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김군 석준 에게 주다[與金君 奭準][4]

천하한량 2007. 3. 9. 04:47
김군 석준 에게 주다[與金君 奭準][4]

동짓날이 이미 지났으니 아마도 주문(朱門)에는 황감(黃柑)을 전해 줄 건데, 들사람은 다만 팥죽을 사립에 뿌릴 따름이니 풍미(風味)가 사뭇 동떨어진 것도 역시 하나의 멋이라면 멋이 아니겠는가.
절에서 돌아온 뒤로 소식이 양쪽 다 막히어 천애(天涯)와 같이 아득만 하니, 한갓 강 얼음이 길을 끊어서만은 아니로세.
근래에는 또 어떤 식으로 소견(消遣)을 하는가. 차는 익고 향은 훈훈하여 족히 추위를 바꿔놓을 만한데, 묵금사(墨金社) 안에서 고아주(羔兒酒)를 가늘게 마시며 역시 생각이 날 같은 가난뱅이 백옥(白屋)에도 미치곤 하는가.
이곳은 바깥 사람을 향해 말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네. 벼룻물이 얼음 잡히려 하여 이만 쓰네.
동쪽 사람으로는 신라 시대 글씨가 중국과 더불어 병칭할 만한데 모두 오로지 구법(歐法)만을 익혔었네. 본조에 들어옴으로부터 이른바 진체(晉體)라는 멋이 나와서 면목이 크게 달라졌는데 그 진체라는 것이 마침내는 이후주(李後主)가 쓴 필진도(筆陣圖)임을 모르고서 비궤(棐几)의 진본으로 인식하였으니, 어찌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동서(董書)로 당인(唐人)의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쓴 것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기는 이백 년이 가까우나, 세상에서 유행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네.
만약 녹의(綠意)의 수장한 병부첩(兵符帖)과 비교하면 부득불 그것이 이에 양보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서의 어려움이 이와 같다네.
동서는 오로지 저법(褚法)으로부터 손을 들여 놓았는데 안평원(顔平原)도 역시 저(褚)를 배워 그 신수(神髓)를 얻은 것이라네.
그러므로 동서가 안서(顔書)에 더욱 가까우며 전·주(篆籒)의 기(氣)로써 들어가서 창아(蒼雅)하고 험경(險勁)한 뜻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다만 곱고 화려하다고만 치는 것은, 모두 가짜를 만드는 자들이 이런 줄은 모르고 함부로 그 형모(形貌)만을 그려냈는데, 이것을 보고서라네.
세상 사람들이 전혀 감별하는 안목이 없으니 가짜를 진짜로 인식하여 마침내 곱고 화려하다고 지목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장득천(張得天)은 평생을 두고 동서(董書)를 익혔으나 겨우 십에 그 이삼을 얻었을 따름이며, 그 공중으로부터 곧장 붓을 내려뜨려 바로 신성(神聖)의 곳에 참여하기란 인력으로 가능할 바 아니요, 특별히 천인(天人)의 마음과 손을 갖춘 사람이라야만 방불하다 이를 거로세. 우리나라 글씨로는 가장 석봉(石峯)을 일컫는데, 석봉의 필력은 동(董)에 비교하면 바로 가볍기가 새깃 하나지만, 세상에 이를 알 사람이 뉘 있겠는가. 대강(大江 양자강) 남북에 가서 물어 보면, 의당 인가(印可)할 자가 있으리라 믿네.
지금 자네의 임방(臨仿)한 것을 보니 자못 깊이 들어간 곳이 있고, 세속 사람들이 동을 익히는 안본(贋本)으로 단지 하나의 지분(脂粉)의 태(態)만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매우 반가운 일이로세.
요즘 사람들이 써낸 글씨를 보니 다 능히 허화(虛和)하지 못하고 사뭇 악착한 뜻만 많아서 별로 나아간 경지가 없으니 한탄스러운 일이로세.
이 글씨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허화(虛和)의 곳에 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르러 갈 바 아니요, 반드시 일종의 천품(天品)을 갖추어야만 능한 것이며, 심지어 법이 갖추고 기(氣)가 이르러 가면 한 경지가 조금 부족하다 해도 점차로 정진되어, 스스로 가고자 아니해도 곧장 뼈를 뚫고 밑바닥을 통하는 수가 있기 마련이라네.
옛을 삼키고 이제를 머금어 / 茹古涵今
끝도 없고 가도 없으며 / 無有端涯
넘실넘실 넓고 넓어 / 渾渾灝灝
무얼 두고 견줄세라 / 不可窺校
흥이 넘쳐 풀어 놀 땐 / 及其酣放
굵은 가락 쾌한 글자 / 豪曲快字
종이 위에 솟아나서 / 凌紙怪發
징글쟁글 곱고 빛나 / 鯨鏗春麗
온 천하를 놀래었네 / 驚耀天下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정밀하고 교묘하며 / 然而栗密竊眇
맞은 글귀 편한 문장 / 章妥句適
정(精)코 능한 지극이라 / 精能之至
하늘 솟고 신(神)에 드니 / 入神出天
어허 이에 막혔구려 / 嗚乎極矣
뒷사람 더하자도 더할 수가 없고말고 / 後人無以加之矣
이는 바로 황보지정(皇甫持正)이 창려(昌黎) 한유(韓愈)의 글을 논한 말인데 한갓 문장에만 이러할 뿐이 아니라 서도(書道)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임지(臨池)에 통할 만하므로 이를 가져 뽑아 보임.

