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6] |
협곡(峽谷)으로부터 고개까지가 과연 대인(大人)의 경계(境界)입니까? 태산 북두(泰山北斗) 같은 어른이 하읍(下邑)에 굽어 임하시니 옥규(玉虯)와 요상(瑤象)도 따라서 소요(逍遙)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신룡(神龍)이 혹 누에벌레로 변화하기도 하고, 수미산(須彌山)이 개자(芥子) 안에 들기도 하는 격이 되었으니, 이는 또 크고 작은 것을 가지런히 할 수 있고 이사(理事)에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없이 변천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잡아 정할 수 없는 것이니, 비록 백번 천번 변환하는 가운데 낭풍(閬風)·현포(懸圃)를 만나더라도, 자신이 편안한 대로 하고 어떤 사물의 부린 바가 되지 않는 그것이 바로 군자(君子)의 근각(跟脚)을 세우는 것이니, 뭇사람들처럼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면서 더러운 세속에 동화하는 것과 같지 않은 결과입니다.
다만 목전의 떠도는 소문으로 본다면 인자하게 감싸 주시는 성은(聖恩)이 하늘과 함께 끝이 없다고 하니, 이는 곁에서 보기에도 감격할 일인데, 더구나 몸소 은총을 받으신 분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느 날에 황급히 영(嶺)을 넘어가시었고, 머무를 곳에 대한 방편(方便)은 이전에 계신 곳과 다르지 않으며, 수천(水泉)도 맑고 시원하고 그곳 토풍(土風) 또한 유순합니까? 풍설(風雪)이 극심한 이때에 균체후(勻體候)가 온갖 신령의 보우를 받아 심신이 다 건강하시고 털끝만큼도 손상됨이 없으시기를 구구하게 우러러 축원하며 감히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못하여 마치 심중(心中)에 못이 박힌 것이나 인주(印朱)로 도장을 찍은 것과도 같습니다. 파로(坡老)의 혜주(惠州)는 만족하지 못하고 위공(衛公)의 애주(崖州)는 크다 하겠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따지겠습니까.
고인(古人)들도 역사(易詞)를 주석(注釋)하거나 약방(藥方)을 초록(抄錄)하는 일은 모두 이 무료한 곳에서는 없을 수가 없었으니, 한가로운 일과(日課)나 부질없는 흥취도 일단(一段)의 걱정 없애는 것만 될 뿐이 아닙니다. 백운동(白雲洞)과 부석사(浮石寺)의 좋은 경치는 조용히 탐방할 만하거니와, 안 문성(安文成)의 방풍(芳風)은 유진(遊塵)을 쓸어버릴 만하고 주신재(周愼齋)의 뛰어난 기상(氣像)은 심지어 이끼 낀 벽(壁), 갈라진 틈새의 글자까지도 이매(魑魅)와 요괴(妖怪)를 제복(制伏)시킬 만하니, 백세(百世) 후에서도 그의 풍채(風彩)를 거슬러 올라가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나간 옛일을 추모할 수 있고 상계(像季)를 감발(感發)시킬 수 있는 것이 더욱 절로 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고향에 행차하실 때에는 내 또한 멀리 강외(江外)로 나갔기 때문에 큰비가 내리는 가운데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이미 사전에 당도할 수가 없었고, 이내 또 이번 행차가 있게 되어 다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포천(抱川)의 역점(驛店)에 이르러 지나가는 여부(輿夫)를 만나 보고서야 비로소 삼가 9일에야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嶺]를 넘은 그 이후로는 모두가 당음(棠陰)의 자애(慈愛)를 남긴 지역이었으므로 송영(頌詠)을 거듭하는 가운데 마치 몸을 의탁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낙민루(樂民樓) 아래에 이르러서는 이교(李校)가 소장하고 있는 서첩(書帖)을 읽어보게 되어 기쁨을 스스로 감당치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해가 새로워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꽃 핀 때를 만난 것 같기도 하여, 이 몸이 새외(塞外)에 유랑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어렴풋이 합하의 풍채를 지척 사이에서 뵙는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망녕되이 제지(題識)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을 이미 정람(呈覽)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신 왕래를 어떻게 할 길이 없어 마음속에 늘 걸려 있던 가운데 뜻밖에 이교(李校)가 유마 거사(維摩居士)의 응신(應身)을 나누어서 동파(東坡)의 경계에 도달하였으니, 혜주(惠州)가 천상(天上)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시함(詩緘)을 받들어 한번 읽고서 우러러 상상하건대, 포용한 것이 광대하여 조금도 낀 것이 없으므로, 소아(小雅)의 원비(怨誹)도 없고 초소(楚騷)의 이우(離憂)도 없어, 더럽고 혼탁한 먼지 속에서 우뚝이 초월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험난한 데에 처하여 더욱 형통해진 것인가 봅니다. 어쩌면 그리도 성대하시단 말입니까. 이것을 내 몸에 패복(佩服)하매 하나의 대명(大明)의 신주(神呪)이며 태상(太上)의 영부(靈符)가 되었으니, 도저(到底)하신 합하의 권주(眷注)에 대하여 끝없이 감송(感誦)할 뿐입니다.
