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이여인 최상 에게 주다[與李汝人 最相]

천하한량 2007. 3. 9. 04:54
이여인 최상 에게 주다[與李汝人 最相]

삼가 오당(悟堂) 인계(仁契)에게 답하외다. 날로 편안하신지요.
좌우는 나를 참으로 아는 것이 있다고 여기시는지요. 나는 실로 텅 비고 얕아서 한 가지 아는 것도 없고 또 한 가지 지닌 것도 없는 사람인데 지금 보여준 뜻을 되풀이하여 읽어보면 나같이 비하한 사람을 높이고 꾸며서 저 비로봉(毗盧峯) 정상에 올려 놓으려고 드니 성문(聲聞)이 정(情)에 지나고 칭위(稱謂)가 실답지 못함이 이와 같을 수가 있소.
무릇 정에 지나치는 사연이나 실답지 못한 기림은 바로 군자의 부끄러이 여기는 바이며 한갓 군자의 부끄럽게 여기는 바만이 아니라 또한 문장에 있어서도 제일 꺼리는 일이라오.
지금 좌우가 문장에 마음을 두면서 먼저 그 꺼리는 바를 범하고 있으니 나의 의혹은 너무도 심할 밖에요. 나는 여태까지 공부해 온 것이 통행하는 경사(經史)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만약 통행하는 경사라면 다 좌우가 알고 있을 것 아니겠소.
그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외짝 글자나 반 구절도 더 안다는 구별이 없는데도 도리어 구하여 억지로 동해의 잉어뿔을 취하려 드니 좌우가 그것을 과연 허심하여 받겠는가.
다만 지금 문장에 마음을 두는 자는 제일의 의체(義諦)가 있으니 이는 마땅히 먼저 스스로 속임이 없는 데서부터 비롯해야 되는 거라오.
스스로 속임없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차츰 황내(黃內)가 이치를 통하여 만규(萬竅)가 영롱하게 되거니 어찌 황내가 이치에 통하여 만규가 영롱하고서 문장을 잘 못하는 일이 있겠소. 이는 남에게 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해도 남음이 있는 것이외다.
그러나 옛사람의 문장은 각기 사승(師承)과 가법이 있는데 연혁(沿革)하고 유변(流變)함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으며 말류의 폐단은 또 조처할 길이 없었던 거요.
때문에 한창려(韓昌黎)는 마침 그 운회(運會)를 만나서 큰 역량과 큰 수단으로써 일으켜 정돈하였으니 이는 곧 기려(綺麗)한 말폐(末弊)를 바로잡았을 따름이지요.
지금 거의 천 년이 지나오도록 그 규수를 봉승(奉承)하여 감히 고치지를 못했는데 또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는 기려(綺麗)보다 백 배나 심함이 있으니, 모르괘라, 또 어느 등의 큰 역량과 큰 수단이 있어 일어나 정돈하게 될는지요. 그러려면 붓 가운데서부터 바로잡아 나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글 가운데서부터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꾸고 해야 할 것인지, 이 또한 감히 알지 못할 일이 아니겠소.
무릇 태산의 정상에 당도한 자가 다시 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곳에 다다르면 부득불 옛길로 좇아 내려올 따름이니 이는 오늘날 문장에 마음 두는 자가 눈을 밝혀야만 될 곳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가을 바람이 하마 일어나서 샘맛이 더욱 서늘하니 과연 유상(幼常)과 더불어 다시 한번 찾아주겠소? 유상은 바로 후생의 영수(靈秀)로서 이 세상에는 드물게 보는 인품이니 행여 잘 재성(裁成)하기 바라오. 눈곱이 끼어 이만 적으며, 불선. 우성(牛星)의 저녁.

[주D-001]황내(黃內) : 황중(黃中)과 같은 말인데 황내는 금·목·수·화·토 오행(五行)에 토가 중앙을 차지하므로 이른 것임. 《역(易)》곤(坤) 문언(文言)에 "君子黃中通理 正位居體"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