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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說) 배갱설(杯羹說)-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2. 10. 18:41

설(說)
 
 
배갱설(杯羹說)
 

이곡(李穀)

하늘의 운명이란 지혜로 구할 수 없으며 백성의 마음은 힘으로 얻지 못한다. 3대(代)가 혁명할 때에는 모두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하늘이 그에게 명을 내렸고 백성이 그에게 마음을 돌렸다. 그러므로 싸움을 하지 않을지언정 싸우기만하면 반드시 한 번에 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 백성의 속에서 일어나서 갑자기 천하를 차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秦)의 천하는 또한 3대의 천하였다. 하늘의 명과 백성의 마음이 어찌 고금의 차이가 있겠는가. 유씨(劉氏)와 항우(項羽)가 서로 다툰 것은 지혜와 힘으로 한 것인가. 공과 덕으로 한 것인가.
옛적에 이르기를, “유씨는 너그럽고 어질고 틀이 컸다.” 했는데, 나는 ‘국 한 그릇’이라는 말을 보고서는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진의 사나운 정치로 인하여 백성의 고통은 날로 심하였는데, 백성들은 군사를 일으켜 진을 타도하려는 것을 보고 메아리처럼 호응하며 구름처럼 모여들어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만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백성을 수없는 싸움터에 데려다 죽였으니, 유씨가 한 일을 백성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그러다가 항우가 태공(太公)을 삶아 죽이려 할 때에 곧 말하기를, “부디 나에도 국 한 그릇을 나누어 달라.” 하였다. 그가 다툰 목적은 백성을 살리려는 것이였는데, 이제 도리어 백성을 해쳤으며, 그가 사람노릇을 하게된 것은 부모였는데, 이제 이를 범의 입에 놓아두고서도 조금도 걱정함이 없이 다만 이기고 지는 것만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만일에 항백(項伯)이 입을 다물고 항우가 분노를 참지 못하였다면, 도마 위에 얹힌 고기가 그릇 속의 국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가 보장했겠는가. 비록 몰래 업고서 도망을 치지 못할망정 국 한 그릇이란 말이 어떻게 사람의 자식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유씨는 오히려 예의를 가장하여 항우가 의제(義帝)를 죽인 것을 역적이라고 공포하고, 의제를 위하여 상복을 입고 제후(諸侯)에게 호소하였으니, 그것과 자기 아버지를 삶아서 국을 끓여도 좋다한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차이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유씨는 너그럽고 어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한고조(漢高祖)는 무명옷 한 벌 걸치고 칼 한 자루만을 짚고 나서서 5년 만에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이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만일 부모를 위하여 자기를 굽혔다가 한 번 기회를 놓쳐버렸다면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한 고조의 큰 틀은 반드시 그가 자기의 아버지를 해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하는데,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 때를 당하여 항우 같이 강폭한 사람이 태공을 죽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하물며 유씨는 항우와 형제의 의리가 없었다. 어떻게 항우가 저의 아버지로 생각해 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난번에 이미 홍문(鴻門)에서 몸을 빼내 돌아와서 한중(漢中)에서 임금이 되었으니, 마땅히 정치를 잘하고 군대를 양성하며 인(仁)과 의(義)로 굳게 결속하여 그 근본을 북돋아 두었다가, 하늘의 명령과 백성의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면 곧 진의 천하가 유씨를 버리고 누구에게로 갔겠는가. 1백 리의 땅으로 8백 년의 주(周)의 왕업을 창조한 문왕(文王)의 업적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니, 한(漢)의 정치가 어찌 성왕(成王)과 강왕에 근사한 정도에만 멈출 뿐이겠는가. 3대 이후에 한과 당을 칭찬하지만 한과 당의 어질다는 임금이 부자간의 관계에 있어서 양심상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으니, 이것은 오로지 술책과 힘만을 힘쓴 까닭이었는가. 아아.


[주C-001]배갱설(杯羹說) :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다 같이 광무(廣武)라는 땅에서 서로 마주보이는 곳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항우는 자기에게 포로로 잡혀 온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높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말하기를,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태공을 삶아 죽이겠다.” 하였다. 유방은, “내가 항우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은즉 나의 아버지는 곧 너의 아버지이다. 네가 너의 아버지를 삶으려거든 부디 나에게 국 한 그릇만 나누어 다오.” 하였다. 항우는 노하여 태공을 죽이려 하였으나 항백(項伯)의 만류로 죽이지 않았다. 《사기 항우본기(史記項羽本紀)》
[주D-001]3대(代) : 하(夏)ㆍ는(殷)ㆍ주(周)의 세 왕조.
[주D-002]비록 …… 못할망정 : 맹자(孟子)의 제자인 도응(桃應)이 묻기를, “순(舜)이 임금으로 있을 때에 순의 아버지인 고수(??)가 살인죄를 범했다면 순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니, 맹자는, “순은 임금의 지위를 헌 신처럼 버리고 그의 아버지를 몰래 업고 달아나서 멀리 바닷가에 가서 살 것이다.” 하였다. 《맹자 진심 상(孟子盡心上)》
[주D-003]성왕(成王)과 강왕(康王) : 모두 주(周)의 임금. 이 두 임금 때에 정치가 잘 되었으므로 요(堯)ㆍ순(舜)의 다음에 가장 훌륭한 정치라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