소인은 28일의 홍수에 막히고 30일의 비바람을 겪고 나서 이곳 성동(城東)의 화피옥(樺皮屋)에 도달하여 겨우 남은 생명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지(冬至) 이후부터 황달기(黃疸氣)가 얼굴에 나타나서 엄연한 일개 황면 노담(黃面老曇)이 되었으나, 의약(醫藥)을 쓸 길이 없어 스스로 반드시 죽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인연인지, 병기가 회전하여 수일 이내에 점차로 누른 빛은 바래가고 있으나 원기(元氣)가 이미 손상되었으니, 또 무엇을 바라며, 또 무엇을 연연하겠습니까. 그러니 동백산중(桐柏山中)에 들어가 나란히 밭 갈자던 옛 약속은 아마도 산과 계곡의 조롱거리만 될 듯합니다.
근고(勤苦)로운 생활로 말하자면, 동쪽에서 꾸고 서쪽에서 얻어 올 때에 겨우 여비를 마련하였는데, 사중(舍仲)·사계(舍季) 무리들도 우모(羽毛)가 초초(譙譙)하여 또한 어디에서 재력(財力)을 마련할 길이 없고, 이곳은 또 흉년이 들었으니, 먹고사는 것을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또한 되는대로 맡겨둘 작정입니다. 또 이런 흉년에 누구에게 동정을 애걸하며, 누가 또 그것을 응해 주겠습니까. 그냥 운명에 따를 뿐입니다. 강생(姜生)과 철서(鐵胥)는 모두 몸을 분발하여 따라오기는 하였으나 어떻게 그들에게 충심(忠心)을 다할지 모르겠습니다.
동기창(董其昌)의 서축(書軸)은 이것이 또 대단히 좋습니다 필획(筆畫)마다 모두 중봉(中鋒)을 운용하였습니다. 동기창 필획의 강력한 흔적이 이와 같은 다음에야 동기창의 진서(眞書)는 보통 글씨들과 비교할 수 없으며 동기창이 된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망녕되이 용렬한 세속 사람들은 이런 절묘함이 있는 것을 모르고 동기창의 필법을 함부로 헐뜯고 있으니, 동기창의 필법이 왕희지(王羲之)의 정통에서 나온 것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담정(覃幀)은 그 상단(上段)은 진필(眞筆)로서 바로 그 60세 이전인 중년(中年) 시절의 필적입니다. 그러나 하단(下段)은 진필이 아닙니다. 가짜를 조작하는 자들이 해외(海外)에도 식견을 갖춘 한 노안(老眼)이 있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삼가 조소(嘲笑)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하단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으니, 즉시 깎아버리게 해서 물고기의 눈깔이 구슬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욱 좋겠습니다.팔대산인(八大山人)의 그림은 거듭 열람해 보니 진필이 아니었습니다. 화법(畫法)은 진실로 아름다우나 습기(習氣)를 퍽 띠었습니다. 팔대산인의 그림은 원래 아무런 흔적을 찾을 데가 없는데, 어찌 습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문오봉(文五峯)의 화권(畫眷)은 썩 아름다워서 본가(本家)의 풍채(風采)를 잃지 않았고, 제관(題款) 또한 그의 수적(手迹)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문형산(文衡山)의 서원축(西苑軸)은 이와 같은 것이 또한 많은데, 필법은 각초(刻峭)함이 약간 부족하기는 하나, 보통 글씨로 가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서원축의 맨 끝에는 심 초원 정방(沈椒園廷芳)의 소인(小印)이 찍혀 있으니, 심씨의 옛 소장품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심씨는 바로 담옹(覃翁)의 선배인데, 풍류(風流)와 문채(文彩)가 한 시대에 빛나서 담옹께서도 매우 중히 여겼던 분이니, 그가 기필코 가짜 작품을 수장(收藏)했을 리가 없습니다.
[주D-001]옥규(玉虯)와 요상(瑤象) : 말과 수레를 뜻함. 옥규의 규(虯)는 용(龍)으로서 말을 의미하고, 요상은 상아(象牙)로 장식한 귀인의 수레를 의미한다.
[주D-002]이사(理事) : 불교의 용어로, '이'는 절대 평등의 본체를 뜻하고, '사'는 상대적 차별의 현상을 뜻한다.