[주D-001]고아주(羔兒酒) : 《제요록(提要錄)》에 "학사(學士) 도곡(陶穀)이 당 태위(黨太尉)의 고기(故妓)를 사서 얻었다. 하루는 눈이 내리자 도곡은 설수(雪水)를 가져다가 단다(團茶)를 달이면서 기생에게 말하기를 '당씨(黨氏) 집에서는 응당 이 맛을 모를 것이다.' 하자, 그 대답이 '그는 추인(粗人)인데 어찌 이 경(景)을 아오리까. 다만 소금장(銷金帳) 안에서 천짐저창(淺斟低唱)하며 고아주나 마실 뿐이지요.' 하였다." 하였음.
[주D-002]백옥(白屋) : 백모(白茅)로 덮은 집을 이름인데 천인(賤人)의 거처임. 당음(唐音)에 "天寒白屋貧"의 구가 보임.
[주D-003]이후주(李後主) : 오대(五代) 남당(南唐)의 후주 이욱(李煜)을 말함. 자는 중광(重光)인데 문사(文詞)를 잘하고 서화에 능하였음.
[주D-004]비궤(棐几) : 비목(棐木)으로 만든 궤를 이름. 《진서(棐書)》왕희지전(王羲之傳)에 "일찍이 문생(門生)의 집에 가서 비궤가 활정(滑淨)함을 보고서 진초(眞草)가 상반(相半)한 글씨를 썼다."고 하였음. 그래서 산음비궤(山陰棐几)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임.
[주D-005]녹의(綠意) : 미상임. 대고(待考).
[주D-006]장득천(張得天) : 청 화정인(華亭人)으로 이름은 조(照), 자는 득천, 호는 경남(涇南)이며, 관은 형부 상서에 이르고 서법(書法)이 매우 공(工)하였다. 고종(高宗)의 회구시(懷舊詩)에 "羲之後一人 舍照誰能若"이라 하였으니 그 견중(見重)이 이와 같았다. 시호는 문민(文敏)임.
[주D-007]황보지정(皇甫持正) : 당(唐) 신안인(新安人)으로 이름은 식(湜), 자는 지정이며 원화(元和) 진사로 벼슬은 공부 낭중(工部郎中)에 이르렀다. 일찍이 배도(裵度)를 위하여 복선사비문(福先寺碑文)을 짓는데 술이 얼큰하자 붓을 잡고 당장에 이루었다. 식은 이고(李翶)·장적(張籍)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고 저술은 《황보지정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