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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오동전(吳同傳) -이곡(李穡)-

천하한량 2007. 2. 13. 06:04

전(傳)
 
 
오동전(吳同傳)

 

 


 이곡(李穡)

태학생인 오동(吳同)은 키가 크고 약간 구부정하였다. 글씨를 잘 쓰며 문장도 잘 하였다. 경진년에 진사에 합격된 사람이다. 하루는 길에서 좌주(座主)인 김정당(金政堂)을 만났는데, 정당이 직접 꾸짖기를, “너는 어째서 글은 읽지 않고 이렇게 쫓아다니기만 하느냐.” 하니, 오동은 손으로 품속에 있는 책을 두들겨 보이며 갔다. 이때에 나이가 15, 6살이었다. 차츰 자라서 성균관의 생원이 되었는데, 예법대로 자신을 단속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는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선배와 늙은 학자들의 칭찬이 점점 넓었는데 불행히 명이 짧아서 죽었으니, 슬프다. 오동이 삼각산(三角山)에 있는 절에서 글을 읽을 적인데, 어떤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재를 올리며 분향하는 탁자 위에다 소문(疏文)을 올려 놓았다. 그런데 마침 중들 가운데는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모든 중이 땀을 흘리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동이 이르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읽어주겠다.” 하고, 곧 중의 옷을 입고 머리는 상투를 틀어서 정수리에 올려 세우고 그 위에다 갓을 얹였다. 모든 중들이 서 있는 속에 끼어 들어가서 거짓으로 시주(施主)에게 이르기를, “내가 두통이 나서 나올 수가 없는 형편이나, 시주의 밥을 배부르게 먹고서 재 올리는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면 죄가 클 것이요, 머리 모양이 여러 사람들과 다른 것은 죄가 적을 듯하여 나왔으니, 시주님네는 괴이쩍게 보시지 마십시요.” 하였다. 범패를 마치고 나서 시주는 향로를 받들고 꿇어 앉아서 감히 꿈쩍거리지 못하고 있을 때, 오동은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서 그갓을 벗을 것처럼하니, 시주가 급히 말리기를, “스님, 갓을 벗지 마십시요.” 하였다. 오동은 못이기는 척하고 그대로 있었다. 회가 끝나고, 시주가 가고 나서 모든 중들이 크게 웃어대어 산골짜기가 떠나갈 듯하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며 산중의 얘기꺼리가 되었다. 지금 천태종의 판사(判事)인 나암 원공(懶菴元公)이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했는데, 오동도 그 가운데에 참여 했었다. 얼마 후에 병으로 죽으니, 선비들로서 계(契)를 모았던 사람들이 돈을 내어 부조하였다.
이영(李?)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오동의 고종형제였다. 역시 글씨를 잘 썼는데, 안상헌(安常軒) 선생이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또 그를 가르쳤다. 과거에 뽑히어 정언이 되었다가 예부원외랑으로 옮겼었는데, 그 뒤에 들어앉고 나오지 않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한다. 흥국사(興國寺)의 남쪽에 우뚝한 봉우리가 있고, 그 동쪽 벼랑이 곧 오(吳)와 이(李)가 살던 집이다. 일찍이 비 오는날 밤에 같은 자리에 누워서 지새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흐릿하여 전 세상의 일인 듯하다. 진실로 그에 대하여 기록을 남길 사람이 없을 것을 염려하여 대략 이러한 정도로 적고 군(君)에 대하여 상세히 아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싹만 나왔다가 패지 않는 것도 있으며, 패기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였으니, 아, 슬프다.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