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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박씨전 朴氏傳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3. 06:06

전(傳)
 
 
박씨전 朴氏傳

 


이곡(李穀)  

쾌헌(快軒) 김문정(金文正)공이 문장과 도덕으로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때에 대신이 되어, 나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함에는 시귀(蓍龜)와 같았고, 나라의 교화를 협조하여 주석(柱石)이 되었다. 그런데도 집안의 규모가 더욱 엄하였다. 여러 아들이 과거에 올랐는데, 첫째는 일찍 죽고, 둘째는 둔헌(鈍軒), 셋째는 송당(松堂)이었는데, 모두 대신의 지위에 올라서 그 집안을 계승하였고, 사위는 안씨(安氏)와 박씨(朴氏) 였는데, 안씨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박씨는 밀직대언(密直代言)인데 모두 과거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는 곧 안씨의 손자 세 사람이 과거에 올랐고, 박씨도 아들 세 사람이 과거에 올랐다. 이름을 소양(少陽), 자를 중강(仲剛)이라는 사람은 박씨의 아들인데, 차례로는 셋째다. 비록 성균관의 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여러 번 과거의 응시에는 합격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딱하게 여기므로 그의 사적을 기록한다.
중강은 성품이 고결하여 장구의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평소에도 글을 읽거나 과거 준비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보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과거 보는 장소에는 반드시 들어가지만 종이와 붓과 등불만을 가지고, 책 한 권도 끼고 가지 않으며 웃고 지껄이면서 글을 지어가지고는 잘 됐는지 안 됐는지 조차도 보지 않고 던져버리고 나오기 때문에 마침내는 되지 않았다. 일찍 스스로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좁다란 구석에 갑갑하게 쳐박혀 있는 것은 우물안의 개구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서쪽으로 떠나서 중국 서울에 갔다. 산천ㆍ인물ㆍ궁궐ㆍ성ㆍ도시를 두루 구경하고 나서 그 넓고 활달한 안목과 크고 호탕한 기운이 이미 옛날과 달라져서 희망했던 것에 들어 맞았다. 서하(西夏)의 간극장치서(幹克莊治書)공이 그를 한 번 보고 사랑하여 자기 집에 머물러 있게 하고, 후하게 대우하며 여가 있는 대로 공부를 시켰으나, 중강은 역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래 있는 동안 북방 말에 능하여 나가서 길가는 사람과 얘기하면 길가는 사람은 중강이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못 스스로 흐뭇하게 생각하여 벼슬을 해보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그의 인척으로 산남염방사(山南廉訪司)의 지사(知事)가 된 사람이 있어서 그 관청의 주차(奏差)로 채용하였다. 일찍이 전승(戰勝) 보고서를 가지고 한 번 서울에 왔었는데, 그 해에 내가 회시에 합격되어 여관에서 서로 만나 며칠 동안 즐겁게 지내다가 갔다. 이때부터는 다시 보지 못하였다.
아, 중강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구나. 우리 나라의 사절이 해마다 건강(健康)으로 문안을 들어가는 데도 한 사람도 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어쩌면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 친구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민간에 돌아다니면서 고향 사람과 만나기를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인가. 아니면 벌써 고인이 되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8,9년이나 되는 동안에 사람의 왕래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렇게도 소문이 없을 수가 있는가.
나는 중강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도 아니고 그의 안면을 서울에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송정(松亭) 선생은 실로 나의 좌주(座主)이니, 좌주의 생질을 소홀하게 사귈 수 있는가. 그러므로 같이 밥을 먹으면 중강이 감히 배부르게 먹지 아니할 수 없었고, 옷을 같이하면 중강이 감히 입지 아니할 수 없었다. 남들은 중강을 괴이하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를 근후한 태도로 대우하였고, 남들은 중강을 방탕하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그를 예법대로 단속하였다. 그러므로 중강도 감히 평범한 교제로 나를 사귀지 아니하였다. 쾌헌공(快軒公)의 자손들은 정말 한 세상을 잘 지내는데, 중강은 중국에 들어가서 마침내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니, 뒷 사람이 장차 중강이 어떤 사람이었던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강은 아주 없어지고 전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나는 이를 매우 슬프게 여겨, 간단히 그의 대략을 적어서 아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린다.
중강이 만일 중국에서 공을 세워서 역사에 기록하기를, “고려의 박씨인데 아버지는 아무개, 어머니는 아무씨.”라고 한다면, 곧 나의 이 전기는 전하지 못하여도 좋을 것이지만, 만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마땅히 박씨의 자손으로서 족보를 만드는 사람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