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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전(表箋) 왕대비 진정표(王大妃陳情表)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2. 14. 18:53

표전(表箋)
 
 
왕대비 진정표(王大妃陳情表)

 

 


 이색(李穡)

아룁니다. 첩(妾)은 그윽이 듣자오니 예로부터 제왕이 임어(臨御)하면, 바다 안팎에 있는 만국 백성들은 모두 신하와 첩이 된다고 합니다. 사내는 신하가 되고 계집은 첩이 되매, 그 종류는 비록 다르지만 그 성질은 같으며, 그 형세는 비록 소원하지만 그 정은 친한 까닭으로 말하기를,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자기 임무를 다할 바를 얻지 못하면, 임금이 그 공을 이룩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첩은 사세가 급박하여 하늘밖에 부를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곧 하늘과 같으시어, 듣고 보시는 것도 우리 백성으로 하시므로, 하늘이 말씀하지 않는 것을 폐하께서 대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때문에 첩이 천위(天威)를 저촉하면서 소회를 남김없이 아뢰는 것입니다.
첩이 태어나서 16세에 선신(先臣) 왕모(王某)를 섬겨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모(某), 차자는 모였고, 모의 아들로 모모가 차례로 위(位)를 승습(承襲)하였으나, 일찍 죽어 아들도 없고 모가 최후로 들어서서 첩을 섬겨 효도가 극진함은 온 국민이 다 아는 바이며, 천지도 실상 굽어보는 바입니다. 폐하께서 즉위하시게 되매, 모는 능히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즐겁게 내부(內附)하였으니, 폐하께서도 역시 그 충성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가 불행히 단명하여 갑자기 죽은 것이 의심을 사게 되고, 전하는 말이 진실성을 잃어 천총(天聰)에 들렸으니, 폐하께서 노하심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남의 의심을 사게 된 것이고, 다른 까닭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사신을 죽인 역적 김의(金義)는 도망가던 도중에서 모(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곧 간사한 계교를 내어 심왕(藩王)을 세워 임금으로 삼을 양으로, 호지(胡地)로 도망해 들어가서 지금까지 감히 본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본국이 간여하지 않는 것도 또한 분명할 것입니다. 첩은 또 들으니,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하는 것은 성인의 큰 정사이다.” 하는데, 하물며 나라가 멸망하지는 않았고, 대가 끊어지지도 않은 것이 아닙니까. 지금 모가 모의 유고(遺孤) 모로써 국사를 임시 처결하게 하고, 표를 올려 시호를 내려주실 것과 작위를 승습하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한 것이 이미 해가 지났기로, 첩은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늙고 젊음을 막론하고 밤낮으로 우러러 바라며, 덕음(德音)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도 내려주지 아니하십니다. 폐하께서는 천지와 같은데, 천지 사이에 만물은 무럭무럭 발육되어 각기 그 본성을 발휘하는데, 유독 소국은 왕화(王化)에 젖지 못하니, 첩은 실로 통탄해 마지 않습니다.
또 소국의 해안(海岸)이 왜국과 인접하여 날로 더불어 적대시하고 있기 때문에, 집정자(執政者)들이 다 장수(將帥)가 되어 밖으로 가고, 안에 남아 있는 자는 적은데, 게다가 반수를 뽑아서 조정에 들여보낸다면 너무 허소(虛疏)하여 혹시 왜적이 횡행할까 염려이니, 그리 되면 어찌 소국의 불행이 아니며, 조정의 염려되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소국이 토지가 박하여 금은이 나지 않는 것은 중국이 아는 바이며, 말[馬]은 두 종류로써 호마(胡馬)는 북방에서 온 것이요, 향마(鄕馬)는 국내의 소산이온데, 국마(國馬)로 노새[驢]같은 것은 좋은 것을 얻을 길이 없고, 호마도 백에 하나둘 정도라는 것은 역시 중국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요즘에는 왜적으로 인하여 손상되어 거의 다 없어졌으며, 필육도 비록 국내에서 소산되나 만필(萬匹)에 달하는 수효는 진실로 충당하기 어려운 형편이며, 요동(遼東)의 유리된 민호(民戶)는 현재 방(榜)을 내걸고 초집(招集)하는 중입니다. 첩은 젊어서부터, 일찍이 함부로 말한 적이 없었는데, 하물며 감히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첩은 대덕(大德) 무술년(戊戌年)에 나서 지금 나이 82세이니, 머지 않은 시일에 당연히 성대(盛大)를 하직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죽은 아이의 지성으로 왕화(王化)에 복종하던 미행(美行)이 민멸(泯滅)되어 드러나지 못하고, 외롭고 의지할 곳 없는 손자가 세상에 설 수 없음을 참아 못 보겠기로, 예법을 범하고 심복을 피력하여 폐하의 한 번 깨우치심을 바라니, 폐하께서 가엾게 여기고 용서하시어, 선왕의 시호를 주시고 세작(世爵)의 명령을 내리시며, 세공(歲貢)의 조서를 정돈하여, 소국으로 하여금 그 편의(便宜)를 도모하여, 철에 따라 토산물을 바치고 길이길이 신용을 지키게 하여 주시면, 첩은 마땅히 안심하고 명(命)대로 살다 죽을 것이며, 죽은 아이도 또한 마땅히 지하에서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첩이 하나의 부녀자로서 두 아들과 세 손자의 봉양을 누리고 있으면서, 일조에 급하고 어려움을 당하여, 능히 성명(聖明)의 세대에 자상히 아뢰지 않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선왕을 지하에서 보겠습니까. 지금 사람이 10금(金)의 재산만 지녀도 오히려 자손에게 물려주어 손실됨이 없게 하려 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이겠습니까. 하물며 늙은 소가 송아지를 핥는 정이겠습니까. 첩은 표를 올림에 다다라 눈물을 흘리며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