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김동리 경연 에게 주다[與金東籬 敬淵][1]

천하한량 2007. 3. 9. 04:43
김동리 경연 에게 주다[與金東籬 敬淵][1]

그끄제 선세 기고(忌故)가 있어 종가에 갔다가 비에 막혀 돌아오지 못하고 어제 늦게야 비로소 돌아오니 혜서가 놓여 있어 놀랍고도 섭섭했소.
아침에 답을 올리려 했는데 하인이 진 길을 걸어 거듭 와 소식을 주니 너무도 불민함을 느끼겠소.
더구나 추습(湫濕)이 갈수록 심한데 자잘한 근심 걱정이 그치지 아니하여 많이 심신을 괴롭힌다니 진실로 염려가 되는구려.
전정(篆幀) 및 비도(碑圖)는 원본과 아울러 삼가 영수한 바 비도는 나를 위해 하나의 수고를 덜어 주셨으니 그지없이 감사한 동시에 다시 자세히 고증하겠으며 전정은 과시 가품(佳品)으로서 자법(字法)이 벽락문(碧落文)에 가까워 대체로 속필(俗筆)은 아니니 마땅히 달아 놓고서 차분히 감상할 생각이외다.
지난날 보여 주신 석경논어(石經論語)의 "의(意)와 억(抑)이 서로 통한다."에 대하여는 바로 이것이 고훈(古訓)인데 이 물음을 받고서 반갑고 기뻐 비할 데 없었소.
만약 형이 때로 끌어내 주지 않으면 가슴속의 글자가 장차 두레박줄이 없는 완정(眢井)이 되었을 거고 썩어서 버섯을 이루었을 거고 묵어서 나비가 되었을 거외다.
《시》에 이른바 억차황부(抑此皇父)의 ‘억’은 담계(覃溪)의 시에 이미 인용하였으며 한시(韓詩)에 ‘억(抑)’은 ‘의(意)’라 일렀고 《대대례(大戴禮)》나 《순자(荀子)》에는 많이 ‘의(意)’로 만들어 썼으며 특히 의(意)의 글자와 서로 통할 뿐만 아니라 ‘희(噫)’의 글자와도 서로 통하며 ‘희(噫)’의 글자와 서로 통할 뿐만 아니라 ‘의(懿)’의 글자와 통하기도 하지요.
《시》의 억(抑)편은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의(懿)’로 만들어졌는데 위소(韋昭)는"억(抑)으로 읽는다."라 하였으니 이와 같은 유는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을 정도이외다.
무장비(䥐藏碑)는 과시 홍복비(弘福碑)의 자체요 인각비(麟角碑)와 같이 집자(集字)한 것은 아니며 김육진(金陸珍)은 바로 신라 말엽의 사람인데 비의 연대는 지금 상고할 수 없으며 정예(鄭隸)는 끝내 구득 못한다니 이상한 일이구려. 나더러 보서(補書)하라는 것은 불감(不敢)하여 사양하겠사외다.
마침 또 섭동경(葉東卿)의 예서 한 폭을 얻었기로 이것을 부쳐 올리는데 자못 볼 만하나 그 대련(對聯)에 비한다면 조금 손색이 있으니 연(聯)은 아마도 그의 득의작이었던가. 우리들이 선입견이 있어 그런 건가 알지 못하겠으니 보고 말해 주심이 어떠한지요. 불선.

[주D-001]완정(眢井) : 폐정(廢井)을 이름. 완(眢)은 눈동자가 말라붙은 것을 이름인데 우물이 말라 물이 없는 것도 완이라 이름. 《좌전(左傳)》선공(宣公) 12년에 "目於眢井而拯之"가 있고 그 주에 "眢井廢井"이라 하였음.
[주D-002]무장비(鍪藏碑) : 즉 무장사비(鍪藏寺碑)인데 경주(慶州) 동쪽 30리에 있던 것으로 왕희지 글씨를 집자(集字)하였으며 신라인(新羅人) 수대남령(守大南令) 김육진(金陸珍)의 찬(撰)이다. 행서(行書)로 1단(段)은 17행인데 매행에 9자로부터 24자까지 되어 균등하지 않으며, 1단은 15행으로 매행에 6자에 9자까지 되어 역시 균등하지 않다. 이 비는 가경(嘉慶) 연간에 완당(阮堂)이 17행의 1석(石)을 얻었고 뒤에 정축년에 이르러 또 15행의 1석을 얻었다.
[주D-003]인각비(麟角碑) : 인각사의 보각국존정조탑비(普覺國尊靜照塔碑)를 이름.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고로면(古老面) 화수동(華水洞)에 있음. 이 비의 전면은 민지(閔漬)의 찬이고 후면은 승(僧) 산립(山立)의 찬이며, 사문(沙門) 죽허(竹虛)가 왕희지 글씨를 집자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 21년에 청분(淸玢)이 입석(立石)하였음.
[주D-004]섭동경(葉東卿) : 청 섭지선(葉志詵)은 한양인(漢陽人)으로 자는 동경인데 금석(金石學)에 있어 호망(毫芒)을 분석하였으며, 소장한 이기(彝器)가 매우 많았음. 완당과는 교계(交契)가 매우 깊어 문문(聞問)이 잦았으며, 옹담계(翁覃溪)의 문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