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이당 면호 에게 답하다[答趙怡堂 冕鎬][1] |
이당(怡堂)에 새봄의 복이 무성하십니까? 지난 설 밑에 보내주신 한 장의 서신에 대해서는 지금 벌써 해가 지났는데도 묵은 먹물을 아직껏 끊임없이 만져봅니다. 굽어 물어주신 성의는 효자(孝子)의 지극한 뜻이라, 사람으로 하여금 찬송(贊誦)하게 하고 또한 금석지감(今昔之感)을 감당치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평소에 존안을 뵐 적에는 남들의 견문(見聞)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나, 평소 우러러 감탄하는 것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능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계심을 진작부터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재능을 시행하는 결과가 어떠할 것인가에 이르러서는 또한 감히 망녕되이 집어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쇄한 절목(節目) 사이에 있어 기거(起居)하고 담소(談笑)하는 가운데 자상하고 온화한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는 기상(氣象)은 또한 동배(同輩)들이 다 같이 아는 바입니다.
보내온 뜻이 이렇게 간절하고 정중하시니, 실로 거짓 꾸며서 우러러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아마 의당 이 뜻을 헤아리실 것이니, 대단히 부끄럽고 두려움을 더욱 감당치 못할 뿐입니다. 이에 시초(詩樵)가 가는 편을 인하여 약간의 말씀을 거듭 드립니다.
종(從)은 연전 연후에 걸쳐 도무지 아무런 심회(心懷)가 없고, 70세 늙은이의 추태는 남을 대해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근래에는 또 눈의 어른거리는 증세가 크게 더쳐서 도저히 길게 쓸 수가 없어 아직 이만 줄입니다.
안영강광루(雁景江光樓)의 예서(隸書) 편액에 대해서는 압록강 동쪽에도 이런 기이한 작품이 있을 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40년 동안 여기에 힘을 썼다고 자부해 왔으나, 이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뒤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곧 좌석 한쪽에 붙여놓고 끝없이 찬송(贊誦)하는 바입니다.
대개 예서의 법은 서경(西京 전한(前漢))과 동경(東京 후한(後漢))이 서로 다른데, 서경의 글자는 구양공(歐陽公 당 나라 구양순을 이름) 때부터 볼 수가 없었고, 처음 유원보(劉原父 원보는 송 나라 유창(劉敞) 의 자)로 인하여 동용명(銅甬銘)을 보게 되었으나, 이것은 바로 전서(篆書)이고 예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서경의 예서는 오봉(五鳳 한 선제(漢宣帝)의 연호) 2년의 글자와 안족등(雁足鐙)에 음각(陰刻)한 것보다 나을 것이 없는데, 이것도 구양공 이후에 발견되었으므로 구양공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碑版 비석에 새긴 글자)에는 전혀 없고, 오직 원수경명(元壽鏡銘)과 황룡등(黃龍鐙)의 글자와 양가(陽嘉)·원강(元康) 연간 등의 쇠[金]붙이만이 모두 증명할 수 있고, 신망(新莽) 시대의 쇠붙이·돌붙이에 새겨진 것들도 8~9종(種)이 되어 오히려 서경 시대의 법도가 남아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파(波)가 없는 예서입니다.그리고 동경 시대 이후로 점차 파책(波磔)의 한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국중(局中)의 모든 석각(石刻)들은 오히려 서경 시대의 옛 법이 남아 있습니다. 동경 시대의 글자는 요즘에 통행되고 있는 공림(孔林)의 여러 비(碑)와 하남(河南)·낙양(洛陽) 등지에 있는 여러 비들로서 여기에는 모두 파(波)와 별(撇)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비록 예기비(禮器碑)·공화비(孔和碑) 같은 대단한 전아(典雅)하고 고색창연한 것이라도 또한 파가 있는 예서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예서에 파가 없는 것을 귀히 여기는 까닭은 바로 유여하여 다하지 않는 뜻을 남긴 것으로써 이것은 붓 가는대로 실하게 눌러서 끌어 빼내는 파가 있는 것만 같지 못한데, 여기에는 또 고금(古今)의 차이가 대단히 있어 마치 추로(椎輅 투박한 수레를 이름)와 상옥(象玉 상아(象牙)와 옥(玉))처럼 서로 현격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만 그 기이(奇異)한 곳에 나아가서 '이것이 옛 법이라'고들 하니, 이는 곧 자신을 속이고 남을 현혹시키는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기에 어찌 고금의 같고 다름을 논하겠습니까.
