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죽부인전(竹夫人傳)
이곡(李穀)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니, 위빈(渭濱) 사람 운(?)의 딸이다. 족계(族系)가 창랑(蒼?)씨에서 났는데, 그 조상이 음률을 알아 황제(皇帝)가 뽑아서 악(樂)을 맡아보게 하였으니, 우(虞) 나라의 소(簫)가 역시 그의 후손이다. 창랑(蒼?)이 곤륜산 남쪽으로부터 진방(震方)에 옮겨와 복희씨 때에 위(韋 책의 가죽끈)씨와 더불어 문적(文籍)을 주장하여 크게 공이 있어 자손이 대대로 다 사관(史官)의 업을 지켜 왔다. 진(秦) 나라가 포학한 때에 이사(李斯)의 계교를 써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죽이매, 창랑의 후손이 점점 한미하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채륜(蔡倫)의 문객 저생(楮生 종이)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더불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이 경박하며 참언(讒言)을 좋아하여 죽씨의 강직함을 보고 슬그머니 좀먹어 헐어 드디어 소임을 빼앗았다.
주(周) 나라에는 간(竿)이 있었으니, 또한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과 더불어 위빈(渭濱)에 낚시질할 때, 태공이 갈퀴[鉤]를 만드니, 간(竿)이 말하되,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퀴가 없다 하나이다. 낚시의 크고 작음이 곡(曲)ㆍ직(直)에 있사오니, 곧은 것은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것은 고기를 얻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태공이 그 말을 좇아 뒤에 과연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았고, 간(竿)의 어짐을 천거하여 위빈으로써 식읍을 삼게 하니, 이것이 죽씨 위빈의 유래이다. 지금도 자손이 아직 많으니, 임(?)ㆍ어(?)ㆍ군(?)ㆍ정(?)이 그것이요, 양주(楊洲)로 옮겨간 자는 조(條 세죽)ㆍ탕(? 대죽(大竹))라 일컫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는 봉(? 편죽(編竹))이라 일컫는다.
죽씨는 대개 문(文)ㆍ무(武) 두 줄기가 있어, 대대로 변(?)ㆍ궤(?), 생(笙)ㆍ우(?)와 같은 예악의 소용으로부터, 활쓰고 고기잡는 작은 용도에 이르기까지 전적에 실려 있어, 마디마디 볼 수 있다. 오직 감(?)은 성질이 지극히 둔하여 속이 막혀 배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운(?)에 이르러 숨어 벼슬하지 않았다. 한 아우가 있었으니 이름은 당(?)으로 형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가운데를 비우고 저를 곧게 하였는데, 왕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냈다. 자유가 말하되, “하루도 이 군(君)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였으므로, 호를 차군(此君)이라 하였다. 대저 자유는 벗 취하기를 단정한 사람으로 할 터인즉, 그 위인을 알 만하다.
당(?)이 익모(益母)의 딸과 결혼하여 한 딸을 낳으니, 부인이 바로 그이다. 처녀 때에 정숙한 자태가 있어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사(滔詞)를 지어 떠보니, 부인이 노하여 말하되, “남녀가 비록 다르나 그 절개는 하나인데, 한 번 사람에게 꺾인 바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서리요.” 하매 의생(宜生)이 부끄러워 달아났으니, 어찌 소 끄는 무리가 엿볼 바이랴. 이미 자라나자 송대부(松大夫)가 예로써 청혼하니, 부모가 말하되, “송공(松公)은 군자이다. 그 평소의 조행이 우리 집과 서로 짝이 된다.” 하고 드디어 아내로 보내었다.
부인의 성질이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혹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에는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갬 같으며, 비록 매선(梅仙)의 신(信)이 있음과 이씨(李氏)의 말없음으로써도 한 번도 일찍 돌아보지 않았거니, 하물며 귤로(橘老)와 행자(杏子)이랴. 혹 안개 낀 아침과 달밝은 저녁을 만나 바람을 읊고 비를 휘파람할 제는 그 말쑥한 태도를 무엇으로 형용하기 어려워 호사자들이 슬그머니 그 얼굴을 그려 전하여 보배로 삼으니, 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 같은 이가 더욱 그것을 좋아하였다.
