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4]

천하한량 2007. 3. 9. 03:44
권이재 돈인 에게 주다[與權彝齋 敦仁][4]

추동(秋冬)이 교차하는 즈음에 숭체(崇體)가 백복(百福)하십니까? 몸을 돌려 북두(北斗)를 바라보니 해천(海天)이 아득하여 시야가 다하는 곳에 애간장이 끊어져서, 다만 우러러 축복이나 드릴 뿐입니다.
행실치고는 선대에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은 몸에 형구(刑具)가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하였습니다. 40일 동안에 이와 같은 참독(慘毒)을 만났으니, 고금천하에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인 만인이 모두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한 사람만이 유독 나를 불쌍히 여기시니, 그 지극한 정의가 위로 하늘에 다다라서 마치 박소(剝消)의 와중에 양강(陽剛)의 군자가 상구(上九)에 위치하여 모든 사람의 떠받듦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이렇게 대륙(大陸)을 다 지나 다시 바다를 건너와서 백번 천번 구르고 닳는 가운데서도 실낱같은 한 목숨을 비호에 의탁하여 아직껏 보존하고 있으니, 내가 어둡고 완고하기가 목석(木石)보다 심해서 오늘날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27일에 비로소 배에 올랐는데, 아침에는 바다가 꽤 잔잔하더니 낮에는 바람이 사납게 불어 배가 따라서 요동치므로,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현기증이 나서 구르고 자빠지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혼자 선두(船頭)에서 아무 탈 없이 조용하게 있었으니, 천오(天吳)·해약(海若)도 나만은 도외시해서 그랬던가 봅니다. 그래서 해가 떠서 배를 출발하여 석양에 목적지에 당도하니, 이 같은 짧은 시간에 당도할 줄은 예측하지 못했던 터라, 제주(濟州) 사람들이 모두 '북쪽 배가 날아서 건너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왕령(王靈)이 돌보신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막 대정(大靜)에 도착하여서는 한 군속의 집을 얻어 붙여 있었는데, 그런대로 울타리 밑에서나마 밥을 지어먹을 수가 있었으니, 이것도 분수에 지나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또 어떻게 지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D-001]박소(剝消)의……것 : 박소는 《주역》의 박괘(剝卦 :

)가 음(陰)이 성장(盛長)하고 양(陽)이 소락(消落)하는 상(象)이라 하여 이른 말이고, 양강의 군자란 바로 박괘의 유일한 양효(陽爻)인 상구효를 말한다.

[주D-002]천오(天吳)·해약(海若) : 모두 다 해신(海神)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