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4]

천하한량 2007. 3. 9. 03:49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4]

근자에 전해 들으니, 서울에서는 모두 기뻐서 손뼉을 치며 춤을 춘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고 양도(陽道)가 세상에 퍼짐으로 인하여 하우씨(夏禹氏)가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은 고종(殷高宗)이 열심히 학문에 종사하였듯이 선왕(先王)들의 큰 업적을 계승해서 성대한 정화(政化)를 널리 폄으로써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다시 오늘날에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성상께서 특별히 간택하시어 합하가 다시 중서(中書)에 들어가시게 된 것이니, 이제는 명군(明君)·양신(良臣)이 서로 만나서 상하가 지극히 빛나는 만큼, 날로 임금을 보도하는 데에 공경을 다하고, 백성을 선도하는 정치를 성대히 펴서, 성상의 특별한 은총에 우러러 보답하고, 아래로 뭇사람의 소망에 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운산(雲山)과 어조(魚鳥)에 관한 일은 헤아릴 겨를도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겨울에 내가 올린 서함은 봄 이후에야 비로소 도착되었다고 하니, 합하께서는 또 어느 때에 이 서함을 보실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봄 일이 이미 절반이나 지났는데도 혹독한 추위는 아직도 지난 설 무렵과 같은 이때에 균체후(勻體候)께서 많은 복을 받으시어 깊은 합내(閤內)가 일체 안길(安吉)하십니까? 멀리서 구구하게 사모하여 송축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죄인 정희는 이렇게 병든 몸으로 이곳에 있은 지 7년이 되었는데, 그 완둔하고 어두움이 점차로 더욱 목석(木石)보다 심해져가고 있으니, 이것이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코에는 열화(熱火)가 이글거리고, 혀에는 백태(白苔)가 끼며, 눈은 항상 어른어른하여 나날이 이 증세들이 사람을 들볶는 바람에 도저히 반 시각도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속히 죽어서 아무것도 몰라버리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비록 7년을 더 지낸다 하더라도 무슨 득될 것이 있겠습니까.
한 가지 지극히 원통한 것이 있습니다. 생각건대, 이제는 성명께서는 거울처럼 환히 내려다 보시고 합하께서는 성명을 잘 보상하심으로써 한 백성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어두운 구덩이에 빠진 나만은 절로 이 밝은 태평성대와 막힘으로 인하여, 문을 지키는 호표(虎豹)가 그대로 있고 실내(室內)에 들어온 과극(戈戟)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설령 빠진 나를 구원할 긴 팔이 있고, 마른 나를 적셔줄 감로수(甘露水)가 있다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원통하여 탄식하며 길이 호곡하여도 구름 덮인 바다만 아득할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마침 내 집의 사자(使者)가 돌아가는 것을 인하여 좋은 인편을 그냥 보내 버릴 수 없어 밝은 창문 앞에 눈을 의탁하고 대략 몇 자를 적어서 겨우 이렇게 우러러 전달하여, 애오라지 세후로 몹시 사모해오던 사사로운 생각을 펴는 바입니다. 문사가 거칠어 의식을 이루지 못하는지라, 송구하여 흐르는 땀이 붓 끝에 사무칩니다.
일전에 은서(恩敍)를 크게 편 데 대하여 감축(感祝)하는 마음 한량 없습니다. 조정의 면목이 비로소 바르게 되었으니, 이를 간절히 찬송(贊頌)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합하에게 더디다거나 이르달 것이 어디 있으며, 또 더하다거나 덜하달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서교(西郊)의 바람과 천둥은 이내 그치고, 동대(東岱)의 장마비가 성하게 내리니, 구구히 기뻐하여 경하하는 것이 일단의 사사로이 좋아하는 것에만 그칠 뿐이 아닙니다.
