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莊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숲 속에 천년 묵은 나무는 옹이가 많이 져서
재목으로 쓸 수가 없는 까닭에 나무꾼의 도끼를 피할 수 있었고,
여관 집의 거위는 잘 울지 않아 쓸모 없다 하여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 없기는 매 일반인데
하나는 그로 인해 수명을 연장하였고,
하나는 그 때문에 명을 재촉하였다.
자! 그대는 어디에 처하겠는가?
장자는 망설임 없이 그 중간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곳은 어디인가?
연암 박지원은 〈崄丸集序〉에서,
익숙한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패로디 하여 이런 이야기로 들려준다.
황희 정승이 퇴근하여 집에 오니, 딸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아버지!
이가 어디서 생겨요?
옷에서 생기죠?"
"그렇지."
그러자 딸이 좋아 하며
"내가 이겼다!"한다.
이번엔 며느리가 나서며,
"아버님! 이는 살에서 생기지요?"
"맞았다."
"봐요. 아가씨! 아버님은 내가 맞다시는걸."
옆에 있던 부인이 화를 내며 말한다.
"도대체 누가 영감더러 지혜롭다고 하는지 모르겠구려.
어떻게 둘 다 옳아요?"
정승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얘들아! 이리온.
내가 설명해 주마.
이란 놈은 살이 아니면 알을 까지 못하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을 수가 없단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이 다 옳다고 한 것이야.
그렇지만 옷을 장농 속에 두더라도 이는 있을 것이고,
벌거벗고 섰더라도 또한 가려울 테지.
땀이 무럭무럭 나서 온몸이 끈적끈적할 때 옷도 아니고 살도 아니고,
옷과 살의 그 사이에서 이는 생겨난단다."
이것과 저것의 사이,
그 중간의 텅빈 공간에서 이는 생겨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 그 중간쯤에서
타협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允執厥中,
그 중간을 잡아라.
이 이야기를 蘇東坡는 그의 〈琴詩〉에서 다시 이렇게 읊조린다.
若言琴上有琴聲/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은
放在匣中何不鳴/ 갑 속에 두었을 젠 왜 안 울리나.
若言聲在指頭上/ 그 소리 손가락 끝에 있다 하면은
何不於君指上聽/ 그대 손 끝에선 왜 안들리나.
거문고의 소리는 어디서 나는가.
거문고와 손가락의 사이에서다.
거문고에 손가락이 닿아 소리로 울리는 이 미묘한 이치를 아는가?
소리는 그렇다면 어디에 숨어 있었더란 말인가?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陶淵明 〈飮酒 5〉시의 뒤 네 구절을 보면,
山氣日夕佳/ 산 기운 저녁이라 더욱 고운데
飛鳥相與還/ 나는 새 짝을 지어 돌아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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