳에 있어서는 뒤에 나온 것이 다시 정(精)하고 좋은 것이 될 것이외다.
가까이로 말하면 고동고(顧棟高) 대사표(大事表)의 삭윤(朔閏)에 대한 한 서도 자못 핵실(核實)하며 또는 요상서문전(姚尙書文田)의 저술인 삭윤표 같은 것도 다 볼 만한 것이 있을 터인데 경해(經解) 속에 하나도 수존(收存)된 것이 없으니 이 또한 은미한 뜻을 지녔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에 천문·산학을 말하는 자는 거의 다 《춘추삭윤》에 힘을 다하지 않은 자가 없지만 그러나 이는 진실로 말을 삼가고 의심난 것은 빼버려야 할 것이 있으니 아무래도 서슴없이 추보(追補)하기를 오늘날의 시헌(時憲)의 술(術)과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비록 오늘날 시헌의 법으로써 말하더라도 고성(考成)의 후편은 이미 전편과 더불어 너무도 다르며 비단 너무도 다를 뿐만 아니라 전편에는 지심(地心)으로써 정체(靜體)를 삼고 후편에는 대두(戴頭)한 입법(立法)이 태양을 들어 정체의 신술(新術)로 삼아 머리를 감추고 꼬리를 자르고 단지 타원(橢圓)의 일설에 따라 발명하여 놓았으니 만약 뒷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반드시 본면(本面)에 자상하지 못할 염려가 있지 않겠소이까. 지금의 《전욱역(顓頊易)》·《노역(魯易)》 등의 서는 설사 전서(全書)가 있다 해도 실상 그 멀리 오천 년 이전의 일지(日至)를 역력히 소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그 설을 다 구명하려 들면 하나하나 경복(更僕)할 수는 없으니 주장하여 정한 바 없는 천견(淺見)을 가지고서 감히 군자의 앞에 드러낸 것이 되나 역시 감히 스스로 막아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외다.
옹 선생(翁先生 옹방강(翁方剛))은 능중자(凌仲子 능정감(凌廷堪))와 더불어 문장을 논함에 있어 육조(六朝)까지 끊어버리는 것은 바로 능(凌)의 설이요 옹 선생의 의(義)는 아니외다. 옹 선생은 병려(騈儷)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능의 설에 문선(文選)을 고문(古文)의 정종(正宗)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세속의 소견을 놀래일 듯하나 역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외다. 대개 선리(選理)란 재주와 힘이 겸지(兼至)한 사람이 아니면 손을 댈 수가 없으니 근일에 황백(黃白)을 추대(抽對)하고 고금을 정두(飣餖)하여 요야(妖冶)와 기려(綺麗)를 뒤섞어 아울러 벌여놓는 것을 이름이 아니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이른바 "오직 사(詞)를 예[古]롭게 하되 반드시 자기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는 이것이 참으로 선리인데 공소(空疏)하고 천근(淺近)한 자들이 어떻게 그 사이에 한 글자를 이리저리 할 수 있겠소이까.
지금은 마침내 이 선체(選體)에 반(反)하여 자못 집집마다 옥을 안고 사람마다 구슬을 품었으나 당송 팔가(唐宋八家)의 법에 이르러는 흥작(興作)한 자가 심히 적어 방망계(方望溪)·요석포(姚惜抱)·주매애(朱梅厓)·장고문(張皐文 장혜언(張惠言))·혼자거(惲子居) 약간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맥이 아니니 어찌 그다지도 심히 어려워서 선가(選家)보다 어렵단 말입니까. 완운대(阮芸臺 완 원(阮元)) 선생의 이른바 "창려(昌黎)는 바로 문선의 유폐(流弊)를 바로잡은 이이다."고 한 것은 이야말로 당당한 탁견과 정론으로서 능(凌)의 설과 더불어 안팎이 서로 합하는 점이 있으며 또 그 고증·문필 등의 설은 고학(古學)을 수명(修明)하는 일단으로 오지(奧旨)와 묘의(妙意)가 아닌 것이 없으니 이로서 능(凌)의 설이 근거가 없지는 않다 할 것입니다. 어떻게 여기는지요?
교수(校讐)의 학에 있어서는 이미 단항(斷航)과 절항(絶港)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어중(鄭漁仲)의 《통지제략(通志諸略)》 속에 특히 교수의 한 문(門)을 나타냈으니 이는 유달리 척안(隻眼)을 갖춘 자이며 원·명(元明) 이래로는 이 학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근일에 와서는 전죽정(錢竹汀)·왕예당(王禮堂) 같은 이가 다 그 뽑이일 것입니다.
노 학사(盧學士)·왕고우(王高郵 왕염손(王念孫))의 서(書)는 역시 동쪽에도 온 것이 있으나 《십삼경교감기(十三經校勘記)》에 이르러는 이야말로 집대성(集大成)이라 할 것이니 지금 경서를 읽으려면 이를 버리고 어찌하자는 것입니까.
