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사중 명희 에게 주다[與舍仲 命喜][4]

천하한량 2007. 3. 7. 00:50
사중 명희 에게 주다[與舍仲 命喜][4]

여름 가을 이후로 일전에 이르기까지 아전 김종주(金種周) 편에 부친 편지를 모두 받아보았는가? 서울의 서신도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는데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사중의 서신은 차례(車隷 성이 차씨인 하인을 이름)의 편에 받아본 것 이후로는 다시 받아보지 못하니, 처음에는 우울했다가 끝에 가서는 조바심이 발작하는 것을 실로 소화시킬 수가 없네.
가을도 이미 저물어가서 어느덧 또 유국(萸菊)의 계절이 이르니, 온갖 감회가 밀려들어 다만 애가 끊어지려고 하는 것은 자못 또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로세. 혹 그 동안에 서신을 왕래할 인편에 차질이 있었던 것인가? 지금에 와서는 풀리지 않는 의심덩이가 전하여 뱃속의 멍우리가 되려고 하네.
이어서 묻건대 온 집안은 또 어떠한가? 그리고 사중의 제절은 요즘에 다시 손상됨이 없이 효험을 쾌히 얻어서 기거동작하는 데에 더욱 편리하며 약 쓰는 일도 여전히 폐하지 않고 있는가? 사계의 설리(泄痢)는 그동안에 조금 우선해졌을 듯하나 아직껏 쾌차하다는 소식을 받지 못했으니, 멀리서 애태우는 심정이 의당 어떻겠는가. 경향의 크고 작은 제반 상황 또한 모두 무량한가? 얼굴마다 아련히 생각에 떠올라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네.
나의 근황은 한결같이 지난번에 보낸 편지의 내용과 같네. 전번에 말한 설창(舌瘡)과 비식(鼻瘜)의 증상은 끝내 감소되지 않았는데, 흐린 눈 또한 코 병으로 인하여 연해서 아프다가 시력(視力)이 갑자기 또 크게 손상되었으니, 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고초(苦楚)를 당하는지 모르겠네. 아랫것들은 아직 모두 별고 없으니 이는 다행한 일이네.
강릉(江陵) 경포(鏡浦)의 배[般] 편에 마침 뱃사람 양봉신(梁鳳信)이란 자가 있어 그가 가끔 내 처소를 출입하여 친숙해졌는데, 그가 이 서신을 가지고 몸소 가고자 하네. 만일 부칠 물건이라도 있으면 그가 또한 잘 보호해서 가져오겠다고 하니, 그의 뜻이 참으로 감동될 만하고 곤경에 빠진 나에게는 진정 있기 드문 일이네. 부디 각별히 환대해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만일 부치는 물건이 있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반드시 착오 없이 잘 전할 것이니,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좋겠네. 그리고 전주(全州) 김생(金生)한테 부탁한 것 또한 이 사람의 방편을 따를 뿐이네. 나머지는 이 사람 편에 다 말할 것이 아니고, 의당 본가의 하인이 올 때가 있을 듯하니, 모두 그냥 두고 말하지 않네.
심의(深衣)에 관하여 종이로 재단한 양본(樣本)을 보여준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세밀히 살펴본 결과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괴이할 것은 없겠네. 그 가장 의문난 곳이 바로 내금(內襟 속깃)의 아래를 기울[彌縫] 수 없게 된 데에 있었네. 이것에 대해서는 지난날에 내 또한 꽤나 의문시하여 다시 더 반복해서 깊이 연구해본 결과 대단히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네.
심의의 제도는 하상(下裳)을 상의(上衣)에 연접시키는 것이네. 그러나 의(衣)는 절로 의이고 상(裳)은 절로 상이므로, 상을 의에 연접시키되 상의 상한선은 바로 그 그칠 곳에 나아가 그치게 할 뿐이니, 그래서 상은 의에 더 올라가려 하지 않는 것이고, 의는 또 상에게서 더 올라오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 만든 옷섶이 서로 겹쳐 가리게 된 것을 가지고 보면 마치 모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듯하고, 제도가 완비되지도 못한 듯하나, 의는 절로 의이고 상은 절로 상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서로 침해하는 것이 없게 되었네. 그러니 내금을 기울 수 없게 된 것은 바로 세속에서 만든 심의의 견문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된 것임을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네.