송공(松公)이 부인보다 나이 18세가 위인데, 늦게 신선(神仙)을 배워 곡성산(穀城山)에 노닐다가 돌로 화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로 살며 이따금 위풍(衛風)을 노래하매 그 마음이 스스로 흔들흔들 하여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질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역사에, 그 해는 잊었는데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겨, 취하여 고갈(枯渴)의 병을 얻어 드디어 고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사람을 의지하여 살았고, 만절(晩節)이 더욱 굳어 향리에서 일컬어졌다. 삼국[三邦]절도사 유균(惟? 전죽(箭竹))이 부인과 동성(同姓)이라, 행장(行狀)으로써 위에 아뢰니, 절부(節婦)의 직함을 주었다.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의 조상이 크게 상고의 세상에 공이 있었고, 그 묘예(苗裔)들이 다 재능이 있고 절개가 있어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하다 함이 어찌 헛 말이랴.” 하였다.
연대 : 고려말엽
작자 : 이 곡
갈래 : 가전체
성격 : 전기적, 풍자적, 우의적, 열녀전적
제재 : 대나무
주제 : 죽부인의 절개
의의 : 절개를 주제로 한 가전체
기타 : 송나라 장뢰의 '죽부인전'도 대를 의인화한 작품이다.
줄거리 : 대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굳은 절개와 그 무사(無嗣:代가 끊김)함을 그린 것이다. 이는 일종의 열녀전(烈女傳)으로서, 남녀관계가 문란하였던 당시의 사회상을 풍자한 설화인 듯하다.
출전 :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東文選)'
내용 연구
운 : 왕대, 대나무의 일종으로 물가에서 나는데 키는 수십 자며 둘레가 한 자 혹은 두 자로 대나무 중에서 가장 큰 것임.
창랑씨 : 난지 얼마 안 되는 작은 대나무
소 : 퉁소. 죽관을 나란히 묶어서 만든 취주 악기의 하나.
복희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帝王) 또는 신(神)으로 복희(伏遠:伏犧)·복희(宓羲)· 포희(押犧)·복희(필犧)·포희(怏犧) 등으로 쓰기도 한다.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150년 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몸은 뱀과 같고 머리는 사람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해 ·달과 같은 큰 성덕을 베풀었다 하여 대호(大昊:끝이 없이 넓고 큰 하늘과 같다는 뜻), 또는 대공(大空)이라고도 한다. 복희 황제는 3황 5제(三皇五帝) 중 수위에 있어 중국 최고의 제왕으로 친다. ‘복희’라는 이름은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 속에 나오는, 복희가 8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
하여 어획 ·수렵(狩獵)의 방법을 가르쳤다고 전하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한 대(漢代)의 '위서(緯書)'에는 복희의 모친인 화서(華胥)가 뇌택(雷澤:山東省 복현 남동쪽에 있는 연못)에서 기인(奇人)의 발자국을 밟은 후 수태하여 복희를 낳았다고 하므로, 오래된 전승(傳承)에 기인한 설화같이도 보이나, 후세에 억지로 덧붙인 설화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낳고 있다.
위씨 : 책을 맨 가죽끈을 말함.
문적 : 서적
이사 : 진의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군현제를 실시한 사람.
한미 : 구차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함.
채륜 : 중국 후한 중기의 환관으로 후난[湖南] 출생. 종이의 발명자로 알려져 있는 사람인데,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 ·관리하는 상방령(尙方令)으로서, 97년에 검(劍) 등을 만들었고, 그 후 목간(木簡)·죽간(竹簡)·견포(絹布) 대신 쓸 수 있는 서재(書材)를 발명했다. 이것은 톱밥 ·헝겊 ·풀 등을 소재로 한 ‘채후지(蔡侯紙)’라는 종이이다. 그는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음독 자살하였다.