진 태사 수기(陳太史壽祺)는 일찍이 《교감기(校勘記)》 및 단씨(段氏)의 《한독고(漢讀考)》 중의 두세 가지를 들어 반복하고 상론(商論)하여 옹 선생(翁先生)과 더불어 서찰 왕복으로 서로 논란하였는데 자못 근후(謹厚)한 풍도가 모자란다 하겠으나 진씨(陳氏) 또한 사문(師門)을 위하여 그 시비를 밝히자니 사어(辭語)의 사이에 아마 억제를 하지 못한 듯하외다. 지금 이 두세 조문이 설사 미진함이 있을지라도 전벽(全璧)의 누(累)를 삼아서는 아니 되고말고요. 강성(康成)은 대유(大儒)로서 허씨(許氏)의 《오경이의(五經異義)》를 박정(駁正)했지만 털끝만큼도 허씨에게 손익(損益)됨이 없지 않았습니까.
서법(書法)이 나뉘어져 남북 양파로 된 것도 역시 속일 수 없는 일이나 이는 본시 남북에서 각기 한 스승을 존숭하여 서로서로 문호(門戶)를 가졌을 따름이며 만약 종·왕(鍾王)에게 묻는다면 바로 각기 한번 웃고 말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은 본시 남파라 마침내 우군(右軍)으로써 종(宗)을 삼았으며 북파는 비록 떨치지 못했지만 그러나 구양순(歐陽詢)·저수량(褚遂良)이 북파로부터 온 것은 원류(源流)가 너무도 분명하고 우세남(虞世南)은 남파로써 당 태종과 더불어 서로 같으며 구·저(歐褚)가 우군의 법문(法門)에 젖어든 것은 곧 공영달(孔穎達)이 경학(經學)에 대하여 남학(南學)에 극진하지 못하나 시세(時勢)에 따라 굴한 바 된 것과 같다 하겠지요. 심지어 우군으로서 전·예(篆隷)의 유법(遺法)이 없다고 여겨서는 너무도 불가하니 계첩(稧帖 난정첩(蘭亭帖))의 영(永) 자와 취(趣) 자는 바로 전세(篆勢)·예세(隷勢)의 확증이 있는 것입니다.
장형보(張亨甫)의 논시(論詩)는 과시 설시(說詩)의 극궤(極軌)라 하겠으니 이로써 더욱 형보의 시가 크게 본원(本原)이 있음을 짐작함과 동시에 더욱 흠송(欽誦)하는 바이외다. 누광시고(婁光詩藁)는 다시 몇 권이나 불어났습니까? 상기도 서울에 있습니까? 매양 보면 그는 고결하고 뇌락(牢落)하여 천 길을 솟는 기특한 기운이 읊조리고 한탄하는 사이에 가림없이 나타나고 있으니 어찌 조금 함축하여 그릇을 감추어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겁니까. 선비의 불우(不遇)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 험한 데는 그치고 흐르는 데는 가곤 한다면 곳에 따라 다 통하는 법이니 이 공(公)을 위하여 바라는 바는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우견(愚見)을 바치는 거외다.
석연재(石硏齋)의 수장이 불에 탄 것은 또 서가(書家)의 한 가지 크나큰 액이라 하겠지요. 송참(宋槧)의 선본(善本)은 영번(影翻)하여 간행한 자가 있다 하니 이것은 아마도 세간에 유전한 것이 적지 않을 듯싶습니다. 옥생(玉笙)은 근자에 어느 곳에 있지요? 폐우(弊友) 중에 옥생과 더불어 좋게 지내는 자가 있어 그를 인연하여 익히 들었습니다. 《연경당집(硏經堂集)》 및 경설(經說) 일측(一則)은 받들어 금과 옥조(金科玉條)로 삼는 동시에 이 한 말씀을 얻고 보니 더욱 경을 읽는 진벌(津筏)이라 하겠군요. 현형(賢兄)의 고심(苦心)이 아니면 어떻게 천명(賤名)이 문선루(文選樓)에 전달되어 이와 같은 후황(厚貺)이 있을 수 있겠소. 이마에 손을 얹고 사(謝)할 바를 모르겠소이다. 《상우기(尙友記)》의 보성(補成)은 날로 두고 바라며 왕쌍지(汪雙池)·강신수(江愼修 강영(江永))·주지천(朱止泉)·왕백전(王白田)은 주문(朱門)에 대하여 크게 공이 있다는 것은 역시 동쪽 사람도 아는 바이지요. 왕백전은 더욱 주학(朱學)을 천발(闡發)한 지극한 자로서 비록 당일의 황·양(黃楊) 여러 문제자(門弟子)로도 반드시 이와 같지는 못할 것 같사외다. 《백전초당집(白田草堂集)》은 비록 너무도 영성(零星)하지만 천견으로는 당연히 《삼어집(三魚集)》 위에 있다고 생각되며 반 사마(潘司馬)의 문원(文苑)·순리전(循吏傳)은 이미 발간되었다면 왜 일본(一本)을 멀리 부쳐주지 않는 거지요? 마음으로 빌고 비외다.