의(衣)의 통이 너무 넓다는 것은 과연 보여준 말과 같네. 이것은 오로지 척양(尺樣)의 길고 짧은 데에 달린 것인데, 한척(漢尺)도 너무 넓어질 염려가 있네. 그런데 곡부(曲阜) 안씨(顔氏) 집의 주척(周尺)과 우리 집에 있는 주척은 서로 호리의 차이도 없으니, 매우 의거할 만하네. 이 주척이 한척보다 짧아서 약간 그 넓이를 줄일 수 있으니, 부디 이 주척을 사용하여 옷을 짓는 것이 어떻겠는가? ―모름지기 다시 안씨(顔氏)의 척도본(尺圖本)에 의거하여 자[尺] 하나를 정밀하게 만들어도 좋을 것이네. ○ 죽척(竹尺) 하나는 정유효(鄭惟孝)가 빌려갔으니, 화포동척(貨布銅尺)까지 그 집에서 찾아오는 것이 어떻겠는가? 죽척도 우리 집에서 간직해온 구물(舊物)이라네.―
곡겹(曲袷)가례본(家禮本)이 이와 같이 되었는데, 강씨(江氏)도 옛것을 그대로 따르고 다른 말이 없었으니, 모름지기 일체 강씨의 도표(圖表)에 의거해서 재단하는 것이 타당하겠네. 요즘에 보니, 방심 곡령(方心曲領)의 제도를 별도로 만든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도무지 근거한 데가 없는 것이므로, 설령 옛 제도와 부합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감히 내맘대로 취할 수가 없었네.
그리고 정폭(正幅)과 사폭(斜幅)을 합해서 12폭을 이룬다는 것에 이르러서도 혹 의심을 일으킬 수가 있겠네. 그러나 정폭의 제도는 강씨의 설을 폐할 수 없네. 사폭에 대해서는 정현(鄭玄)의 주석에서,
"임(衽)은 상폭(裳幅)을 서로 분리시킨 곳을 이른다."
한 말로 본다면 임(衽) 또한 상폭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고, 합해서 12폭을 이룬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네.
또 《논어(論語)》의,
"유상(帷裳)이 아니면 반드시 줄여 깁는다."
한 글로 본다면 그 줄여 기운 폭 또한 상(裳)으로 통칭하는 것이네. 그런데 사폭으로 재단하여 12폭으로 만드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겠으나, 정폭과 사폭을 합해서 12폭으로 만든다는 것만이 유독 타당치 못하니, 이는 또한 그렇지 않은 듯하네. 다만 조복(朝服)과 상복(喪服)으로 본다면 임(衽)과 상(裳)이 각각 다르고, 심의(深衣) 또한 상과 임을 각각 다르게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폭수(幅數)는 12폭 이외로 더 많이 재정(裁定)할 수는 없는 것이네.

중씨가 질문한 것을 첨부하다[附仲氏問]
이달에 들어선 이후로 심의(深衣)를 즉시 만들어보려고 시골집에 있는 베를 요즘에 올려 보내게 하고서, 재단할 때를 당하여 먼저 작은 종이로 하나의 양식(樣式)을 만들어 가지고 보니, 의심나는 곳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에 원서(原書) 및 종이로 재단한 견본을 가지고 우러러 질문 드리오니, 바라건대, 반드시 자상하게 보시고 다시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서(前書)에도 정폭(正幅) 가운데서 폭을 나누어 12의 숫자에 주합(湊合)시킨다고 되어 있으니, 이것이 자못 타당치 못한 듯합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가장 문제되는 것이 우금(右襟) 밑에는 상폭(裳幅)을 연철(延綴)시키지 않은 것인데, 그렇다면 원도(原圖)에 이른바, '우금의 하반이 안쪽의 아래로 가리워진다.[右襟下半掩於內之下]'는 것은 장차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도본(圖本)을 가지고 보면 지적할 것이 없는데, 종이로 재단을 해보려고 하니 의제(衣制)를 이루지 못합니다. 혹 제가 재단을 잘못한 때문인지, 아니면 별도의 양식으로 변통하는 방도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의심스러운 것의 한 가지입니다.