지금의 설옥빙첨(雪屋氷簷)은 바로 지난 시절의 열계화택(熱界火宅)이었으니, 이때를 당해서 어찌 오늘의 이 경지를 헤아렸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순환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 그 옛날 동쪽 쑥이 산골짜기에 뒹굴고 남쪽 허수아비가 고갯마루에 굴러다니던 곳에 반드시 이 오색과(五色瓜)의 땅이 있게 되는 법이므로, 내 낀 강과 중첩한 산봉우리에 은총의 빛이 가장 먼저 화려하게 입혀져서, 강가의 나무와 갈매기·백로들까지 영화를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 오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콩알처럼 안목이 좁은 세체(世諦)는 특히 헷갈리고 그릇되어 사리를 알지 못하여, 천운이 순환하는 즈음에 망녕되이 그릇된 소견으로 현실을 희롱하여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자미(紫微)·옥당(玉堂)과 동파(東坡)·적벽(赤壁)이 모두가 절로 하나의 동파일 뿐이요, 백성들이 웃고 또 노래하는 것과 한 언덕, 한 골짜기가 바로 현실의 광경이니, 온 나라가 모두 법도를 같이 하고 촌야인(村野人)들이 다 희희낙락하게 되면 태평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니, 태평이 무궁하기를 우러러 기원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소인은 하늘이 버린 바이고, 귀신이 꾸짖은 바이며,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바이고, 비와 이슬이 적셔주지 않는 바로서, 온 누리에 농사일이 일제히 시작되었는데도 이 그늘진 곳에는 빙설(氷雪)이 여전히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내 자신은 아비지옥(阿鼻地獄)에 영원토록 빠진 몸인바, 비록 제바(提波)에게도 오히려 수기(授記)가 있었는데, 제바보다 더 심한 자에게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허공을 뛰어오르려 해도 허공이 오르는 것을 받아주지 않고, 땅에 박히려 해도 땅이 또한 뱉어내 버려서,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지경이라, 미처 넘어지고 꺼꾸러지며 나갈 곳을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은총으로 발탁되시던 때와 수신(壽辰) 때에는 도리상 당연히 사사로운 정을 한번 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면목으로 들어 보여서 남 따라 행동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합하께서도 내 사정을 양해하시어, 일체 막혀 단절된 것에 대해서 깊이 나무라지는 않으실 듯합니다.
오항륜(吳香輪) 여사(女史)에 대해서는 점차 생각이 나는데, 이가 바로 운대문하(芸臺門下 운대는 청 나라 완원(阮元)의 호임)의 여제(女弟)인 듯합니다. 또한 내가 옛날에 그 자료를 초록해 놓은 것이 있었는데, 지금 어느 먼지 끼고 좀이 슨 상자 속에 들어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D-001]오색과(五色瓜) : 여러 가지 아름다운 오이를 이름. 당(唐) 나라 맹호연(孟浩然)의 남산하여로포기종과시(南山下與老圃期種瓜詩)에 "천 그루 귤나무를 심지 않고, 오직 오색과만을 자뢰삼로라.[不種千株橘 惟資五色瓜]" 하였다.
[주D-002]세체(世諦) : 불교(佛敎)의 용어로 즉 세속의 도리(道理)를 말한다.
[주D-003]자미(紫微)……뿐이요 : 현달한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나, 사람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이다. 자미는 궁중(宮中)을 뜻하고, 옥당(玉堂)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별칭인데, 송(宋) 나라 때 소식(蘇軾)이 어느 때는 한림학사 등을 지내면서 현달하였고, 또 어느 때는 황주(黃州)에 폄적(貶謫)되어 동파(東坡)라는 곳에 우거(寓居)하면서 스스로 동파라 호(號)하고, 적벽(赤壁)에 가 노닐면서 적벽부(赤壁賦)를 짓기도 했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4]제바(提波) : 석존(釋尊)의 사촌 아우인 제바달다(提波達多)의 준말로, 그는 성질이 무척 포학하고 욕심이 많아서, 석존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등 매우 못된 행동을 많이 자행하였다 한다.
[주D-005]수기(授記) : 석존(釋尊)이 보살(菩薩)·이승(二乘) 등에게 다음 세상에 성불(成佛)하리라는 것을 낱낱이 예언하는 교설(敎說)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