인각(印刻)은 육서(六書)의 하나로 존재하여 위로 은·주(殷周)의 종정(鍾鼎)으로부터 진새(秦璽)·한인(漢印)에 미쳐 와서 역시 경사가(經師家)의 가법과 같으니 나로부터 옛것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될 거외다. 전대(前代)의 정목천(程穆倩 정수(程邃))·하설어(何雪漁 하진(何震))는 한인과 더불어 보배를 같이 할 만하며 왕녹대(王麓臺)·심겸재(沈謙齋) 같은 이들의 유적은 상기도 보존된 것이 있는지요? 동소지(董小池)·진만생(陳曼生)은 다 현형과는 지호(知好)의 사이이니 현형이 가진 모든 인(印)은 다 그들이 새긴 건가요? 또한 인보(印譜)의 휘성(彙成)된 것이 있는지요? 제(弟)는 이 인벽(印癖)에 있어 늙어갈수록 더욱 더하므로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이니 여력(餘瀝)에 젖을 수 있기를 원하외다. 왕인암(汪訒庵)은 인(印)을 수장한 것이 많은데 문(文)도 어찌 그리 고아(古雅)한지요. 인 또한 한 보(譜)를 탑성(搨成)한 것이 있습니까? 인암은 바로 현형의 족친입니까? 이소기(伊小沂)의 인각도 역시 양한(兩漢)의 실(室)에 들어 장언문(張彦聞)과 더불어 상하(上下)할 만한데 지금 들은 바 먼 곳에 벼슬살이한다니 주접(湊接)할 인연이 없겠구려. 대략 비포(鄙抱)를 진술하여 감히 부정(斧正)을 바라는 바이며 공사(公私)가 분망하여 마음에 간직했던 것을 다 아뢸 수 없으니 모든 것을 감조(鑑照)하기 바라오. 불선(不宣). 무술(戊戌) 팔월 이십일.

[주D-001]고염무(顧炎武) : 명말(明末) 곤산인(崑山人)으로 자는 영인(寧人), 호는 정림(亭林)인데 명말에 산중에 병거(屛居)하여 경사(經史)에 잠심(潛心)하였고 청(淸)에 들어와서는 벼슬하지 아니하고 사방에 주류하며 책을 수레에 싣고 스스로 그 뒤를 따랐다. 뒤에 화음(華陰)에서 졸하였음. 그 학은 주자(朱子)를 주로 삼았으며 고증(考證)에 능하여 저술이 무척 많았는데 《일지록(日知錄)》 30권은 더욱 몸을 바친 정예의 서(書)가 되었고 《음학오서(音學五書)》를 저술하였음.
[주D-002]강신수(江愼修) : 강영(江永)인데 《고운표준(古韻標準)》을 저술하였음.
[주D-003]《시헌서(時憲書)》 : 역서(曆書)를 말한 것임. 《상서(尙書)》열명 중(說命中)에 "惟聖時憲"의 대문이 있는데 말하자면 성왕(聖王)이 하늘을 본받아 입교(立敎)한 것으로서 《시헌서》의 의의는 대개 이에서 취한 것임. 역대의 역서는 다 모역(某曆)이라 일렀는데, 청 나라 고종(高宗)의 이름이 홍력(弘曆)이므로 비로소 그 휘를 피하여 《시헌서》라 개청하였으니 곧 《시헌력》임.
[주D-004]황백대거(黃白大距) : 책 이름인 듯함. 대고(待考).
[주D-005]심과당(沈果堂) : 청인(淸人)으로 이름은 동(彤), 자는 관운(冠雲), 호는 과당인데 자남(自南)의 증손이다. 제생(諸生)으로 건륭 초에 부름을 입어 홍박(鴻博)에 시(試)하였으나 불우(不遇)하게 되자 삼례(三禮) 및 일통지(一統志)를 찬수하는 데 참여하여 서(書)가 이루어지니 구품관(九品官)을 제수하였다. 친로(親老)를 들어 사직하고 돌아가 군경(群經)에 독지(篤志)하였으며 더욱 삼례에 정(精)하여 논하는 자는 혜사기(惠士奇)에게 버금가고 만사대(萬斯大)보다 순(醇)하다고 일렀으며, 졸(卒)하자 문인(門人)이 문효 선생(文孝先生)이라고 사시(私諡)하였음.
[주D-006]목성(木星) : 팔대 행성(八大行星)의 제5성인데 요일(繞日)하여 한 해에 한 번 돈다. 그러므로 세성(歲星)이라 이름하기도 하고 또는 태세(太歲)라 하기도 함.
[주D-007]추보(推步) : 일월 오성(日月五星)의 도수와 혼단 절기(昏旦節氣)의 차이를 추측하는 것을 이름. 《후한서(後漢書)》 주에 "今用儀器及算術 考測天象 曰推步"라 하였음.
[주D-008]나명향(羅茗香) : 청 강소(江蘇) 감천인(甘泉人)으로 이름은 사림(士琳), 호는 명향인데 《구고절적산술(句股截積算術)》·《춘추삭윤이동(春秋朔閏異同)》·《비례회통(比例會通)》 등 저술이 있음.
[주D-009]서군청(徐君靑) : 청 오정인(烏程人)으로 이름은 유임(有壬), 자는 군청, 일자(一字)는 균경(鈞卿)인데, 도광(道光) 진사로 관은 강소순무(江蘇巡撫)에 이르렀으며 홍양(洪楊)의 역(役)을 당하여 난(難)에 죽으니 시(諡)는 충민(忠愍)이다. 산학(算學)에 정하여 능히 고금의 제명가(諸名家) 밖에서 인법입법(因法立法)하여 홀로 일치(一幟)를 세웠음. 《무민의재산학(務民義齋算學)》을 저술하여 지금 세상에 전하는 것이 7종이다.
