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李穀)의 비문에,
“성스러운 천자가 즉위한 7년에 황후 기씨(奇氏)가 원비(元妃)로서 황자(皇子)를 낳았다. 이윽고 황후가 되어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하게 되자, 내시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전생의 인연으로 황제의 은혜를 입음이 이에 이르렀다. 이제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수명을 하늘에 빌고자 한다. 부처의 힘을 의탁하지 않으면 어찌 하리요.’ 하고, 모든 복리(福利)라는 것을 거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금강산 장안사가 가장 뛰어나게 좋다는 소문을 듣고, ‘복을 빌어 성상께 보답하는 데에는 이만한 곳은 없겠다.’ 하고, 지정(至正) 3년에 내탕(內帑)의 저폐(楮幣) 1천 정(錠)을 내어 절을 중수하는 자금으로 쓰게 하여, 영구히 중의 공양에 사용하게 하였다. 다음해에 또 이와 같이 하고, 또 다음해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중 5백 명을 모아서 옷과 발우를 주고 법회(法會)를 열어 낙성식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궁관(宮官) 자정원사(資政院使) 신 용봉(龍鳳)에게 명하여 전말을 돌에 새겨서 후세에 전하라 하고 드디어 신 이곡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금강산은 고려의 동쪽에 있어서 서울과의 거리는 5백 리이다. 이 산의 뛰어남은 천하에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실로 불경에도 실려 있다. 《화엄경(華嚴經)》에 말하기를, ‘동북쪽의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으니, 담무갈보살이 1만 2천 명의 보살들과 항상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설법하는 곳이다.’ 하였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선(神仙)의 산이라 지칭(指稱)하였다. 이에 신라 때부터 탑과 절을 증축(增築)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사찰이 벼랑과 골짜기에 가득하다. 그중에 장안사가 그 산기슭에 있어서 온 산의 도회처(都會處)가 된다. 이것은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에 처음으로 세웠으며, 고려 성왕(成王) 때에 중수한 것이다. 아, 법흥왕 때에서 4백여 년 뒤에 성왕이 중수하였는데, 성왕으로부터 지금까지가 또한 거의 4백 년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 중수할 자가 없었다. 비구(比丘) 굉변(宏卞)이 그 쇠락함을 보고 동지들과 더불어 이른바 담무갈보살에게 맹세하기를, ‘이 절을 새롭게 하지 못한다면 이 산을 두고 맹세할 것입니다.’ 하고, 즉시 그 일을 나누어 맡아서 널리 많은 사람을 모집하여 산에 가서 재목을 채취하며, 사람들에게서 식량을 모으고, 임금을 주고 인부를 고용하여 돌을 다듬고 기와를 구워서 먼저 불당을 새롭게 하였으며, 빈관(賓館)과 승방(僧房)도 차례로 대강 완성하였다. 그런데 비용이 여전히 부족하므로 또 탄식하기를, ‘석가세존께서 기원(祇園)을 만드실 때에는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가 금을 땅에 폈으니, 지금이라고 어찌 그러할 사람이 없겠는가. 다만 만나지 못함이다.’ 하고, 드디어 서쪽으로 중국의 서울로 유세(游說)를 떠났다. 일이 중국의 중궁(中宮)에 알려지고, 또 고자정(高資政)이 주장하며 힘을 썼다. 그런 까닭에 그 성취가 이와 같이 된 것이다. 그윽이 생각건대, 불교가 때를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쇠미하기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세조 황제가 이것을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대의 황제도 서로 이어 받들어 빛나고 크게 하였다. 지금 황제께서 선왕의 뜻과 일을 계승하여 더욱 유의하시었다. 대체로 성인(聖人)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과 부처의 살생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동일한 인애(仁愛)이며, 동일한 자비인 것이니, 중궁의 보고 느낀 것이 까닭이 있다. 