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1]

천하한량 2007. 3. 9. 03:48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1]

균함(勻函)을 받들지 못한 지가 1년 정도 되었으나 자획(字畫)이 있기 이전의 문묵(文墨)은 엄연히 그대로 있으니, 생(生)과 멸(滅)이 다르지 않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데에 대하여 호남(弧南)의 노숙(老宿)은 의당 이것을 증명할 듯합니다. 예전에 정(情)을 말했던 것은 비단 위의 그림[錦上之圖]이나 쟁반 속의 글자[盤中之字]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서 이는 곧 모두 겉치레일 뿐입니다. 대체로 이미 발한[已發] 것은 아직 발하기 이전[未發]의 중(中)에 대하여 10분의 2~3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지금 보내주신 서함(書函)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그 법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함이 이르렀을 때에 곁에서 보는 이도 안색을 바꾸어 흔연히 서로 고해 주었고, 해도(海濤)와 천풍(天風) 또한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 넘쳐 흐르는 것을 깨달았는지라, 이미 식어버린 재나 이미 달라붙은 솜과도 같은 이 마음 또한 마치 밝게 깨는 듯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병환이 점차 회복되시자 필묵(筆墨)을 점검하시어 예전과 다름이 없이 수백언(數百言)의 장서(長書)를 써서 보내주셨으니, 내 마음이 발동하는 것은, 진실로 곁에서 보는 이의 보는 것은 실상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은 그것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지난번의 병환은 오로지 담화(痰火)로서 이것이 바로 예전의 증상이요 특별히 새로 육기(六氣)에서 빌미가 생긴 것이 아닌데, 다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담화인 줄을 알았으면 이것이 비록 천태 만상으로 변화한다 하더라도, 혈맥을 소통시키고 담화를 끌어내리는 양방(良方) 이외에 약을 이것저것 마구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병을 강하게 치는 약제(藥劑)에 이르러서는 강장(强壯)한 사람도 삼가야 하는데, 더구나 지금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고령의 노인에게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나의 구구한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을 듯합니다. 일찍이 보건대, 황원어(黃元御)의 의방(醫方)에서 화역(火逆)의 증상을 논해 놓은 것이 자못 구비하여, 마른 흙[燥土]으로 역(逆)을 강하시키고 따뜻한 물[煖水]로 화(火)를 칩복시키는 방법이 자상하게 적혀 있었는데, 이에 대한 약방(藥方)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황원어는 바로 장중경(張仲景)·손진인(孫眞人)의 구결(舊訣)을 전공하여 천 년 동안 전하지 못한 비밀스럽고 오묘한 것을 찾아내어 하간(河間)·단계(丹溪)로부터 그 이하의 의설(醫說)들을 아울러 일체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비유하자면 마치 최근에 경학(經學)을 전공한 염잠구(閻潛邱)·대동원(戴東原)과 같아서, 《입문(入門)》·《회춘(回春)》 등의 약방이나 주워다가 사람을 가지고 병증을 시험하는 속의(俗醫)들과는 대단히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장중원(張仲遠)은 대대로 황원어의 법을 지키어, 중원 부자(父子)가 모두 의리(醫理)에 매우 정통하였으니, 다만 '마른 흙으로 역을 강화시키고 따뜻한 물로 화를 칩복시키는' 법을 물어서 그에 대한 약방(藥方)을 얻고, 아울러 현재의 증상을 논란하여 한 가지 좋은 약제를 마련해 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하면 마른 흙으로 역을 강하시키는 법은 아마 서로 부합되는 곳이 있을 듯합니다. 하기야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한가로운 행장을 꾸려서 저 임천(林泉)에 소요하는 것이 실상은 몇 제의 청량제(淸涼劑)를 복용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일을 이룰 수 있을는지는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햅쌀밥은 기름이 하얗게 흐르고, 게의 배꼽에는 누런 살이 뭉치며, 동산의 밤나무에서는 알밤을 따고, 울타리의 국화는 술잔에 띄울 만하리니, 들 밖의 풍미(風味)가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만하고, 또한 묵은 질병을 떨쳐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천기(天氣)는 높고 공허하며, 장마비 걷히고 물은 맑은데, 균체후(勻體候)는 많은 복을 받으시어 지난날의 병환이 차츰 없어지고, 요즘에는 과연 한가로이 운산(雲山)에서 성정을 수양하시는지, 삼가 늘 잊지 못하여 멀리서 송축하는 마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다만 강호(江湖)와 위궐(魏闕 조정을 이름)은 진실로 서로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 기미를 보고 떠나서 완전히 서로 잊어버릴 수야 있겠습니까. 수레바퀴나 새의 날개처럼 임금을 보좌하고, 음식의 간을 맞추듯이 임금의 선정(善政)을 보좌하며, 오직 단독의 외로운 몸으로 임금을 연연하여 방황하면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유독 어질다 해서 혼자만 수고를 도맡아 하는 데에 있어 어찌 중산보(仲山甫)의 길이 생각하던 것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장차 갈 곳에 대해서는 끝없이 연연하고, 현재 머물러 있는 곳에 대해서는 또한 망설이실 터이라, 이것이 정희(正喜)가 또 대단히 마음 쓰이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주D-001]황원어(黃元御) : 청(淸) 나라 사람으로 의학(醫學)에 정통하여《소문(素問)》·《영추(靈樞)》·《난경(難經)》·《상한론(傷寒論)》·《금궤(金匱)》·《옥함경(玉函經)》등의 주석을 지었고,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다.
[주D-002]장중경(張仲景)·손 진인(孫眞人) : 장중경은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의학(醫學)에 정통하여《상한론(傷寒論)》·《금궤옥함요략(金匱玉函要略)》 등의 의서를 저술한 장기(張機)를 이름. 중경은 그의 자이다. 손 진인은 당(唐) 나라 때 은사(隱士)이며 도인(道人)으로서 특히 의약에 정통하여《천금요방(千金要方)》·《섭생진록(攝生眞籙) 》 등 많은 의서를 저술한 손사막(孫思邈)을 이름. 진인은 바로 그의 호칭이다..
[주D-003]하간(河間)·단계(丹溪) : 하간은 금(金) 나라 때 하간 사람으로 특히 의술(醫術)에 정통하여
[주D-004]염잠구(閻潛邱)·대동원(戴東原) : 염잠구는 청 나라 때의 경학자(經學者)이며 고증학(考證學)에도 뛰어났던 염약거(閻若璩)를 이름. 잠구는 그의 호이다. 대동원은 역시 청 나라 때의 경학자로서 자가 동원인 대진(戴震)을 가리킨다.
[주D-005]중산보(仲山甫)의……것 : 중산보는 주 선왕(周宣王)의 현신(賢臣)인데, 그가 주 선왕의 명을 받고 제국(齊國)의 성(城)을 쌓으러 나갔을 적에 윤길보(尹吉甫)가 시를 지어 "중산보가 길이 임금을 생각하는지라, 이로써 그의 마음을 위로하노라.[仲山甫永懷 以慰其心]" 한 데서 온 말이다. 《詩經 大雅 蒸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