[주D-010]공벽(孔壁)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고문상서(古文尙書)》라는 것이 공자(孔子)의 집 벽 속에서 나왔다. 무제(武帝) 말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집을 무너뜨리고 그 궁궐을 넓히려고 하다가 《고문상서》 및 《예기》·《논어》·《효경》을 발견했는데 무릇 수십 편이 모두 고자(古字)였다. 공왕이 그 집에 들어가니 금슬(琴瑟)과 종경(鐘磬)의 소리가 들려오므로 이에 두려워서 마침내 중지하고 무너뜨리지 않았다." 하였고, 그 주에 "《가어(家語)》에 이르기를 '공등(孔騰)의 자는 자양(子襄)인데 진(秦) 나라 법이 준급(峻急)함을 두려워하여 상서·효경·논어를 공자 옛집의 벽 속에 감추어 두었다.'고 하였다." 하였고, 《한기(漢記)》윤민전(尹敏傳)에 이르기를 "공부(孔鮒)의 소장이다. 사주(史籒)란 자는 주(周) 나라 때 사관(史官)인데 학동(學童)을 가르치는 자이다. 공자 벽 속의 고문(古文)과는 체(體)가 다르다." 하였음.
[주D-011]복벽(伏壁) : 복생(伏生)의 벽을 말함. 복생은 한(漢) 제남인(濟南人)으로 이름은 승(勝)인데 진 나라 때 일찍이 박사(博士)가 되었다. 문제(文帝) 때 《상서》를 전치(專治)한 자를 구하였는데 복생의 나이가 90여 세이어서 조 조(鼂錯)로 하여금 가서 구술(口述)로 받아오게 하였다. 그래서 29편을 얻었는데 곧 《금문상서(今文尙書)》가 이것임.
[주D-012]위고문(僞古文) : 동진(東晉) 사람 예장내사(豫章內史) 매색(枚賾)의 소헌(所獻)인 《고문상서》를 말한 것임. 청초(淸初) 염약거(閻若璩)가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을 저술하면서 그것이 위작(僞作)이라는 것을 변증하여 드디어 정론이 되었음. 《國朝經師經義目錄疏》에 "國朝閻氏出 而僞古文寖微 馬鄭之學 復顯於世矣"라 하였음.
[주D-013]위포(衛包) : 당(唐) 나라 사람으로 천보(天寶) 중에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가 되어 조명(詔命)을 받고 《상서》 고문을 고쳐 금문에 따랐음.
[주D-014]위묵심(魏黙深) : 제4권 주 345)에 보임.
[주D-015]유익남(柳翼南) : 미상임. 대고(待考).
[주D-016]삼가시(三家詩) : 한(漢) 나라 때의 시전(詩傳)은 모씨(毛氏) 이외에 제(齊)·노(魯)·한(韓) 삼가가 있어 신공(申公)은 노시(魯詩)를 짓고 후창(后蒼)은 제시(齊詩)를 짓고 한영(韓嬰)은 한시(韓詩)를 지었는데 제시·위시는 이미 없어지고 노시는 서진(西晉) 때 없어졌으며 지금 삼가 시로는 오직 한시 중에 외전(外傳)이 남아 있다.
[주D-017]칠십자(七十子) : 공문(孔門)의 칠십이제자(七十二弟子)를 말함.
[주D-018]십사박사(十四博士) : 금문경(今文經)을 다스리는 사람이 한초(漢初)에 십사가(十四家)가 있어 그들을 다 박사로 삼았다. 《시(詩)》에는 신공(申公)·제(齊) 원고생(轅固生)·한영(韓嬰)의 삼가가 있고, 《서》에는 구양생(歐陽生), 대하후(大夏侯) 승(勝), 소하후(小夏侯) 건(建)의 삼가가 있는데 다 복생(伏生)의 소전(所傳)이요, 《예》에는 대대(大戴) 덕(德), 소대(小戴) 성(聖) 이가가 있는데, 다 고당생(高堂生)의 소전이요, 《역》에는 시수(施讎)·맹희(孟喜)·양구하(梁丘賀)·경방(京房)의 사가(四家)가 있는데 다 전하(田何)의 소전이요, 《춘추공양전》은 엄팽조(嚴彭祖)·안안락(顔安樂) 이가가 있는데 함께 호모생(胡母生)·동중서(董仲舒)에게서 나왔다고 함. 《後漢書 百官志》
[주D-019]유 예부(劉禮部) : 청 공양학자(公羊學者) 유봉록(劉逢祿)이 예부 주사(禮部主事)를 지냈으므로 예부라 칭한 것임.
[주D-020]공씨(孔氏) : 청 공광삼(孔廣森)을 이름인데 곡부인(曲阜人)으로 자는 중중(衆仲), 건륭 진사로 관은 검토(檢討)이며, 대진(戴震)에게서 《공양춘추》를 수학하였음.