저생 : 종이의 별칭, 저는 닥나무
죽씨의 소임까지 빼앗아 갔다 : 종이의 발명으로 대나무 조각에 역사를 기록하지 않게 된 사실을 말함.
당 : 운과 같은 왕대
왕자유 :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 그는 대를 차군이라고 했음.
소나 끄는 사람 : 속된 무리들을 비유
송 대부 : 소나무의 의인화
위풍 : 시경에 실린 시가 형식의 하나.
고갈병 : 몸이 마르는 병
만절 : 늦게까지 지키는 절개
유균 : 전죽, 즉 화살대, 원래 균은 조릿대로서 대나무 중에서 가늘고 작아 화살대를 만들기에 알맞은 것을 말함.
후사 : 대를 잇는 아들
절부 : 절개를 지킨 부인
이해와 감상
죽씨의 조상은 상세에 큰 공을 세웠고, 후손들은 재주가 뛰어났으며, 절개가 굳어 세상의 칭송을 받았는데, 죽부인 역시 어진 부인으로 바르고 깨끗하게 어려움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키며 살아갔다는 이야기로, 유교적인 가치관인 '烈'을 주제로 하여, 열녀전적, 교훈적 내용이다. 이러한 가전체가 조선조에 들어와 춘향전 등과 같은 열녀상을 낳게 하는 원류(源流)가 되었으리라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송나라 작품인 장뢰의 '죽부인전'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측된다.
이곡(李穀)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초명은 운백(芸白). 한산 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이다.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이곡은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다.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 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이곡은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嘉善大夫試典儀副令直寶文閣)이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에 본국에서 밀직부사·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곡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私情)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므로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 받았고, 그 이듬해에 죽었다.
이곡은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다.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그의 여러 편의 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
≪동문선≫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이곡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죽부인전 竹夫人傳〉은 가전체문학으로 대나무를 의인화하였다. 그밖에 많은 시편들은 고려 말기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稼亭集, 稼亭集解題(李奭求, 國譯稼亭集·牧隱集, 198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나무와 문화적 상징
대는 매화·난초·국화와 함께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져 왔고, 특히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대쪽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불의나 부정과는 일체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굳게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오우가 五友歌〉에 나오는 “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곳기勘 뉘시기며 속은 어니 뷔연蝎다/뎌러코 사시에 프르니 그를 됴하 悧노라.”라는 시조는 이러한 대의 성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밭〔竹林〕은 문학작품 속에서 흔히 ‘은거지(隱居地)’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때 이미 삼죽(三竹)·향삼죽(鄕三竹)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던 것 같고, ≪삼국유사≫에는 대에 관한 이야기가 몇 편 실려 있다. ≪삼국유사≫의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은 신라 제14대 유리왕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이 때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도와 적을 물리쳤는데, 적이 물러가자 그 이상한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의 능 앞에 댓잎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미추왕이 도운 것인 줄 알고 그 능호를 죽현릉(竹現陵)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으로 미추왕의 신이함을 보인 설화이다.
〈만파식적 萬波息笛〉은 신기한 피리에 대한 설화이다. 신라 신문왕 때 동해에 작은 산이 하나 떠내려 왔는데, 그 산에 신기한 대나무가 있어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왕이 그 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다가도 날이 개며 바람이 멈추고 물결이 가라앉는 등의 신기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낙산사(洛山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에서는 의상(義湘)이 낙산의 바닷가에서 관음의 현신을 만나 그 계시대로 한 쌍의 대가 솟아나는 곳에다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셨는데 그 절이 낙산사라는 것이다.
구전설화로는 엄동설한에 죽순을 구해서 부모를 보양한 효자의 이야기가 전라북도 완주군과 경기도 강화군에서 채록되었다. 이 설화는 부모를 정성껏 모시면 하늘이 돕는다는 교훈적 내용을 담은 효행담이다.
