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7]

천하한량 2007. 3. 9. 03:50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7]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온 나라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것이 해가 지날수록 더욱 열렬합니다. 합하께서는 임금을 보호하는 직임에 계시므로 그 두 손 모아 송축하심과 그 영광되심이 남보다 천만 배나 더하시리니, 참으로 매우 훌륭하십니다.
화기(和氣)가 천하에 가득하고 화락의 은택이 온 나라에 널리 입혀져서, 저 굼틀거리는 하찮은 미물(微物)들도 모두 이 밝은 태양 아래 서로 고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갇힌 몸은 온 나라가 경사를 함께 하는 이런 때에도 감히 머리를 내놓을 수가 없으니, 인애(仁愛)한 천심(天心)으로도 혹 비추어주심을 빠뜨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기야 죄악이 극에 달하여 이렇게 스스로 단절함으로써 산해(山海)와 같은 인업(因業)으로 영원토록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진 몸이라, 비록 지장보살(地藏菩薩)의 발원(發願)이나 광음천(光音天)의 자비(慈悲)로도 법이 통하지 않을 곳이 있고, 운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 천지 간에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내가 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입니까?
가보(家報)를 인하여 삼가 듣건대, 지난번에 합하의 건강이 대단히 나빠졌다가 이내 회복되는 기쁨이 있었다고 하니, 몹시 우려한 나머지, 이미 지난 일이라 해서 처음 놀랐던 마음을 잡아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의원(醫員)이 통이 커서 약을 퍽 강하게 쓴 때문인데, 일찍이 왕년에도 여기에 대해서 우견(愚見)을 말씀드렸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70을 바라보는 고령이므로 또 수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데, 어찌하여 조금도 돌이켜 생각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주의를 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요행히 이득을 본 것은 바로 패술(霸術)일 뿐, 끝내 노인의 절선(節宣)하는 방도가 아닙니다. 비록 기혈(氣血)이 쇠하지 안아서 장(腸)이 튼튼하고 뇌(腦)가 충만하다 하더라도 약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합하의 한 몸은 합하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국가가 의지하여 중히 여기는 바이며 만민이 우러러 의탁하는 바이니, 과연 어찌해야겠습니까? 비록 합하께서 겸손하시어 그런 처지를 자처하려 하지 않더라도 이는 될 수가 없습니다. 기왕 그것이 될 수가 없고 보면, 합하께서 자신을 돌보는 데에 있어 의당 헤아리는 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이 합하께 우러러 바라는 것이야말로 어찌 또 다른 사람에게 비유하겠습니까. 나는 합하를 마치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르고 보옥(寶玉)처럼 떠받들어 합하의 일동 일정을 살피는 데에 관계가 더욱 중합니다. 그리하여 이 소식을 들은 이후로 대단히 놀란 나머지, 감히 이렇게 여러 말을 무릅쓰고 올리는 것이니, 조금이나마 굽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내려주신 서한에서 이 소인을 힘써 경계해 주신 말씀은 바로 매우 정당(停當)한 정론(正論)이었으므로, 감히 다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러러 바치는 바이니, 바다 밖에서 구구하게 걱정하며 기도하는 지극한 마음을 굽어 살펴주시기를 천만 번 바라는 바입니다.
다다푸
다품(茶品)은 과연 승설(勝雪 차의 이름)의 남은 향기입니다. 내가 일찍이 쌍비관(雙碑館)에서 이와 같은 것을 보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이후로는 40년 동안에 이런 것을 다시 보지 못하였습니다. 영남(嶺南) 사람이 이것을 지리산(智異山) 산승(山僧)에게서 얻었는데, 산승 또한 이를 저축하기에 여념이 없어 실로 많이 얻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또 명년 봄에 재차 산승에게 요구하도록 하였는데 산승들이 모두 깊이 숨겨두고 관(官)을 두려워하여 쉽게 내주지 않으나, 그 사람이 산승과 좋게 지내는 사이이므로 오히려 도모할 만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점차 서로 교환하는 방도도 있을 것입니다.
서두(書頭)의 소인(小印)은 이것이 철수(鐵手)인 듯한데, 그 기교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비록 복우허(濮又栩)·주당(周棠)의 무리도 반드시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입니다. 월전(月前)에 비교하면 또 한 경지가 더 진취되었으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동산(東山)의 바둑이 아직 판이 끝나지 못한 듯한데, 말 한 필, 동복 두 사람을 데리고 재차 은총의 명[寵命]을 받으셨습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특별한 대우에 감격하시어 한가로이 지내실 겨를이 없게 되니, 푸른 구름과 붉은 단풍잎이 분기(憤氣)를 띠고, 계곡과 숲도 또한 다시 크게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깨끗한 향락을 과연 하늘도 어렵게 여기어 매양 사람들에게 인색한가 봅니다. 운수(雲水) 속에서 성정을 기르고 구로(鷗鷺)와 함께 지내기로 맹약한 무리들은 매양 운수와 구로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으로 구실(口實)을 삼는데, 이는 모두 실제로 세체(世諦)를 잊지 못하는 이들이 귀의(歸依)하고자 한 바이니, 이는 또한 쉽게 이루기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강백석(姜白石)의 암향(暗香) 한 곡조(曲調)는 석호(石湖)의 출처(出處)에 대하여 면려한 것이니, 또한 어찌 감발(感發)하여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자(君子)의 시기에 따르는 일과 대인(大人)이 행행(悻悻)을 절조로 삼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모두 부쳐 의탁한 바가 있었습니다.
근래에는 나쁜 기운이 이미 다 맑혀져서 다시는 감히 요괴가 싹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태평한 세상에도 인심의 그릇됨이 어찌하여 이토록 극에 달하는지, 매우 분개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주D-001]인업(因業) : 불교의 용어로, 즉 인연(因緣)이 되는 악업(惡業)을 이른 말이다.
[주D-002]동산(東山)의 바둑 : 은거(隱居)생활을 비유함. 진(晉) 나라 때 사안(謝安)이 속진(俗塵)을 피하여 동산에 은거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3]푸른……되었습니다 : 은사(隱士)가 산(山)을 떠남으로 인하여, 구름이나 숲이나 계곡이 모두 실망을 하게 된다는 뜻으로, 공치규(孔稚珪)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풍운이 분기를 띠고, 천석이 목메이게 슬퍼한다……숲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계곡도 한없이 부끄러워한다.[風雲悽其帶憤 泉石咽而不愴……林慙無盡澗愧不歇]"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강백석(姜白石)의……것 : 강백석은 바로 송(宋) 나라 때의 시인인 강기(姜夔)를 이름. 백석은 그의 호이다. 석호(石湖)는 역시 송 나라의 시인 범성대(范成大)의 호이다 암향(暗香)은 사명(詞名)으로, 강기가 일찍이 범성대의 집에 가 노닐면서 매화(梅花)를 두고 암향(暗香)·소영(疏影) 두 사(詞)를 짓고 직접 곡(曲)까지 지어 노래한 데서 온 말인데, 이 가사의 내용은 본집(本集)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白石道人歌曲集 卷四》
[주D-005]행행(悻悻) : 성을 발끈 내는 것을 이름.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내가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임금이 간(諫)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을 발끈 내서 얼굴에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