그리고 의제(衣制)의 귀중함은 깊숙함에 있는 것이니, 깊숙하게 하자면 약간 크고 넓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상의(上衣)의 넓이는 오로지 이척포(二尺布)의 양폭(兩幅)에 의거해서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가례본(家禮本)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데, 가례본의 심의는 금(襟)을 마주하여 서로 가리우게 하고 있으니, 이는 비록 억측으로 판단한 데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옷의 넓이는 오히려 거두어 감싸들이는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견본에 이르러서는 좌금(左襟)과 우금(右襟)이 이미 교령(交領)이 되어서 비스듬히 길게 내려온 좌금이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까지 이르니, 비록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난 뒤에도 거두어 감싸들이는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깊숙하고 크고 넓은 것이 약간 너무 지나친 데에 관계되어 사람의 몸과 옷의 규모가 너무나 서로 맞지 않으니, 이것이 의심스러운 것의 두 가지입니다.
원도(原圖)의 곡겹(曲袷)은 일체 가례본(家禮本)과 같고, 그 방령(方領)을 논한 곳 또한 주자(朱子)의 설(說)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도본을 가지고 보면 절로 구(矩)와 같은 모난 형상이 있는데, 지금 종이로 재단하여 만들어본 결과에는 형세가 도본과 같이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속에서 만든 심의의 영연(領緣)을 일러 비록 가례본에 의거하여 능히 도본대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하나, 구(矩)와 같이 모난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그 의심스러운 것의 세 가지입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강씨(江氏) 또한 일찍이 일건(一件)의 심의도 손수 재단하여 만들어보지는 못하였고 다만 종이 위에다 그림만 작성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의거해서 하자면 누구나 허다한 난관이 없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보건대, 장 편수(張編修)의 《의례도(儀禮圖)》에도 심의도(深衣圖)가 있어 이것과 서로 비슷했으나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의례도》는 지금 시골집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상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원(戴東原)이 논한 것은 일체 이 도본과 같습니다. 이러고저러고를 막론하고 이미 이렇게 허다한 의심의 단서와 허다한 난관이 있으므로 우러러 여쭈어서 익히 헤아려 다시 가르쳐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비록 윤삭(閏朔)은 따지지 않더라도 또한 재단하여 만드는 데에 무슨 방해됨이 있겠습니까.
또한 본(本)을 종이로 재단한 것을 우러러 질문 드리오니, 삼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정폭(正幅)과 사폭(斜幅) 각각 여섯씩을 합해서 12폭으로 만들고 좌금·유금의 밑은 모두 상폭(裳幅)을 꿰매어 서로 가리도록 해서 마치 지금의 도포(道袍)나 철릭(綴翼)의 모양과 같이 한다면 옷의 품이 너무 넓어질 혐의가 없고 우금의 아래쪽도 처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겹(曲袷)은 지금 세속에서 만드는 심의의 모양과 같이 하고서 이를 구(矩)의 법칙과 같이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속임 구변(續衽鉤邊)은 또한 강씨의 설에 의거하여 이 제본(製本)에 시행하는 것이 삼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속임구변과 임당방(衽當旁)을 논한 곳은 강씨의 설이 제가(諸家)들에 비하여 특히 장점이 있으나, 그 나머지는 아마도 십분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만 원서(原書)와 원도(原圖) 및 여기에 바친 종이로 만든 본(本)에 나아가서 깊이 헤아리시어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의의 제도에 대해서 제가 무슨 아는 것이 있으리오마는, 그러나 강씨의 설만을 취하는 것은 그 임당방(衽當旁)과 속임(續衽)을 서로 고증하여 해석해 놓은 것이 다른 설들에 비해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구변(鉤邊) 일폭(一幅)의 해석도 이른바 '덮어 깁는다.[覆縫]'는 말보다 더 나아서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의 봉호)의 설과 서로 부합될 뿐만 아니라, 《가례(家禮)》의 정문(正文) 또한 온공의 설을 따랐고 보면 이는 또 주자(朱子)의 설과도 부합되는 것인데, 다만 《가례》의 도본(圖本)과는 서로 어긋납니다.