‘댓구멍으로 하늘을 본다.’는 속담은 소견이 좁아 사물의 전모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며, ‘댓진 먹은 뱀’이라는 속담은 이미 운명이 결정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담뱃대에 엉긴 진, 즉 니코틴을 먹으면 뱀이 죽는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역경에 처하여 있는 사람에게 좀더 참고 견디라고 격려할 때는 ‘대끝에서도 삼년〔竿頭過三年〕’이라는 속담을 사용한다.
대와 관련된 민요로는 〈대타령〉·〈대나무노래〉·〈오죽대〉·〈한쌍을 치지 마라〉 등의 제목으로 채록된 민요들이 있다.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고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신이 있고, 대지팡이를 짚고 넘어지면 아버지가 죽는다는 속신도 있는데, 이것은 상장(喪杖)으로 대나무를 쓰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신은 죽순이 한꺼번에 많이 나고 또 쑥쑥 잘 자라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旬五志, 耳談續纂, 한국식물도감(정태현, 신지사, 1956·1957), 약용식물학(임기홍, 동명사, 1961), 속담사전(이기문, 민중서관, 1962), 韓國民謠集 Ⅰ(任東權, 集文堂, 1974), 대한식물도감(이창복, 향문사, 1980), 백화송(양인석, 송원문화사, 1980), 한국의 금기어·길조어(김성배, 정음사, 1981),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나무류의 신화와 상징
대는 화본과에 속하는 다년생 상록 교목의 총칭으로 《삼국유사》에 이서국(伊西國)이 금성에 침입하였을 때 신라군이 당해내지 못했는 데 이때 귀에 댓잎을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서 신라군을 도와주었다. 적이 물러간 후 그들이 간 곳을 몰랐는데 미추왕릉 앞에 댓잎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미추왕릉을 죽현릉(竹現陵)이라고 하였다. 고대 소도(蘇塗)의 어원적 변형으로 보는 솟대와 별신대는 신간(神竿)으로서 흔히 대로 만드는데, 신과의 교감(交感)을 바라는 심리적 반영의 한 형태이다.
무속신화에서 담금애기의 아들 3형제가 대나무 밑에서 아버지를 찾다가 대나무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주겠다고 한 데서 부모상을 당했을 때 상주들이 대지팡이를 짚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풍습에 새벽에 문 밖에서 대를 태워 그 소리로 잡귀를 쫓는 것은 중국의 폭죽 풍습과 맥을 같이 한다. 대는 번식력이 강하고 상록인 점에서 소나무와 비견되는 영생과 불변을 상징한다. 대는 신을 부르거나 내리게 하는 신대로 사용되는 점에서 신화적 상징성을 유추하게 된다. 즉 대는 신령의 집, 신령의 통로 등을 상징한다.
《삼국유사》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는 피리를 통해 남녀음양의 이치를 상징하면서 안식과 평화를 상징하였으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를 지탱한 국민적 합심과 평화를 상징한 것이다. 대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대쪽같은 사람’으로 불의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군자의 행실에 비유된다.
《시경》에서도 대를 두고 “훌륭한 저 군자여…”라고 하였다. 유교적 가치관에 젖은 선비들은 대를 그들의 척도로 삼았다. 정몽주가 피살된 다리를 선죽교(善竹橋)라 명명하고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 혈죽(血竹)이 돋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뜻을 부여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대를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을 도우며 자비의 마음을 돕는다고 하였으며 댓가지는 관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기도 한다. 선가(禪家)에서는 수행자를 지도할 때의 도구로서 죽비(竹??)를 사용하는데 수행의 증진을 상징한다.
중국에서는 순(舜)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었을 때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소상강가에서 슬피 울다 눈물이 강가의 대에 뿌려져 물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소상반죽(瀟湘斑竹)인데 남편을 따라 죽은 그들의 절개를 상징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갈라지되 타협하지 않는 스스로의 민족성을 대에 비긴다. 송죽매(松竹梅)를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신년경축에 사용하며 모든 경사에 상징으로서 표시한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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