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3] |
섣달부터 봄까지 북쪽이 소식이 일체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밑에 한 편의 정성어린 서신을 마련해 두기는 하였으나, 세후에 배가 출발할 것이라고 하니, 감히 어느 때나 합하의 서실(書室)에 들어갈지 모르겠습니다. 높은 연세는 환갑(還甲)이 다 찼고 해옥(海屋)에는 산가지를 더하여, 새로운 복이 함께 이르고 영화로운 행운이 환히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화려한 신은 길(吉)함을 드날리고 삼공(三公)의 지위는 정화(政化)를 도와서, 나라와 백성을 수역(壽閾)으로 올리고 공(功)과 덕(德)을 세우실 것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겠습니다.
옛 사람의 나라 다스림은 관대(寬大)하였는데, 후인들의 다스림은 주밀(周密)하기만 합니다. 그 다스림이 관대하기 때문에 말은 지나치게 고상하지 않고 행실은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마음은 너무 심한 일을 하려 하지 않아서 인정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후인들은 인정의 편안하게 여기는 것을 돌아보지 않고 의리(義理)로 백성들을 속박하여, 의절(義絶)로써 엄격하게 하고 금법(禁法)으로 엄중하게 하는데, 그 정정하고 당당함이야 의당 옳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들이 오래도록 따르지 못하니, 이는 그 인정에 멀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만물은 각각 제자리가 있는 것이므로, 그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억지가 되는 것이니, 풍(風)·우(雨)·상(霜)·설(雪) 같은 것도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증자(曾子)가 이르기를,
"음양(陰陽)이 각각 제자리를 얻으면 조용해지는 것이다."
하였고, 《주역》 간괘(艮卦)에 대한 정 선생(程先生)의 전(傳)에 이르기를,"온갖 사물(事物)은 각각 제자리가 있는 것이니,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긋나는 일이다."
하였으니, 옛 성인들이 천지의 도를 재성(財成)하고 천지의 마땅함을 도와서 천리(天理)에 순종하고 인명(人命)을 주관하던 것이 곧 온갖 사물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게 하는 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주밀함의 사이에서 인정의 멀고 가까움을 살피어 제자리를 얻거나 얻지 못함을 판가름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더구나 또 지난날에는 풍륜(風輪)이 세상을 끼고 마화(魔火)가 겁(劫)을 윤회하여, 콧숨이 하늘을 흔들고 입김이 태양을 저지함으로써, 모두가 맹풍괴무(盲風怪霧) 속에 몹시 두려워 벌벌 떨지 않은 자가 없던 시절도 이미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복길(福吉)이 크게 이르러 오고 천지의 화기(和氣)를 맞이하였는지라, 오늘날에 대단히 바라는 것이 있어 매양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정성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또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한 것입니다.
매양 보건대, 현세(現世)를 주재하는 자는 비유하자면 마치 화사(畫師)가 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를 만들면서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돌아보고 반복하여 두려워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대단히 가소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월(吳越)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은 마치 8월의 해조(海潮)와 같아서 한 번 거두면 바로 잔잔한 해류(海流)가 되고, 귀신이나 짐승처럼 생긴 험한 산봉우리는 마치 만점(萬點)의 촉산(蜀山)과 같되 한 번 전환하면 곧 평지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방이 등잔불로 달려가는 것은 일찍이 밝음을 찾는 게 아님이 없고, 파리가 창문에 부딪치는 것은 일찍이 나가기를 요구한 게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삼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D-001]해옥(海屋)에는……더하여 : 남의 장수(長壽)를 축하하는 말. 선인(仙人)이 거주하고 있는 해상(海上)에는 선학(仙鶴)이 해마다 산가지[籌] 하나씩을 물어 온다는 전설에서 온 말이다.
[주D-002]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 : 지옥에서 중생(衆生)들이 고통받는 모양을 그린 그림. 이는 본디 지옥의 여러 가지 모양을 눈앞에 보이듯이 그려서,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은 징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주D-002]지옥변상도(地獄變相圖) : 지옥에서 중생(衆生)들이 고통받는 모양을 그린 그림. 이는 본디 지옥의 여러 가지 모양을 눈앞에 보이듯이 그려서,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권하고 나쁜 일은 징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 완당김정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5] (0) | 2007.03.09 |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4] (0) | 2007.03.09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 (0) | 2007.03.07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1] (0) | 2007.03.07 |
석파 흥선대원군 에게 주다[與石坡 興宣大院君][4] (0) | 2007.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