입필(入筆)의 법은 순전히 역세(逆勢)를 써야 하는데, 지금 보내온 글자를 보니 이것은 모두 순세(順勢)에 가깝습니다. 이는 반드시 공중으로부터 곧바로 갈라 들어간 다음에야 비로소 그 묘를 얻을 수 있는데, 이는 또한 갑자기 엄습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공부를 많이 한 다음에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구(結構)의 묘는 또 변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팔뚝 밑에 삼백구비(三百九碑)가 들어있지 않으면 또한 하루 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나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두 인(印)은 매우 아름다우므로 우선 잠시 여기에 두겠습니다. 홍보명(洪寶銘) 또한 아름다워서 비록 시평(始平)·무평(武平) 연간의 작품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래도 북조(北朝) 시대의 고격(古格)은 증명할 만합니다.
두문정상(杜文貞像)은 바로 남훈전본(南薰殿本)을 모취(摸取)한 것이니, 과연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필법(筆法)도 자못 범상치 않으니, 조석으로 청신한 맛을 제공할 만합니다. 그러나 권축(卷軸) 머리에 제어(題語)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의 졸렬한 솜씨로는 굳이 불두(佛頭)를 더럽힐 것이 없습니다. 마침 또 좋은 연구(聯句) 하나가 생각나서 보내 오신 종이에다 부질없이 써보았으니, 일소(一笑)에 부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파시서부시석암호서(坡詩書副是石菴好書)'라는 이 글귀는 크고 작은 몇 개의 본(本)이 있는데, 그 글귀가 완전한지의 여부나 그 구절에 대해서는 따질 것이 없습니다.
절에 가는 일에 대해서는 비록 수삼일(數三日) 사이라도 반드시 좌우(左右)와 함께 도보하려고 하였으나, 아파 누워있다 보니 궁둥이가 대단히 무거워서 바로 일어나지 못하겠습니다. 가련하고 가소롭습니다.
[주D-001]눈을……뿐이었습니다 : 남의 뛰어난 재능을 자신이 따를 수 없음을 비유한 말.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묻기를 "선생님께서 천마(天馬)가 하늘을 달리듯이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달리시면 저는 다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뒤에서 바라볼 뿐입니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田子方》
[주D-002]동용명(銅甬銘) : 이 명(銘)의 내용은 "谷口銅勇 始元(前漢昭帝年號) 四年 左馮翊造"라고 되어있다 한다.
[주D-003]안족등(雁足鐙) : 한 선제(漢宣帝) 때 궁전(宮殿)에 설치한 등잔 이름인데, 그 좌(座)에 기러기 발의 모양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4]원수경명(元壽鏡銘) : 원수경은 한 애제(漢哀帝) 원수(元壽) 연간에 주조한 거울을 말한다.
[주D-005]황룡등(黃龍鐙) : 한 선제(漢宣帝) 황룡(黃龍) 연간에 주조한 등잔을 이름.
[주D-006]양가(陽嘉)·원강(元康) : 원강은 한 선제의 연호이다. 양가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연호인데, 전한(前漢) 시대를 논하는 가운데 양가가 나온 것은 착오인 듯하다.
[주D-007]신망(新莽) : 한(漢) 나라 때 왕망(王莽)이 한때 한 나라를 찬탈하여 신국(新國)을 세웠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8]파(波) : 서법(書法)의 한 가지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그어내리는 파임을 이름. 아래 나오는 파책(波磔)도 같은 것이다.
[주D-009]공림(孔林)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공자(孔子)의 묘소가 있는 곳을 이름.
