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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송씨전(宋氏傳) -이곡(李穡)-

천하한량 2007. 2. 13. 06:04

전(傳)
 
 
송씨전(宋氏傳)
 

이곡(李穡)

송씨(宋氏)는 중이 되어 이름을 성총(性聰)이라 한다. 그러나 절에서 거처하지 아니하고, 호천사(昊天寺)의 동산교(東傘橋) 남쪽에 있는 근수루(近水樓) 두 칸에 살면서 날마다 그 안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돈이 생기면 곧 술을 사고 안주를 사들이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또한 산수와 인물을 잘 그리면서도 그다지 속되지 않았다. 성격이 소탈하여 일이 혹 마음에 맞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얼굴 빛을 붉혔으며,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걷잡을 사이 없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시를 짓는데 음운의 규칙에 구애를 받지 않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으면 곧 시가 돼서 나왔다. 어떤 것은 사람을 놀랠 만큼 잘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좌중에 있는 사람을 크게 웃길 정도의 것도 있다. 그러나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적이 없고, 곧 말하기를, “어쩌다가 좋은 글귀가 생긴 것이지 내가 잘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든가, “어쩌다가 졸작이 된 것이지, 내가 나쁘게 지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나의 마음이 마침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 된 것 뿐이다.” 하였다. 집에서 살림살이를 하는 것도 모두 이런 식이어서 평생에 재물은 생각하지도 않고, 물건 값을 입으로 얘기하는 일이 없으며, 손에 수판을 잡을 줄 몰랐다. 아마 옛 사람중에서도 그와 같은 이는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맹자(孟子)》의 글을 읽기를 좋아 했는데, “불효 중에서도 후손 없는 것이 가장 크다.” 는 구절에 이르러 느낀 바가 있었는지 마침내 그 종교를 버리고 그의 머리에 갓을 얹였다. 한 번 과거장에 가본 적이 있었으나 그의 글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특이한 풍이 있어서 초탈한 곳이 있지마는 다른 작품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고시관들이 채택하지 아니하였고, 송씨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고시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나는 수년 동안 북경에서 지내다가 돌아와 보니 송씨는 벌써 죽고 없었다. 아, 슬프도다.
내가 14살 때에 아직 시를 배우지 못했었는데, 종종 송씨에게 다녔으므로 송씨가 나에게 시를 짓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지은 것을 보고는 “됐다” 하였다. 이 해에 송정(松亭) 김(金)선생이 성균관에서 학생에게 시험을 보이는데, 송씨가 나에게 응시하기를 권하였다. 이때에 아버지는 북경에 계셨고, 어머니께서는 또 나를 어리게 생각하여 내가 시험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네가 반드시 미친게로구나. 너의 공부가 반드시 시험을 칠 정도가 못 될 것인데, 아마도 네가 미쳤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어떤 사람이 너를 속이는 것일 것이다.” 하시며, 종이를 주지 아니하시니, 송씨는 자기가 종이를 사서 주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권하였다. 나는 어쩔수 없이 시험을 보았더니 우연히 합격이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나의 의심이 풀렸다.” 하셨다. 내가 곧 생각하기를, “이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요, 사실상 내가 재주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공부를 힘써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하고, 이때부터 공부할 목표를 세우고 다행히 중도에 그만두지 아니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책을 읽은 힘이며 송씨의 힘이었다.
송씨는 무오년에 출생하여 나보다 11살이 더 많았다. 만일 그가 오래 살아서 직접 나의 출세한 것을 보았다면, 반드시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며, 만일 죽은 사람이 아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자기가 사람의 장래를 밝게 알아 보았다는 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나는 그러므로 그의 사적을 전하여 뒤의 사람이 이것을 보고 본받기를 바란다.
한산자(韓山子)여, 한산자여, 곧 송씨가 만들어 놓은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공자는 안회(顔回)를 만들어 놓았다.” 하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송씨가 그대에게 공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공자의 이야기와는 너무나 성질이 다르지 않은가.” 하였다. 나는 이르기를 “뜻만을 따다 쓴 것 뿐이다. 시인의 말을 심하게 따져서 무엇하느냐.” 하였다. 모(某)씨 여자에게 장가들어서 딸 하나를 낳았는데, 영광군(靈光郡) 출신으로 전의 별장이었던 조경수(曹敬脩)에게 출가하였고, 누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씨(李氏)에게 출가하여 낭장인 의(義)와 모직(某職)에 있는 천경(天景)을 낳았고, 하나는 모씨에게 출가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소경으로 거문고를 잘 탔다. 이름은 윤명(允明)인데, 통문시위호군(通門侍衛護軍)에 뽑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