이른바 '속임구변'이란 한 조항은 가장 천고 이래로 쟁론(爭論)을 벌여오던 것인데, 이 한 조항은 이미 옳은 해석을 얻었으니, 이는 제가(諸家)보다 근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만 앞뒤의 정폭(正幅)을 나누어 8폭(幅)으로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억지로 주합(湊合)시킨 것이 있는 듯하여 의심이 없을 수 없고, 내금(內襟) 아래에 처리한 것이 아무 데도 없는 것과 옷의 품이 너무 큰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종이로 재단한 본을 가지고 본다면 이 두 가지는 더욱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므로, 지난번에 우러러 질문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르쳐 주심을 받았으나, 어리석은 소견에는 아직도 석연치 못합니다. 상(裳)은 절로 상이고 의(衣)는 절로 의임은 과연 가르쳐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서로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넓고 좁고 넉넉하고 모자람을 진실로 굳이 서로 맞추려고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의를 하상에 연결시킴으로써 의와 상이 서로 어울려서 이 일의(一衣)의 제작을 이루게 되는데, 내금(內襟)의 우변(右邊)은 의에만 있고 상에는 없다면 좌우의 제작이 서로 달라서 절름발이처럼 한쪽으로 치우치게 될 것이니, 옛날에 옷을 만드는 데 있어 과연 꼭 이와 같이 너무나도 걸맞지 않게 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옷의 품이 너무 큰 데에 있어서는 가르쳐 주신 말씀에 따라 고척(古尺)을 사용한 결과 조금은 차이가 있는 듯하나, 고척과 건초척(建初尺)이 그 실상은 서로의 차이가 일촌(一村)도 다 안 되니, 다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상임(裳衽)의 사폭(斜幅)에 대해서는 강씨의 설이 적확하므로, 저 역시 정폭과 사폭이 합해서 12폭을 이루는 것을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4정폭을 나누어 8정폭으로 만든다는 것을 주합(湊合)시키는 데에 가깝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기》 심의(深衣)의,
"12폭을 제정해서 12월에 응하게 한다.[制十有二幅 以應十有二月]"
한 아래 정현(鄭玄)의 주석에서 이른바,
"상(裳) 6폭을 폭마다 나누어 위아래의 줄여 깁는 뒷받침으로 삼는다."
고 한 것은 바로 상폭(裳幅)을 통괄하여 말한 것인 듯한데, 이것이 《논어》의,
"유상(帷裳)이 아니면 반드시 줄여 깁는다."
는 글과 또한 서로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씨는 말하기를,
"위아래로 줄여 깁는 것은 오로지 양쪽 곁에 닿는[當旁] 옷섶에 있는 것이고, 12폭을 모두 줄여 깁는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혹 자기의 설을 견강부회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6폭을 나누어 12폭으로 만드는 것은 그 너른 끝[寬頭]은 아래로 향하고 좁은 끝[狹頭]은 위로 향하기 때문에 이렇게 재할(裁割)하는 한 가지 절차가 더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인 만큼, 6폭을 재단하여 12폭으로 만든다는 것은 오히려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씨의 제도로 말하자면 그 재할하기 이전의 4폭인 때에도 정폭(正幅)이라 하고 이미 재할하여 8폭이 된 때에도 또한 정폭이라고 했으니, 그 정폭이라는 것이 재할하기 이전이나 이미 재할한 뒤나 똑같이 정폭이라면 왜 꼭 본디부터 완전하게 갖추어진 4정폭을 놓아두고서 이미 재할하고 또 연결시키곤 하여 이토록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서 이 8정폭을 만듦으로써 절로 애써 주합(湊合)시키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현행하는 심의는 양금(兩襟)의 바로 아래 교령(交領)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속임구변(續衽鉤邊)을 취택한 바가 없어 의제(衣制)를 크게 상실하였는데, 지금 이것은 내금(內襟)이 의(衣)에만 있고 상(裳)에는 없으며, 정폭을 억지로 나누어 8폭으로 만들었으니, 이것 또한 잘된 제도가 아닙니다. 이것이 혹 저 역시 세속의 견문에 막혀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가르쳐 주신 것이 있으니 의당 먼저 그 말씀대로 재단하여 만들도록 하고서 조만간에 집으로 돌아오시면 그때에 다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세속에서는 혹 상복(喪服)의 상(裳)을 만드는 데 있어 앞은 3폭, 뒤는 4폭으로 하는데, 뒤 또한 3폭을 쓰되 그 중 1폭을 나누어 2폭으로 만들어서 이를 다시 연결시켜 4폭의 숫자에 응하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4정폭을 나누어서 8정폭으로 만든다는 것 또한 혹 여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D-001]유국(萸菊)의 계절 : 중국의 고대 풍속에 음력 9월 9일이면 높은 산에 올라가 수유(茱萸)의 열매를 따고 국화주(菊花酒)를 마시어 사기(邪氣)를 물리쳤던 고사에서 온 말인데, 자세한 것은 위의 주 43)에 나타나 있다.