[주D-021]하소공(何邵公) : 동한(東漢) 임성(任城) 번인(樊人)으로 이름은 휴(休), 자는 소공인데 사람됨이 질박 눌구(質朴訥口)하나 본디 심사(心思)가 있어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세유(世儒)가 따를 자가 없었다. 《공양춘추해고(公羊春秋解詁)》를 지으면서 17년 동안을 정사(精思)하며 문 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 책이 지금까지 전함.
[주D-022]진석보(陳碩甫)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환(奐), 자는 석보, 호는 사죽(師竹), 만호(晩號)는 남원노인(南園老人)인데 단옥재(段玉裁)의 제자이다. 《모시(毛詩)》·《설문(說文)》을 전치(專治)하여 현학 생원(縣學生員)에 보직하였고 도성에 들어와서는 왕염손(王念孫)·인지(引之)의 부자와 종유하였다. 저술로는 《모시전소(毛詩傳疏)》·《모시설(毛詩說)》·《모시음(毛詩音)》·《시의류(詩義類)》·《정씨전고증(鄭氏箋考證)》이 있음.
[주D-023]유보남(劉寶楠) : 청인으로 자는 초정(楚楨)이요, 태공(台拱)의 종자(從者)인데 도광(道光) 진사이다. 《논어》 황형(皇邢)의 소(疏)가 무잡(蕪雜)함을 병되게 여겨 한유(漢儒)의 구설(舊說)과 근세의 제가(諸家) 및 송인(宋人)의 서를 참조하여 《논어정의(論語正義)》를 지었음.
[주D-024]호묵장(胡墨莊) : 청 경인(涇人)으로 이름은 승홍(承珙), 자는 경맹(景孟), 호는 묵장인데 가경 진사로 관은 대만병비도(臺灣兵備道)에 이르렀으며, 경술(經術)에 구심(究心)하여 《모시(毛詩)》에 더욱 깊이 힘을 썼다. 《모시후전(毛詩後箋)》을 찬술하였으며, 《의례고금문소의(儀禮古今文疏義)》·《소이아의소(小爾雅義疏)》·《이아고의(爾雅古義)》·《구시당시문집(求是堂詩文集)》이 있음.
[주D-025]호죽촌(胡竹邨) : 청인으로 이름은 배휘(培翬), 자는 재병(載屛), 호는 죽촌인데 가경 진사로 관은 호부 주사(戶部主事)에 이르렀다. 그 학이 예경(禮經)에 장(長)하여 서실(書室)을 세택루(世澤樓)라 이름하였음. 저술은 《의례정의(儀禮正義)》·《연침고(燕寢考)》 등의 서가 있음.
[주D-026]주무조(朱武曹) : 청 보응인(寶應人)으로 이름은 빈(彬), 자는 무조, 호는 포보(郙甫)인데 건륭 거인(擧人)이다. 젊어서는 유대공(劉台珙)과 더불어 좋게 지냈으며, 경전(經傳)·훈고(訓詁)·성음(聲音)·문자(文字)의 학에 종사하였다. 저술로는 《경전고증(經傳考證)》·《예기훈찬(禮記訓纂)》·《유도당시문집(游道堂詩文集)》이 있음.
[주D-027]영성(零星) : 영쇄(零碎)와 같은 말로서 정수(整數)를 이루지 못한 것을 이름.
[주D-028]등완백(鄧頑伯) : 청 회령인(淮寧人)으로 초명(初名)은 염(琰), 자는 석여(石如)인데 인종(仁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를 이름으로 하고 다시 자를 완백이라 하였으며, 완공산(皖公山) 아래에 살아서 또 완백산인(完白山人)이라 호하였다. 사체(四體)의 서(書)에 공(工)하되 전서(篆書)는 더욱 신품(神品)이라 칭한다. 포세신(包世臣)은 《예주쌍집(藝舟雙楫)》을 저술하여 청대 제일로 추앙하였음.
[주D-029]김동심(金冬心) : 제4권 주 75)에 보임.
[주D-030]정판교(鄭板橋) : 제4권 주 76)에 보임.
[주D-031]염백시(閻百詩) : 청 태원인(太原人)으로 이름은 약거(若璩), 자는 백시인데 경사(經史)를 박통(博通)하여 고증에 장(長)하며 저술이 매우 많다. 그 중에 가장 저명한 것은 《고문상서소증》과 《사서석지(四書釋地)》 등임.
[주D-032]필로남루(蓽路藍縷) : 필로는 시거(柴車), 남루는 누더기옷을 이름. 《좌전(左傳)》선공(宣公) 12년에 "蓽路藍縷 以啓山林"이라 하였으므로 처음 개척한 일을 두고 쓰고 있음.
[주D-033]개산(開山) : 불씨(佛氏)가 많이 명산(名山)을 가려 개척하여 사원을 세우는데 그 기업을 처음 창설한 자를 개산조사(開山祖師)라 이름함. 그래서 지금 무슨 일이든 처음 개척한 자를 개산이라 함.
[주D-034]호비명(胡朏明) : 청 덕청인(德淸人)으로 이름은 위(渭), 자는 비명, 호는 동초(東樵)인데 경의(經義)를 전공(專攻)하고 더욱 여지(輿地)의 학에 정하여 《우공추지(禹貢錐指)》를 저술하였음.