[주D-010]별(撇) : 서법의 한 가지로,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리삐침을 이름.
[주D-011]삼백구비(三百九碑) : 송(宋) 나라 때 누기(婁機)가 찬(撰)한 《한례자원(漢隷字源)》에 들어있는 한위(漢魏) 시대 비문(碑文)의 예자(隷字)를 이름. 이 《한례자원》에는 비목(碑目) 제일(第一)의 맹욱수요묘비(孟郁脩堯廟碑)에서부터 제삼백구(第三百九)의 주천제명(酒泉題名)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문의 예자들을 모두 운(韻)으로 분류해서 수록(收錄)하였다.
[주D-012]시평(始平)·무평(武平) : 시평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유연 타한가한(柔然佗汗可汗)의 연호이고, 무평은 북제 후주(北齊後主)의 연호이다.
[주D-013]두문정상(杜文貞像) : 두문정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4]남훈전본(南薰殿本) : 남훈전에 소장된 화본(畵本). 남훈전은 당(唐) 나라 때의 궁전 이름이다.
[주D-015]불두(佛頭)를……것 : '부처의 이마에 똥칠한다.[佛頭著糞]'는 데서 온 말로 좋은 서물(書物)의 첫머리에 변변치 못한 서문(序文)이나 평어(評語) 따위를 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2]동용명(銅甬銘) : 이 명(銘)의 내용은 "谷口銅勇 始元(前漢昭帝年號) 四年 左馮翊造"라고 되어있다 한다.
[주D-003]안족등(雁足鐙) : 한 선제(漢宣帝) 때 궁전(宮殿)에 설치한 등잔 이름인데, 그 좌(座)에 기러기 발의 모양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4]원수경명(元壽鏡銘) : 원수경은 한 애제(漢哀帝) 원수(元壽) 연간에 주조한 거울을 말한다.
[주D-005]황룡등(黃龍鐙) : 한 선제(漢宣帝) 황룡(黃龍) 연간에 주조한 등잔을 이름.
[주D-006]양가(陽嘉)·원강(元康) : 원강은 한 선제의 연호이다. 양가는 후한 순제(後漢順帝)의 연호인데, 전한(前漢) 시대를 논하는 가운데 양가가 나온 것은 착오인 듯하다.
[주D-007]신망(新莽) : 한(漢) 나라 때 왕망(王莽)이 한때 한 나라를 찬탈하여 신국(新國)을 세웠으므로 이렇게 일컫는다.
[주D-008]파(波) : 서법(書法)의 한 가지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그어내리는 파임을 이름. 아래 나오는 파책(波磔)도 같은 것이다.
[주D-009]공림(孔林)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의 공자(孔子)의 묘소가 있는 곳을 이름.
[주D-010]별(撇) : 서법의 한 가지로, 왼쪽으로 비스듬히 내리삐침을 이름.
[주D-011]삼백구비(三百九碑) : 송(宋) 나라 때 누기(婁機)가 찬(撰)한 《한례자원(漢隷字源)》에 들어있는 한위(漢魏) 시대 비문(碑文)의 예자(隷字)를 이름. 이 《한례자원》에는 비목(碑目) 제일(第一)의 맹욱수요묘비(孟郁脩堯廟碑)에서부터 제삼백구(第三百九)의 주천제명(酒泉題名)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비문의 예자들을 모두 운(韻)으로 분류해서 수록(收錄)하였다.
[주D-012]시평(始平)·무평(武平) : 시평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유연 타한가한(柔然佗汗可汗)의 연호이고, 무평은 북제 후주(北齊後主)의 연호이다.
[주D-013]두문정상(杜文貞像) : 두문정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다.
[주D-014]남훈전본(南薰殿本) : 남훈전에 소장된 화본(畵本). 남훈전은 당(唐) 나라 때의 궁전 이름이다.
[주D-015]불두(佛頭)를……것 : '부처의 이마에 똥칠한다.[佛頭著糞]'는 데서 온 말로 좋은 서물(書物)의 첫머리에 변변치 못한 서문(序文)이나 평어(評語) 따위를 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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