[주D-003]낭풍(閬風)·현포(懸圃) : 모두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명(山名)이다.
[주D-004]파로(坡老)의……못하고 : 파로는 호가 동파(東坡)인 송 나라 소식(蘇軾)을 이르는데, 그는 일찍이 혜주(惠州)에 3년간 안치(安置)되었다가 다시 경주 별가(瓊州別駕)로 폄적(貶謫)되었다. 《宋史 卷三百三十八》
[주D-005]위공(衛公)의……하겠으니 : 위공은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으로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진 이덕유(李德裕)를 이르는데, 그는 참소에 의해 애주사호참군사(崖州司戶參軍事)로 폄적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바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唐書 卷一百八十》
[주D-006]안 문성(安文成)의……만하고 : 안 문성은 고려(高麗) 말기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이름. 문성은 그의 시호이다. 안향은 특히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원(元) 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고, 또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초상과 제기(祭器)·악기(樂器) 등을 비치하고, 학생들에게 육경(六經)·제자(諸子) 등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방풍(芳風)은 정악(正樂)을 말하고, 유진(遊塵)은 음악(淫樂)을 말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풍속을 일신시킨 것을 뜻한 말이다.
[주D-007]주신재(周愼齋) : 조선 중기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을 이름. 신재는 그의 호이다. 그는 특히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안향(安珦)의 고향인 순흥(順興)에 안향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이어 주자(朱子)의 백록동 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설하여 안향을 향사하였다.
[주D-008]상계(像季) : 계(季)는 말(末)과 같은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삼시(三時) 중의 두 시기로서 즉 불교가 쇠퇴해지는 기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말세(末世)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주D-009]당음(棠陰) : 지방관(地方官)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푼 것을 비유한 말. 주 소공(周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팥배나무[棠]를 매우 소중히 여긴 데서 온 말이다.
[주D-010]이교(李校)가……있었습니다 : 이교는 곧 이씨인 군교(軍校)인 듯한데, 동파 소식(蘇軾)이 일찍이 혜주(惠州)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므로, 즉 이교라는 자가 마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응신(應身)처럼 나타나 자신의 유배지까지 와서 소식을 전해 주었음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주D-011]소아(小雅)의 원비(怨誹) : 원비는 원망하여 비방하는 것을 이르는데, 《사기(史記)》 굴원전(屈原傳)에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은 여색을 좋아하는 뜻이 있어도 음란하지 않고, 소아는 원망하는 뜻이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않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초소(楚騷)의 이우(離憂) : 초소는 초(楚) 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에 의해 쫓겨나서 우사번민(憂思煩悶)의 심정을 토로하여 지은 〈이소(離騷)〉를 말하고, 이우는 곧 근심을 만났다는 뜻이다.
[주D-013]황면 노담(黃面老曇) : 불교의 용어로, 황면 구담(黃面瞿曇)·황면 노자(黃面老子)라고도 하는데, 즉 부처의 몸이 황금빛이므로 부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주D-014]우모(羽毛)가 초초(譙譙)하여 :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호(䲭鴞)에 "나의 깃은 몽땅 모지라지고, 나의 꼬리는 다 닳아 빠졌다.[予羽譙譙 予尾翛翛]"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간고(艱苦)한 생활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5]담정(覃幀) : 정(幀)은 서화(書畫) 등의 족자를 이른 것으로, 청 나라 때의 학자로서 호가 담계(覃溪)인 옹방강(翁方綱)의 족자를 가리킨 듯하다.
[주D-016]팔대산인(八大山人) : 명(明) 나라의 종실(宗室)인 주답(朱耷)의 호이다. 주답은 본디 서화에 모두 뛰어났는데, 명 나라가 망한 뒤에는 승려(僧侶)가 되었고, 그의 문에는 아(啞) 자 하나를 써 붙이고서 남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D-017]문오봉(文五峯) : 명(明) 나라 때의 화가로서 특히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畫)에 능했던 문백인(文伯仁)을 이름. 오봉은 그의 호이다.
[주D-018]문형산(文衡山) : 명 나라 때의 학자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을이름. 형산은 그의 호이다.
[주D-019]심 초원 정방(沈椒園廷芳) : 초원은 심정방의 호임. 심정방은 청 나라 때의 학자로, 《십삼경정자(十三經正字)》·《속경의고(續經義考)》·《은졸재시문집(隱拙齋詩文集)》등 많은 저서가 있다.
[주D-002]이사(理事) : 불교의 용어로, '이'는 절대 평등의 본체를 뜻하고, '사'는 상대적 차별의 현상을 뜻한다.
[주D-003]낭풍(閬風)·현포(懸圃) : 모두 곤륜산(崑崙山) 꼭대기에 있는, 신선이 산다는 산명(山名)이다.
