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

천하한량 2007. 3. 7. 04:09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2]

지난번 인평에 균함(勻函)이 없었을 때는 등골뼈를 곧추세우고 합하(閤下)께로 향모하는 한 마음에 은연중 얻은 것이 있는 듯하였는데, 균함이 있는 지금은 허탈한 나머지 종이가 초췌하고 먹이 피로하여 입은 마치 아교처럼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멍하니 무엇을 잃어버린 것만 같습니다. 있고 없고 얻고 잃고 하는 즈음에 인정의 전도(顚倒)됨이 이러하니, 그 이른바 '끊임없이 왕래하면 벗만이 너의 생각을 따르리라.[憧憧往來 朋從爾思]'라는 것인가 봅니다.
《대역(大易)》의 왕래소장(往來消長)하는 기틀이 목전(目前)의 인사(人事)에 매우 감발(感發)시킨 것이 있어 슬피 탄식하는 뜻을 깊이 갖게 됩니다. 대체로 왕래소장하는 것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한 이치인데, 어찌 고금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의 설자(說者)들은 모두 왕래소장하는 것을 하나의 판에 박힌 문자(文字)처럼 간주하여, 예컨대 비(否)가 가면 태(泰)가 오고 태가 가면 비가 오며, 군자(君子)의 도가 자라나면 소인(小人)의 도가 소멸되고 소인의 도가 자라나면 군자의 도가 소멸되는 것이 서로 마치 교체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대역》의 방통하고 변통하는 도리가 의당 이러하지 않을 듯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를 일월한서(日月寒暑)에 끌어다 응용할 경우에는 단지 해만 오고 달은 오지 않으며, 추위만 가고 더위는 가지 않게 될 것이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끊임없는 왕래한다.'는 뜻에 밝게 게시(揭示)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말에 대해서 지금의 설자들로 말하자면 이를 마치 사의(私意)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듯한데, 그렇다면 원문(原文)의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은 없으리라.[貞吉悔亡]'라는 데에 대하여, 부자(夫子)가 일컬은 '귀착점은 같되 길은 다르며, 이룸은 하나이되 생각은 백이나 된다.[同歸而殊塗 一敎而百慮]'는 말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겠습니까?
함괘의 초륙(初六)과 육이(六二)는 도를 잃은 것[失道]이기 때문에 이 구사(九四)의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것이 항괘(恒卦)·익괘(益卦)·손괘(損卦)와 변통하여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것을 사사로운 뜻[私意]으로 본다면 그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리라.' 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상전(象傳)에 이르기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것은 광대(光大)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광대하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왕래하여 광대한 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대하지 못한 것은 곧 도를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것을 가지고 곧장 광대하지 못함의 뜻으로 삼아버린다면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은 문득 붙일 곳이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지금 두 손 모아 기축(祈祝)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합하의 '끊임없이 왕래한다.'는 데에 대한 뜻이 크고도 지극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더 항괘·익괘·손괘와 변통하는 뜻에서 깊이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다.'는 것을 이루게 된다면,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는 것이 또한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주D-001]균함(勻函) : 균(勻)은 균(鈞)과 같은 뜻으로 고관(高官) 또는 상관(上官)에게 붙이는 경칭(敬稱)이니, 균함은 즉 고관인 상대방의 서한(書翰)을 높여 이른 말이다.
[주D-002]끊임없이……[憧憧往來 朋從爾思] : 《주역(周易)》 함괘(咸卦) 구사효사(九四爻辭)에 "바르면 길하여 뉘우침이 없으니리, 끊임없이 왕래하면 벗만이 네 생각을 따르리라.[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 한 데서 온 말로, 즉 사사로운 감정(感情)을 어느 한쪽 한가지 일에만 치우치게 되면 넓고 큰 데에 다 통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주D-003]귀착점은……[同歸而殊塗 一致而百慮] :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 함괘(咸卦) 구사효사(九四爻辭)인 "貞吉悔亡 憧憧往來 朋從爾思"의 "憧憧往來 朋從爾思"에 대하여 공자가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생각하리오. 천하가 귀착점은 같되 길은 다르며, 이룸은 하나이되 생각은 백이나 되니, 천하에 어찌 생각하리오." 한 데서 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