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詩渾似學參禪/ 시 배움은 흡사 參禪 배움 같거니
筆下隨人世豈傳/ 앞 사람을 흉내내면 그 누가 알아주리.
好句眼前吟不盡/ 좋은 시귀 눈 앞에서 끝없이 읊조려도
痴人猶自管窺天/ 어리석은 이들은 우물안 개구리라.
예전 佛法의 大義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臨濟는 喝로,
德山은 몽둥이로 대답하였다.
禪家의 話頭도 宋代 이후로 오면 아포리즘의 어조를 띄게 되어
靈動하는 活法으로서가 아닌 어정쩡한 흉내가 되고 만다.
自家의 體認 없는 흉내만으로는 無門의 관문도 소용이 없다.
詩의 법도 이와 같다.
눈 앞에 놓인 좋은 시귀들을 백날 읊조려 본들,
미묘한 깨달음과 만나지 못하면 종내 한소식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으면서는 그 안에 녹아 있는 生機를 느낄 일이지,
어투를 흉내 내어서는 안된다.
대롱을 통해 하늘을 보니 그 하늘이 온전히 보일 턱이 없다.
예전 사명당이 금강산 유점사로 서산대사를 찾아갔다.
"어디서 왔는고?"
"어디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
만보계를 달고 온 것도 아니니 그걸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도 대개 오늘 내가 걸은 시간이 몇 시간이니
한 시간에 몇 걸음을 걸을까.
뭐 이런 궁리를 하고 앉았다가는
喝이나 몽둥이 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다.
사명당은 즉시 벌떡 일어난다.
양 팔을 활짝 펴들고 한 바퀴 빙 돈다.
"이렇게 왔습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어느 길로 왔는고?"
"옛 길을 따라 왔습니다."
스승은 벌컥 소리 지른다.
"옛 길을 따르지 말라."
제법 근사한 대답을 했다고 득의하던 사명당이
이번엔 한방 제대로 맞았다.
이른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心法의 전수이다.
옛 사람의 길을 따르지 말라.
너는 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禪에 도달하고 詩를 깨달을 뿐이다.
남의 흉내로는 안된다.
秋史는 한 사람만으로 족하다.
秋史와 방불한 趙熙龍은 오히려 그로 인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안목 없는 세상은 자꾸만 옛 길을 따라 오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요한다.
그렇다면 좋은 시는 끊임 없는 반란의 산물이어야 한다.
친숙한 관습과의 결별,
익숙해진 접점에서 벗어나기를 쉼 없이 추구해야 한다.
曾幾가 "시를 배움은 參禪함과 같나니,
삼가하여 죽은 시귀일랑은 거들떠 보지 말라.
學詩如參禪, 愼勿參死句"라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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