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김동리 경연 에게 주다[與金東籬 敬淵][2]

천하한량 2007. 3. 9. 04:44
김동리 경연 에게 주다[與金東籬 敬淵][2]

일전에 서로 말한 묘제(廟制)의 설에 대해서는 미진한 것이 있으니 환궁(桓宮) 희궁(僖宮) 같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양공(襄公) 육년에 제후(齊侯)가 내(萊)를 멸하고 내의 종기(宗器)를 양궁(襄宮 제양(齊襄)의 묘(廟))에 들이다."라는 대문을 들어 고증한다면 묘제에 형제의 항렬에 있어서는 다 따로 묘를 세우며 형제로써 서로 잇는 자는 소·목(昭穆)의 차서가 없으니 양공이 영공(靈公)에게는 여덟 군(君)이 있으매 만약 오묘(五廟)의 수와 같이 한다면 양공은 이미 조(祧)가 되었을 것이외다.
그 실상을 상고해 보면 양(襄)과 환(桓)은 형제로 일세(一世)가 되고 효·소·의·혜(孝昭懿惠)가 다 형제로서 일세가 되고 경(頃)이 일세가 되며 영공은 경공을 아비로 하고 혜공을 조(祖)로 하고 환공은 증조가 되고 희공은 고조가 되며 양이 환에게는 증조 항(行)이 되니 양묘(襄廟)가 헐리지 아니해야 마땅하며 만약 오묘(五廟)의 상제(常制)에 구애된다면 태묘(太廟)의 밖에 오직 소·의·혜·경만 있을 따름이요 양은 또 항(行)이 없고 시해를 당했으며 경·영의 소출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독 그 묘만 보존되었으며 더구나 남의 나라를 쳐서 얻은 종기를 들였겠는가?
이로써 형제로 대를 이은 자는 다 따로 사당을 세웠음을 알겠으며 영공의 세(世)는 제(齊) 나라에 있어 마땅히 구묘(九廟)가 되어야 할 것이외다.
묘가 고문(庫門) 안의 바른 편에 있으니 그 땅이 제한이 있어 따로 세울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 같으며 예가 이미 비상(非常)일진대 마땅히 권제(權制)하여 혹은 땅을 확장해서 만들거나 혹은 다른 궁실을 철폐하고 만들거나 할 것이며 반드시 외관(外觀)에 구애하지 않아도 될 거 아니겠소. 노(魯) 나라 사람에게도 예 아닌 사당이 있어, 중자(仲子)의 궁·무궁(武宮)·양궁(煬宮) 같은 것도 오히려 서슴없이 따로 세웠은즉 예에 의해 세울 수 있는 것이라면 또 못할 게 무어 있겠는가.
오경(五經)이란 《역(易)》·《시(詩)》·《상서(尙書)》·《예(禮)》·《춘추(春秋)》이며 육경이란 《논어》를 아울러 말한 것이니 오경은 대수(大數)를 든 것이요 육경은 기실(紀實)의 문이며 혹은 오경 혹은 육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듣고 본 것에 있어 말이 다른 것이외다.
또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칠경이라 했는데 칠경이라는 것은 또 오경에다 《춘추(春秋)》와 《공양전(公羊傳)》을 나누어서 말한 것이며 지금 남아 있는 잔자(殘字)로는 전(傳)은 있어도 경은 없으니 전이 있으면 마침내 경이 있는데 오·육·칠경의 같지 않은 것은 지금 전해 내려오는 잔자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증거를 삼을 수 있으리오.
또 불가불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낙양기(洛陽記)》에 이른바 《예기》라는 것인데 동경(東京)에서는 일찍이 《예기》로써 학관(學官)에 세우지 않았고 예의 대·소대(大小戴) 같은 것은 곧 《의례(儀禮)》의 대·소대(大小戴)의 학이며 지금 소대례(小戴禮)로 《예기》를 삼은 것은 아니니 이 석각(石刻)한 바로 《서경》은 복생(伏生) 금문(今文)을 쓰고 《춘추》는 공양을 쓴 것은 마땅하거니와 《예기》는 당초 학관에 세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러 경과 더불어 아울러 각할 수 있겠는가.
또 지금 잔자에는 《의례》만 있고 《예기》는 없으니 바로 《낙양기》가 잘못되어 시에 미치지 못한 것을 알겠으며 홍씨(洪氏)의 서 및 《수서》 경적지에는 마침내 시가 있는데 그 시는 곧 노시(魯詩)이외다. 지금 이른바 희평(熹平)의 잔자(殘字)에 모시(毛詩)가 있다 한 것은, 모르괘라, 역시 근거가 있는지요? 모시도 또한 그때에 학관에 세우지 못했으니 이 돌에 각한 것은 곧 노시일거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