또 옛날 덕을 천하에 베푼 자로는 오제(五帝)와 삼왕(三王)만한 이가 없고, 가르침을 후세에 전한 자로 공자만한 이가 없으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제삼왕(五帝三王)으로서 사당에서 향사를 받는 이는 거의 드물고, 공자는 비록 사당이 있다고는 하나, 예제(禮制)에 제한되어 제물을 바치는 것에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어서 그 무리가 먹는 것이 겨우 충당될 뿐이다. 오직 부처만은 그를 위한 궁전이 오랑캐의 나라에서나 중국에서나 바둑돌처럼 퍼져 있고 별처럼 벌여 있어서, 불전과 섬돌의 장엄함과 단청의 장식이 천자의 거처에 비교할 만하며, 향불과 옷과 음식의 봉공(奉供)은 봉읍(封邑)에서의 수입과 비교할 만하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실로 깊고도 넓기 때문이니, 이 절이 흥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든 집을 칸수로써 계산하면 1백 20칸이 넘는다. 불전(佛殿)ㆍ경장(經藏)ㆍ종루(鐘樓)와 삼문(三門)ㆍ승료(僧寮)ㆍ객실에서부터 주방과 욕실의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구조의 장대하고 아름다움을 지극히 하였다. 불상(佛像)으로는 비로자나(毗盧遮那)가 있고, 좌우에는 노사나(盧舍那)가 있고, 석가모니 불상은 높게 중앙에 자리잡았다. 1만 5천의 부처가 두루 둘러 옹위하여 정전(正殿)에 있고, 관음대사(觀音大士)ㆍ천수(千手)ㆍ천안(天眼)과 문수(文殊)ㆍ보현(普賢)ㆍ미륵(彌勒)ㆍ지장(地藏) 등은 선실(禪室)에 있다. 아미타(阿彌陀)ㆍ오십삼불(五十三佛)ㆍ법기보살(法起菩薩)은 노사나(盧舍那)를 옹위하여 해장궁(海藏宮)에 있는데 모두 지극히 장엄하게 꾸몄다. 장경(藏經)은 모두 사부(四部)인데 그중 은으로 쓴 한 가지는 바로 황후가 하사한 것이다. 《화엄경》 세 책과 《법화경(法華經)》 8권은 모두 금자(金字)로 써서 또한 지극히 아름답게 꾸몄다. 옛날부터 소유하고 있던 토지는 국법에 의거하여 결(結)로써 계산하면 1천 50결이나 된다. 함열(咸悅)ㆍ인의현(仁義縣)에 있는 것이 각각 2백 결, 부령(扶寧)ㆍ행주(幸州)ㆍ백주(白州)에 각각 1백 50결, 평주(平州)ㆍ안산(安山)에 각각 1백 결씩이 있으니, 곧 성왕(成王)이 희사한 것이다. 염분(鹽盆)은 통주(通州) 임도현(林道縣)에 있는 것이 1개소, 경저(京邸)에 있는 것으로는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것이 1구(區), 시장의 점포로써 남에게 세준 것이 30칸이다. 모든 돈과 곡식과 집기의 수량은 맡은 자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쓰지 않는다. 태정(泰定) 연간으로부터 이 절을 중수한 시주는 중정사(中政使) 이홀독첩목아(李忽篤帖木兒) 등 제씨로 그 성명을 비석의 뒤쪽에 열기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산이 뼈를 드러내니 뾰족하고 날카로우며, 높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름이 금강이라네. 불경에 나타나는 바이며, 보살이 머물던 곳으로 청량산(淸?山)의 다음이라네. 연기와 구름을 불어 내뿜으니, 천지의 기운이 서려서 신령스런 광채를 내네. 새와 짐승도 길이 들고, 벌레와 뱀도 어질고, 풀과 나무도 향기나네. 승려의 높은 암자 공중에 가로질러 바위에 걸쳐 있어서 멀리 서로 바라보이네. 장안정사(長安精舍)는 산 아래에 있는 큰 도량이네. 일찍이 신라 때에 창건하여 여러 번 만들고 무너져서 항상 일정하지 않았다네. 하늘이 성신(聖神)을 내시어 세조의 손자가 만방(萬方)에 군림하셨네.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데에 흡족하여 모든 영성(靈性)을 품은 자를 포근히 적셔 주는 부처를 사모하시네. 아, 현명하신 황후는 땅의 후덕함을 본받아 황제의 강함을 받드시네. 불교에 귀의하여 신묘한 복을 취하여 우리 황제를 봉축(奉祝)하네. 오직 이 복된 땅은 신선과 부처가 깊숙이 숨어 있던 곳으로 어지러이 상서(祥瑞)를 낳았다네. 천자께 경사 있음이여, 하늘이 그 명(命)을 거듭하니 수를 누림이 끝이 없겠네. 황태자가 탄생함이여, 길이 큰 기반을 굳혀 하늘과 더불어 장구하겠네. 황후가 내신(內臣)에게 이르기를, 「저 법신(法身)의 교화가 드러나 이미 그 궁전을 새롭게 하였으니, 마땅히 그 공을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라.」 하셨네. 저 산의 언덕 위에 높다란 비석이 있어 명문(銘文)을 새기었네.’ 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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