[주D-035]고동고(顧棟高) : 청 무석인(無錫人)으로 자는 진창(震滄)인데 강희(康熙) 진사로 내각 중서(內閣中書)에 제수되었는데 주대(奏對)의 월차(越次)로써 파직되었다. 건륭 때에 경명행수(經明行修)로 천거되어 국자감 사업(國子監司業)의 직함을 제수하였으며, 81세에 졸하였다. 그 치경(治經)은 《춘추(春秋)》에 장(長)하여 《춘추대사표(春秋大事表)》 131편, 《대유수어(大儒粹語)》 28권을 저술하였음.
[주D-036]요상서문전(姚尙書文田) : 청 귀안인(歸安人)으로 자는 추농(秋農)인데 가경 진사로 관은 예부 상서에 이르렀다. 그 학은 송유(宋儒)를 추숭하며 더욱 한학(漢學)에 구심(究心)하되 한유를 높이고 송유를 헐뜯는 폐단이 없었다. 시(諡)는 문희(文僖)이고 저술은 《수아당문집(邃雅堂文集)》이 있음.
[주D-037]일지(日至) : 동지(冬至)와 하지(夏至)를 말함. 해가 적도 남북을 행하여 동지에는 극남(極南)의 곳에 이르고 하지에는 극북의 곳에 이르므로 일지라 이름. 《맹자(孟子)》이루(離婁)에 "千歲之日至"라는 대문이 있음. 또한 하지를 일장지(日長至), 동지를 일단지(日短至)라 이르기도 함.
[주D-038]정두(飣餖) : 두정(餖飣)이라고도 함. 《옥매(玉梅)》에 "당(唐) 소부감(少府監)에서 어찬(御饌)에는 구반장루(九盤裝纍)를 쓰는데 이름을 구정식(九飣食)이라 하였다. 그래서 지금 시속의 연회에는 점과(黏果)를 자리에 진열해놓고 이를 간석정좌(看席飣坐)라 한다. 옛날에는 정좌(飣坐)라는 칭호가 있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먹지는 않음을 이름이다." 하였다. 한유(韓愈)의 남산시(南山詩)에 "或如臨食案 看核紛飣餖"라 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문사(文詞)의 퇴체(堆砌)를 일러 정두라 한다.
[주D-039]당송 팔가(唐宋八家) : 고문가(古文家) 8명을 이름인데 즉 당의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송의 구양수(歐陽脩)·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임.
[주D-040]방망계(方望溪) :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이름은 포(苞), 자는 영고(靈皐), 호는 망계인데 강희 진사로 관은 시랑(侍郞)임. 일로써 낙직(落職)한 것이 두 번이었다. 논학(論學)에 있어서는 송유(宋儒)를 종(宗)으로 삼아 다 정주(程朱)의 학을 추연하였으며 더욱 《춘추》·삼례(三禮)에 치력(致力)하였고, 문(文)은 한·구(韓歐)를 배워 의법(義法)에 엄했으며, 무릇 붓을 댄 것에는 다 육적(六籍)의 정화(精華)가 있었다. 동성파(桐城派)의 초조(初祖)로서 저술은 《망계문집(望溪文集)》 등이 있음.
[주D-041]요석포(姚惜抱) : 청 동성인(桐城人)으로 이름은 내(鼐), 자는 희전(姬傳), 그 재(齋)의 이름은 석포헌(惜抱軒)이다. 건륭 진사로 경학에 연정(硏精)하여 한·송(漢宋) 문호(門戶)의 견(見)을 파제(破除)하여 《구경설(九經說)》·《삼전보주(三傳補注)》 등의 서를 저술하였다. 더욱이 고문(古文)으로 이름이 천하에 중(重)하였으며 소선(所選)인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은 의례(義例)가 정심하여 학자들이 많이 받들어 규얼(圭臬)로 삼고 있음. 학자들이 석포 선생이라 칭함.
[주D-042]주매애(朱梅崖) : 청인으로 이름은 사수(仕琇), 자는 비첨(斐瞻), 호는 매애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하진지현(夏津知縣)이며 오봉서원(鼇峯書院)에서 주강(主講)하였다. 고문에 능하여 처음에는 한창려(韓昌黎)를 배우고 그 다음에는 진한(秦漢) 이래 제가(諸家)의 장(長)을 박채(博採)하여 충담(沖澹) 순고(醇古)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매애거사집(梅崖居士集)》이 있음.
[주D-043]혼자거(惲子居) : 청 무진인(武進人)으로 이름은 경(敬), 자는 자거, 호는 간당(簡堂)인데 건륭 거인으로 관은 동지(同知)이다. 고문을 전치(專治)하여 한비(韓非)·이사(李斯)에게서 득력(得力)하여 소명윤(蘇明允)과 더불어 서로 오르내림과 동시에 법가(法家)의 언(言)에 가까웠다. 세상에서 양호파(陽湖派)라 칭함.
[주D-044]정어중(鄭漁仲) : 송 보전인(莆田人)으로 이름은 초(樵), 자는 어중인데, 관은 추밀원 편수(樞密院編修)에 이르렀으며, 협채산(夾漈山)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협채 선생이라 칭한다. 고증·윤류(倫類)의 학을 하기를 좋아하여 《통지(通志)》 2백 권을 저술하였음.