[주D-002]심의(深衣) : 옛날 귀인(貴人)들이 입는 제복(制服)의 한 가지인데, 이것은 특히 윗 도리와 아랫도리가 서로 연결되었다.《禮記 深衣》
[주D-003]곡겹(曲袷) : 굽어서 방형(方形)의 모양으로 된 옷깃을 말함.《禮記 深衣》
[주D-004]가례본(家禮本) : 주희(朱熹)의 저서인《가례(家禮)》의 심의조(深衣條)에 나오는 심의(深衣)의 도본(圖本)을 이른 말이다.
[주D-005]강씨(江氏) : 청(淸) 나라 때의 유학자(儒學者)로 대진(戴震)과 병칭(竝稱)되었던 강영(江永)을 말함. 강영은 특히 삼례(三禮)에 정통하였고, 예기훈의택언(禮記訓義擇言》·《심의고오(深衣考誤)》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D-006]장 편수(張編修) : 청(淸) 나라 때의 학자로서 일찍이 편수관(編修官)을 지냈고 《의례도(儀禮圖)》등 수많은 저서를 남긴 장혜언(張惠言)을 말한다.
[주D-007]대동원(戴東原) : 청 나라 때의 학자인 대진(戴震)을 이름. 동원은 그의 자이다.
[주D-008]윤삭(閏朔)은……않더라도 : 윤삭은 곧 윤월(閏月)을 이름. 《예기(禮記)》 심의(深衣)에 의하면 "상(裳)을 12폭으로 만들어서 12월을 상징한다." 하였는데, 청 나라 때 강영(江永)이 그의 저서인 《심의고오(深衣考誤)》에서 "상을 12폭으로 한 것은 12월을 상징한 것인데, 그 밖에 또 구변(鉤邊)이 있으니, 이것은 윤월을 상징한 것인가 보다." 한 것을 두고 이른 말인 듯하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구변이란 바로 상(裳)의 오른쪽 가에다 별도로 베 한 폭을 사용하여 이를 재단해서 오른쪽 뒤편 깃[衽]의 위에 꿰매어 앞으로 끌어당기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深衣考誤》
[주D-009]속임 구변(續衽鉤邊) : 정현(鄭玄)의 주석에 의하면, 속임은 상방(裳旁)에 있는 옷섶[衽]을 서로 연결시켜서 상(裳)의 앞과 뒤가 서로 분리되지 않게 하는 것을 이른다고 하였고, 구변은 역시 정현의 주설(注說)에 따른 강영(江永)의 해설이 위의 주 57)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深衣考誤》
[주D-010]임당방(衽當旁) : 옷섶을 좌우의 상방(裳旁)에 닿게 하는 것을 이름. 《禮記 王藻》 내용의 자세한 것은 강영(江永)의 《심의고오》에 나타나 있다.
[주D-011]구변(鉤邊)……해석 : 이 또한 강영(江永)이 속임 구변(續衽鉤邊)의 구변을 해석하면서 "상(裳)의 오른쪽 곁에다 별도로 베 한 폭을 사용한다."고 한 것을 이른 말로, 위의 주 57)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深衣考誤》
[주D-012]건초척(建初尺) : 후한 장제(後漢章帝) 건초(建初) 연간에 통용되었던 동척(銅尺)을 이르는데, 김정희가 일찍이 옹성원(翁星源)으로부터 기증받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