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철로 접어든 이후로 배 소식[船信]이 약간 격조해지자 주야로 사모하던 차에 즉시 내 집의 사자가 오는 편을 인하여 삼가 내려주신 서함을 받아 보니, 이것은 20여 일에 불과한 최근의 소식이었습니다. 내가 해중(海中)에 들어온 뒤로 서신이 이토록 신속하게 전달된 것을 미처 보지 못했는지라, 존안(尊顔)을 직접 뵌 듯이 기쁠 뿐만이 아닙니다. 경기(京畿) 지역에 새로 이관(莅官)하면 느슨한 띠에 가벼운 갖옷의 홀가분한 차림으로 한가로움을 기를 수도 있겠으나, 한국(閒局)이 패국(敗局) 아닌 것이 없고, 묘경(妙境)이 모두 악경(噩境)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는 고인(古人)이 가호(歌壺)하던 좋은 곳을 특별히 찾으려고 하더라도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림자를 감추고 자취를 없애버리려면 그만이겠거니와, 기왕 빛을 감추고 속진(俗塵)에 섞여 지내는 입장으로서는 또한 이 속에서부터 더듬어 나가서 장벽(墻壁)과 기왓장 사이에 흙이나 바르고, 시렁과 문지방 사이에 나무나 괴곤 하는 일 외에는 역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라서 지금까지 미세한 하나의 토양(土壤)과 초목(草木)까지도 모두 옛날의 은택의 산물인데, 그 동안에 헐고 긋고 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끝없이 다 무너뜨려서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마음 아픈 일로서 근일(近日)의 폐국(弊局)과 함께 예사로 보고 그만둘 수 없으니, 많은 인재들이 약간의 마음과 힘을 써야 할 곳일 듯합니다. 완성되지 못한 계란은 통명(通明)하기가 호박(琥珀)과 같고, 반 자[尺半]쯤 되는 붕어는 배의 기름이 흰 우유빛과 같은데, 이를 식단(食單)에 올려놓으면 예전의 모양과 다른 것이 없으나, 또한 의당 집어다 먹어 보면 맛이 없을 것입니다. 파상(坡像)에 대해서는, 이 그림을 이 벽(壁)에 걸게 될 줄을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호신부(護身符)로 바꾸어 간주하고 혈혈단신으로 이를 의뢰하여 의중(倚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또한 합하의 권주(眷注)가 주도하고 진지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졸렬한 내 글씨에 대해서는 이미 멀리서 요구하심을 받았으므로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이에 먼저 쓴 것을 우러러 바칩니다마는, 팔목이 아프고 기운이 빠져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대아(大雅)께 바칠 거리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시령(豕零)·계옹(鷄雍)도 또한 단사(丹砂)·자지(紫芝) 같은 선약(仙藥)의 사이에 아울러 거두어 둘 수 있는 것이니, 혹 비루하나마 받아주실 듯도 합니다. 겨울철 이후로는 혹 오는 배는 있으나 가는 배를 만나기가 극히 어려워서 인편이 절로 뜸하게 되니, 이것이 걱정스럽고 답답합니다. 이곳에는 감로수(甘露樹)가 있어 나무의 굵기는 겨우 일악(一握 한줌), 혹은 이삼악(二三握)쯤 되기도 하는데, 그 밑둥을 자르면 나무의 즙(汁)이 폭포처럼 솟아나와서 한 나무에 물을 큰 병으로 가득 하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물은 마치 유천(乳泉)과 같고 단맛은 마치 상품(上品)의 석밀(石蜜)과 같아 맑고 차가우면서도 향기가 있어, 다른 꿀의 달기가 모두 이만 못하니, 참으로 기이한 산품(産品)이라 하겠습니다. 선가(仙家)의 경장(瓊漿)·옥액(玉液)이라는 것도 아마 이보다 좋지 않을 듯합니다. 이 나무는 깊은 산에 있는데, 간혹 만날때가 있을 뿐, 많이 볼 수도 없고 이곳 사람들 또한 알지 못합니다. 연전에 마치 도인(道人) 같은 한 행각승(行脚僧)이 바다를 건너와 산에 들어가서 목이 매우 마르자, 그 나무를 자르고 물을 받아 마셨다고 하는데, 그때에 나무꾼 한 사람이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그 사실을 잘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그 나무꾼으로부터 그것을 얻기는 하였으나, 그 소문이 전파하여 이 섬의 큰 걱정거리가 될까 염려되기 때문에 또한 비밀에 붙이고 발설하지 않고 있는데, 3~4일의 일정이라면 이것을 전달할 수가 있겠으나, 온갖 계책을 헤아려 보아도 멀리 가져갈 방도가 없어 우러러 바치치 못하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일찍이 본 것을 기억하건대, 송원(宋元) 무렵 사람 ―그 이름은 잊었다.― 이 저술한 책에 남방(南方)의 초목들을 기록한 데서 '나무의 즙(汁)이 감로(甘露)와 같다.'고 한 말이 있었는데, 바로 이 나무를 가리킨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서 본 것만도 하나의 기문(奇聞)이었는데, 이렇게 기이한 맛을 입으로 직접 맛볼 줄을 어찌 헤아렸겠습니까. 합하께 이 사실을 우러러 진술하여 해외(海外)의 기이한 견문을 넓혀드리지 않을 수 없어 말씀드립니다. [주D-001]가호(歌壺) : 호쾌한 풍류를 비유한 말. 진(晉) 나라 때 왕돈(王敦)이 술이 거나하게 취할 적마다 "늙은 준마는 마구간에 엎드려 있어도 뜻이 천리 밖에 있고, 열사로 늙어도 웅장한 마음이 끊이지 않네.[老驥伏櫪 志在千里 烈士暮年 壯心不已]"라고 노래하면서 여의장(如意杖)으로 타호(唾壺)를 두드린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豪爽》 [주D-002]파상(坡像) : 호가 동파(東坡)인 송 나라 소식(蘇軾)의 초상(肖像)을 이른 듯하다. [주D-003]시령(豕零)·계옹(鷄雍) : 시령은 하찮은 약초(藥草)의 이름으로 즉 저령(猪苓)의 이명이고, 계옹도 역시 하찮은 약초의 이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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