[주D-045]척안(隻眼) : 눈빛이 보통 사람보다 동떨어지게 다른 것을 이름. 양만리(楊萬里) 시에 "近來別具一隻眼 欲蹈唐人最上關"이 있음.
[주D-046]전죽정(錢竹汀) : 청 가정인(嘉定人)으로 이름은 대흔(大昕), 자는 효징(曉徵), 호는 신미(辛楣), 일호는 죽정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소첨사(少詹事)에 이르렀으며, 군적(群籍)에 박통하였다. 저술로는 《잠연당집(潛硏堂集)》이 있는데 《이십이사고이(二十二史考異)》·《양
[주D-047]왕예당(王禮堂) : 청 가정인(嘉定人)으로 이름은 명성(鳴盛), 자는 봉계(鳳階), 호는 예당인데 만호(晩號)는 서장(西莊)임. 건륭 진사로 누관(累官)하여 내각학사(內閣學士)에 이르렀는데 문을 걸고 독서하며 당세와는 전혀 수접(酬接)하지 않으며 언앙자득(偃仰自得)한 30년에 경학을 연정(硏精)하였음. 그 학은 한결같이 한인(漢人)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더욱 허·정(許鄭)을 묵수(墨守)하여 《상서후안(尙書後案)》·《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을 저술하였음.
[주D-048]노 학사(盧學士) : 청 항주인(杭州人)으로 이름은 문조(文弨), 자는 소궁(召弓), 호는 포경(抱經)인데 건륭 진사로 관은 시독학사(侍讀學士)이다. 교서(校書)하기를 좋아하여 번열(繙閱)하고 점감(點勘)이 주묵(朱墨)을 아울러 쓰고 한서(寒暑)에도 무관하여 《군서습보(群書拾補)》와 《의례주소상교(儀禮注疏詳校)》·《종산차기(鍾山箚記)》·《용성차기(龍城箚記)》·《광아주(廣雅注)》를 저술하였다.
[주D-049]진수기(陳壽祺) : 청 민현인(閩縣人)으로 자는 공보(恭甫), 호는 좌해(左海), 만호(晩號)는 은병산인(隱屛山人)이다. 가경 진사로 관은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를 지냈다. 경(經)은 한·당(漢唐)의 대의를 터득하고 시문은 육조 삼당(六朝三唐)의 풍격이 있었으며, 오봉서원(鼇峯書院)에서 강학하였다. 저술로는 《좌해전집(左海全集)》이 있음.
[주D-050]허씨(許氏) : 동한(東漢) 여남인(汝南人)으로 이름은 신(愼), 자는 숙중(叔重), 관은 태위(太尉)·남각좨주(南閣祭酒)에 이르렀다. 젊어서부터 경적(經籍)을 박통하여 마융(馬融)이 항상 추대하여 공경하니 당시 사람이 말하기를 "五經無雙許叔重"이라 하였다. 《설문해자(說文解字)》 14편을 저술했는데 육서(六書)의 의(義)를 추구하고 분부 유종(分部類從)하여 지극히 정밀하므로 후세에서 소학(小學)을 말하는 자는 다 종앙(宗仰)하였음.
[주D-051]공영달(孔穎達) : 당 형수인(衡水人)으로 자는 중달(仲達)임. 젊어서부터 총민하여 기송(記誦)을 잘 하였다. 수(隋) 나라 때 명경(明經)에 천거되고 당 나라에 들어와서 관은 국자사업(國子司業)을 지냈다. 일찍이 태종(太宗)의 명을 받아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찬하였는데 바로 지금 주소본(注疏本)의 오경소(五經疏)이다.
[주D-052]장형보(張亨甫) : 청 건령인(建寧人)으로 이름은 제량(際亮), 자는 형보인데 방명(榜名)은 형보(亨輔)이다. 젊어서 기절을 자부하여 광명(狂名)이 있었다. 천하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여 기승(奇勝)을 궁탐(窮探)하였다. 시가(詩歌)를 하되 침웅(沈雄)하고 비장하였으며 저술로는《송요산인집(松寥山人集)》·《누광당고(婁光堂稿)》·《남래록(南來錄)》·《금대잔루기(金臺殘淚記)》·《남포추파록(南浦秋波錄)》 등의 서가 있음.
[주D-053]험한 데는……한다면 : 가의(賈誼)의 《봉조부(鵬鳥賦)》에 "乘流則逝兮 得址則止"라 하였는데, 《문선(文選)》 주에 "지(止)는 혹 감(坎)이라 한다." 하였음. 황정견(黃庭堅)의 《증이보성시(贈李輔聖詩)》에 "流行坎止一虛舟"의 구가 있음.
[주D-054]진벌(津筏) : 도선(渡船)과 같은 말인데 마음에 통하기를 구하여 얻지 못할 땐 이로 말미암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비유한 것임. 한유(韓愈)의 《송문창사북유시(送文暢師北遊詩)》에 "開張箂中寶自可得津筏"이라 하였음.
