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7]

천하한량 2007. 3. 9. 03:54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7]

산해(山海) 같은 큰 은혜에 대하여 하느님께 축원하고 성상께 축수하되, 온 나라가 같은 소리로 아울러 칭송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삼가 생각하건대, 합하의 거마(車馬)가 어찌 택반(澤畔)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괴표(魁杓)가 한 바퀴를 돎으로써 천도(天道)가 순환하였으니, 절로 의당 대도두(大刀頭)가 있게 되어 경사와 상서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잠시 종유하다 이내 헤어졌던 이 사람은 스스로 슬프고 즐거움과 헤어지고 만나는 데에 고뇌(苦惱)를 겪으면서, 마치 굼틀대는 하찮은 벌레가 광영(光影)을 바라고 붙좇듯이 대인(大人)의 경계에 의탁하여 영광을 함께 하는 행복을 누려 왔는데, 우러러 합하의 권주를 힘입어 또한 살아서 옥문(玉門)을 들어왔고, 이어 전간(田間)에 돌아와 처박혀 있으면서 어제 초형(漁弟樵兄)과 재연(再緣)을 이은 것처럼 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혜택이겠습니까.
동음(峒陰)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두 아우를 만나서 합하의 서신을 받들어 보니, 내가 북쪽에서 길을 떠났던 날이 바로 합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시던 때였기에 멀리서 흔연히 축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전사(田舍)에 당도한 지 이틀 만에 또 삼가 위문해 주심을 받으니, 은연중 생각하고 있던 터라 더욱 천번 만번 찬탄(讚歎)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간혹 합하를 직접 뵙고 온 사람에게서 합하의 기거(起居)에 관하여 들어보면, 송백(松柏)처럼 견정(堅貞)하시고 금석(金石)처럼 무강(無疆)하시다고 했었는데, 지금 합하의 서신을 보니, 과연 참으로 그렇습니다.
또 삼가 살피건대, 첫 추위를 만나서 균체도(勻體度)가 신명의 보우로 편안하시며, 잘못된 업인(業因)은 이미 사라지고 좋은 과보(果報)만 날로 원만해짐으로써 운산(雲山)은 합하로 인해 뜻을 얻게 되고 세속의 잡다한 일들은 곁에서 멀어졌으며, 닭고기와 기장밥은 생활의 전체이고 물고기와 새들은 훌륭한 친구가 된 가운데, 천기(天機)의 자연 속에 이리저리 소요(逍遙)하신다 하니 그곳이 저 번상(樊上)의 땅과 서로 백중지세일 듯합니다. 그러나 다만 그곳의 샘물맛은 어떻습니까? 구구이 우러러 축원하는 바입니다.
소인은 새로 입은 은혜는 비록 깊으나 지난날의 원통함은 아직 남아 있으므로, 감히 풀려 돌아왔다고 해서 살아있는 사람으로 자처할 수가 없으니, 하늘이여, 나는 대저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이미 살아 돌아와서는 또 삼가 알매(䵝昧)에 관한 은혜로운 하유(下諭)를 받들어 보니, 나의 사정을 남김 없이 통촉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즉시 나아가서 합하를 면알하는 것은 사리로 보나 정의로 보나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산사(山寺)의 약속에 대한 하교가 이렇듯 정중하시니, 좋은 방편(方便)에 따라서 감히 받들어 주선하지 않겠습니까.
함흥(咸興)을 지나다가 지락정(知樂亭)에 올라서 '산해숭심(山海崇深)' 네 글자를 보았는데 글씨가 매우 기걸하고 건장하였습니다. 옛날에 연지(蓮池)의 박상(朴相)이 억지로 이 '해(海)' 자를 꼬집어 말하였는데, 이는 예서(隸書)의 법칙을 전혀 알지 못한 때문인지라 나도 모르게 아연 대소(啞然大笑)가 터져 나왔습니다.
'퇴촌(退村)' 두 큰 예자(隸字)는 팔을 억지로 놀려 써서 바치오니, 글씨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필획(筆畫)의 사이에 굴신(屈伸)의 뜻을 붙였으니, 허여해 주시고 공졸(工拙)을 또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록 일반적인 사소한 문자(文字)일지라도 군자가 서로 주고 보답하는 데에나, 친구 사이에 서로 경계를 하는 데에 있어 모두가 반드시 경계를 붙이는 것이 있었으니, 옛 사람들은 원래 맹목적으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하나의 노리개를 완상하는 일이며 하나의 몽학선생[俗師], 글자쟁이[字匠]에 불과한 것이니 어찌 억지로 꾸밀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거위[鵝] 백 마리와 바꾼다 하더라도 또한 속서(俗書)일 뿐인 것입니다. 내 글씨는 매우 졸렬하기만 하더니, 이제서야 속서는 면했음을 알겠습니다.

[주D-001]괴표(魁杓) : 괴는 북두칠성(北斗七星) 가운데 제일성(第一星)을 말하고, 표는 꼬리 부분의 별들을 가리킨다.
[주D-002]대도두(大刀頭) : 돌아온다[還]는 말의 은어(隱語)임. 대도두는 칼머리에 달린 고리[環]를 이르는데, 환(環)과 환(還)의 음이 서로 통하므로 이렇게 쓴 것인데, 여기서는 특히 유배생활이 풀린 것을 이른 말이다.
[주D-003]살아서……들어왔고 : 옥문은 곧 대궐 문을 말한 것으로, 유배생활이 풀려 돌아온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4]거위[鵝]……바꾼다 : 진(晉) 나라 때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본디 거위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산음(山陰)의 한 도사(道士)의 집에 거위가 있었으므로 왕희지가 가서 그것을 보고는 몹시 좋아하여 도사에게 팔기를 요구하였다, 도사가《도덕경(道德經)》을 써 주면 거위를 주겠다고 하니, 왕희지는 과연《도덕경》을 써 주고 그 거위를 가져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글씨를 대단히 잘 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晉書 卷八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