[주D-004]파로(坡老)의……못하고 : 파로는 호가 동파(東坡)인 송 나라 소식(蘇軾)을 이르는데, 그는 일찍이 혜주(惠州)에 3년간 안치(安置)되었다가 다시 경주 별가(瓊州別駕)로 폄적(貶謫)되었다. 《宋史 卷三百三十八》
[주D-005]위공(衛公)의……하겠으니 : 위공은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으로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진 이덕유(李德裕)를 이르는데, 그는 참소에 의해 애주사호참군사(崖州司戶參軍事)로 폄적되었다가 그 다음 해에 바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唐書 卷一百八十》
[주D-006]안 문성(安文成)의……만하고 : 안 문성은 고려(高麗) 말기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이름. 문성은 그의 시호이다. 안향은 특히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어 원(元) 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껴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고, 또 국학 대성전(國學大成殿)을 낙성하여 공자(孔子)의 초상과 제기(祭器)·악기(樂器) 등을 비치하고, 학생들에게 육경(六經)·제자(諸子) 등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유학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방풍(芳風)은 정악(正樂)을 말하고, 유진(遊塵)은 음악(淫樂)을 말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풍속을 일신시킨 것을 뜻한 말이다.
[주D-007]주신재(周愼齋) : 조선 중기의 학자인 주세붕(周世鵬)을 이름. 신재는 그의 호이다. 그는 특히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부임하여 안향(安珦)의 고향인 순흥(順興)에 안향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이어 주자(朱子)의 백록동 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창설하여 안향을 향사하였다.
[주D-008]상계(像季) : 계(季)는 말(末)과 같은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 삼시(三時) 중의 두 시기로서 즉 불교가 쇠퇴해지는 기간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말세(末世)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주D-009]당음(棠陰) : 지방관(地方官)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푼 것을 비유한 말. 주 소공(周召公)의 선정에 감격하여 백성들이 그가 일찍이 쉬었던 팥배나무[棠]를 매우 소중히 여긴 데서 온 말이다.
[주D-010]이교(李校)가……있었습니다 : 이교는 곧 이씨인 군교(軍校)인 듯한데, 동파 소식(蘇軾)이 일찍이 혜주(惠州)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므로, 즉 이교라는 자가 마치 유마거사(維摩居士)의 응신(應身)처럼 나타나 자신의 유배지까지 와서 소식을 전해 주었음을 비유한 말인 듯하다.
[주D-011]소아(小雅)의 원비(怨誹) : 원비는 원망하여 비방하는 것을 이르는데, 《사기(史記)》 굴원전(屈原傳)에 "《시경(詩經)》의 국풍(國風)은 여색을 좋아하는 뜻이 있어도 음란하지 않고, 소아는 원망하는 뜻이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않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12]초소(楚騷)의 이우(離憂) : 초소는 초(楚) 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소인의 참소에 의해 쫓겨나서 우사번민(憂思煩悶)의 심정을 토로하여 지은 〈이소(離騷)〉를 말하고, 이우는 곧 근심을 만났다는 뜻이다.
[주D-013]황면 노담(黃面老曇) : 불교의 용어로, 황면 구담(黃面瞿曇)·황면 노자(黃面老子)라고도 하는데, 즉 부처의 몸이 황금빛이므로 부처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주D-014]우모(羽毛)가 초초(譙譙)하여 :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호(䲭鴞)에 "나의 깃은 몽땅 모지라지고, 나의 꼬리는 다 닳아 빠졌다.[予羽譙譙 予尾翛翛]"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간고(艱苦)한 생활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5]담정(覃幀) : 정(幀)은 서화(書畫) 등의 족자를 이른 것으로, 청 나라 때의 학자로서 호가 담계(覃溪)인 옹방강(翁方綱)의 족자를 가리킨 듯하다.
[주D-016]팔대산인(八大山人) : 명(明) 나라의 종실(宗室)인 주답(朱耷)의 호이다. 주답은 본디 서화에 모두 뛰어났는데, 명 나라가 망한 뒤에는 승려(僧侶)가 되었고, 그의 문에는 아(啞) 자 하나를 써 붙이고서 남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D-017]문오봉(文五峯) : 명(明) 나라 때의 화가로서 특히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畫)에 능했던 문백인(文伯仁)을 이름. 오봉은 그의 호이다.
[주D-018]문형산(文衡山) : 명 나라 때의 학자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문징명(文徵明)을이름. 형산은 그의 호이다.
[주D-019]심 초원 정방(沈椒園廷芳) : 초원은 심정방의 호임. 심정방은 청 나라 때의 학자로, 《십삼경정자(十三經正字)》·《속경의고(續經義考)》·《은졸재시문집(隱拙齋詩文集)》등 많은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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