[주D-055]왕쌍지(汪雙池) : 청 무원인(婺源人)으로 이름은 불(紱)인데 초명은 훤(煊), 자는 찬인(燦人), 호는 쌍지이며 제생(諸生)이다. 가난하여 경덕진(景德鎭)에서 용작(傭作)하다가 민중(閩中)에 와서 동자(童子) 사(師)가 되었다. 그 뒤에 군서(群書)를 박람하여 천문(天文)·여지(輿地)·진법(陣法)·술수(術數)·악률(樂律)에 대해서도 통효(通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송(宋) 오자(五子)의 학으로써 귀의(歸依)를 삼았다. 서실의 이름은 송죽초당(松竹草堂)이며 저술로는 사서 삼경의 《전의(詮義)》·《춘추집전(春秋集傳)》·《독음부경(讀陰符經)》·《이학봉원(理學逢源)》·《산해경존(山海經存)》·《금보(琴譜)》·《시운석(詩韻析)》·《대풍집(大風集)》·《시문집(詩文集)》 등이 있음.
[주D-056]주지천(朱止泉) : 청 보응인(寶應人)으로 이름은 택운(澤澐), 자는 상도(湘陶), 호는 지천인데 옹정(雍正) 중에 직례총독(直隷總督) 유사서(劉師恕)가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고 석산(錫山)에서 도를 강하며 관중(關中)에 통서(通書)하여 자양(紫陽)의 학을 천명하였다. 저술로는 《주자성학고략(朱子聖學考略)》·《왕학변(王學辨)》·《지천문집(止泉文集)》 등이 있음.
[주D-057]왕백전(王白田) : 청인으로 이름은 무굉(懋竑), 자는 자중(子中)이다. 강희 진사로 경술(經術)에 담사(湛思)하여 옹정(雍正) 초에 편수(編修)에 제수되었으나 곧 두문 저서(杜門著書)하며 일생을 마쳤다. 일찍이 주자연보(朱子年譜)를 교정하였으며 저술로는 《백전초당집(白田草堂集)》·《독사기의(讀史記疑)》 등 서가 있음.
[주D-058]황·양(黃楊) : 황은 황간(黃幹)이고 양은 양복(楊復)을 말한 듯함.
[주D-059]삼어집(三魚集) : 육농기(陸隴其)는 청 평호인(平湖人)으로 자는 가서(稼書)요, 강희 진사로 관(官)은 가정(嘉定) 영수(靈壽) 이현(二縣)의 지현(知縣)이며, 죽은 뒤에 청헌(淸獻)의 시호를 내리고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하였다. 그 학은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주로 삼아 정주(程朱)를 추숭(推崇)하고 힘써 왕수인(王守仁)을 물리치니 논하는 자들은 정주의 학통이 명(明)의 설선(薛瑄)·호거인(胡居仁) 이후로는 오직 육농기가 그 정종(正宗)을 얻었다고 일렀다. 저술한 시문을 《삼어당집》이라 하는데 그 학술변(學術辨) 삼편(三篇)은 바로 왕수인의 학을 전론(專論)한 것이다.
[주D-060]왕녹대(王麓臺) : 청 태창인(太倉人)으로 이름은 원기(原祁), 자는 무경(茂京), 호는 녹대이며 강희 진사로 누관(累官)하여 호부 시랑에 이르고 서화보 총재관(書畫譜總裁官)에 재임하였다. 그 산수화(山水畫)는 의경(意境)이 고광(高曠)하여 그의 조부 왕시민(王時敏) 및 왕감(王鑑)·왕휘(王翬)와 아울러 사왕(四王)이라 칭하였음.
[주D-061]동소지(董小池) : 청 절강(浙江) 산음인(山陰人)으로 이름은 순(洵), 자는 기천(企泉), 호는 소지이고 관은 사천남충주부(四川南充主簿)임. 난죽(蘭竹)을 잘 그렸으며 전각(篆刻)에 공(工)하였다. 저술로는 《소지시초(小池詩鈔)》와 《동씨인식(董氏印式)》이 있음.
[주D-062]진만생(陳曼生)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홍수(鴻壽), 자는 자공(子恭), 호는 만생인데, 가경 발공(拔貢)으로 관은 강남해방동지(江南海防同知)임. 고예(古隷)를 잘 썼으며 그림 및 철필(鐵筆)에 공(工)하였다. 《상연리관집(桑連理館集)》이 있음.
[주D-063]왕인암(汪訒庵) : 청 흡인(歙人)으로 이름은 계숙(啓淑), 자는 수봉(秀峯), 호는 인암, 또는 인벽 선생(印癖先生)이며, 관은 공부 낭중(工部郞中)에 이르렀다. 장서(藏書)가 극히 많아 건륭(乾隆) 중에 조명(詔命)으로 유서(遺書)를 방구(訪求)하자 6백여 종을 진정(進呈)하였음. 시에 공(工)하며 서실 이름은 교서루(鮫書樓)·비홍당(飛鴻堂)이라 하였음.
[주D-064]이소기(伊小沂) : 청인으로 병수(秉綬)의 아들인데 이름은 염증(念曾), 자는 소기임. 가경 발공(拔貢)으로 관은 엄주부동지(嚴州府同知)이며, 예법(隷法)에 공(工)하고 산수(山水)·매화(梅花)·전각(篆刻)을 잘하였다. 저술로는 《수연재시초(守硯齋詩鈔)》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