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오각감 규일 에게 주다[與吳閣監 圭一][2]

천하한량 2007. 3. 9. 04:53
오각감 규일 에게 주다[與吳閣監 圭一][2]

축군비(鄐君碑)는 지난날 첩(帖)의 겉장에 다 적어올릴 적에도 또한 우리나라에 온 일이 없다는 뜻을 아울러 전달했거니와 이 각은 한갓 동쪽에 나온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수장한 사람이 드물다네.
연경에 들어갔을 때에 나 역시 겨우 한 번 얻어 보았는데 탑본이 몹시도 커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벽상에는 걸어 놓을 수가 없고 더구나 글자 모양이 크고 작고 한결같지 아니하여 서로 얼크러지고 엇물려 있어 또한 잘라서 만들 수도 없으며 글자 획이 여위고 가늘어 철사와 같은데 돌의 무리와 이끼 발이 어울려 쩔고 부스러지곤 하여 아무리 눈 밝은 사람이라도 졸지에 줄을 찾고 획을 분별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네.
다행히 소재(蘇齋) 선생의 하나하나 지수하여줌을 입어 비로소 그 대체를 약간은 얻어보았을 뿐이네.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자못 능히 상상이 되어 이따금 임방(臨仿)한 바도 있었지만 그러나 세상의 안목에 너무도 놀랍게 보이기 때문에 일찍이 남을 위하여 만들어 보지는 못했고 간혹 종이 뒷면에 붓을 시험해 볼 따름이었네.
마음으로는 매우 좋아하지만 함께 연구할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으며 지난날 첩의 장에 적어 올린 것은 곧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의(義)에 입각하여 감히 속임이 없는 가는 정성을 바친 것이니 이 뜻을 또한 세세히 아뢰어 밝혀주길 바라네.

[주D-001]축군비(鄐君碑) : 축군포사도비(鄐君褒斜道碑)로서 한비(漢碑)인데 비는 마애(摩崖)로 되어 섬서(陝西) 포성(褒城) 북쪽 석문(石門)에 있음. 송(宋) 소희(紹熙) 말에 남정령(南鄭令) 임치(臨淄) 안무(晏袤)가 처음 발견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 아울러 비문을 해석까지 하여 마애의 뒤에 있다. 그 지대가 애벽(崖壁)이 우뚝이 높고 이끼가 깊이 쩌려서 안령(晏令)이 기(記)를 지은 뒤로부터 6백여 년에 그곳에 가서 모탁(摸拓)한 자가 드물었는데 청(淸) 필완(畢沅) · 왕창(王昶)에 이르러 비로소 이를 위해 저록(著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