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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송 양광도 안렴사 안시어시 서(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8:39

서(序)
 
 
송 양광도 안렴사 안시어시 서(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순흥 안씨가 대대로 죽계(竹溪)에서 살고 있었다. 죽계는 그 근원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왔으므로, 산도 크고 물도 멀어 안씨의 흥왕(興旺)이 아마 한이 없을 모양이다. 근재(謹齋) 선생이 대정(大定) 갑자년에 천자의 조정에서 응시(應試)하여 드디어 이름을 크게 떨치고, 돌아와서 본국에 벼슬하여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며, 문장과 도덕이 한때 걸출하였다. 그 벼슬에 있으면서 일에 임하면 닥치는 곳마다 공을 이루었고, 충의의 대절(大節)에 이르러서는 무너진 풍속을 격려하고 쇠퇴한 세상을 진작하며, 나약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한 것이 많아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다. 선생의 막내아들 사청(嗣淸)도 역시 문학으로 진출하였는데, 나와 동년이다. 조정에 서면 상서로운 기린과 위엄 있는 봉황과 같고, 외국에 사신 가면 장성(長城)과 적국(敵國)과도 같아서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하지만 온자한 품은 오히려 나았다.
나의 선친 문효공(文孝公 이곡〈李穀〉)이 근재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었고, 또 그 아우 정당공(政堂公)과 함께 동년이었는데, 내가 또 사청(嗣淸)과 더불어 함께 신사년에 진사가 되었으니, 안씨와 이씨는 세교(世交)를 맺게 되었다. 그렇다면 증언(贈言)할 바에야 정(情)으로 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사청(嗣淸)이 시어사(侍御史)로서 외직에 나가 양광(楊廣)을 안찰하게 되니, 동년의 진사들이 서로 작별을 나누며 술이 오가자 나는 곧 말하기를, “이미 세교(世交)를 맺게 되었고 공이 또 말을 청하는데 어찌 침묵할 수만 있으랴. 그러나 사청이 학업이 있고, 절조가 있어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맡은 바의 직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성명(聲名)이 몹시 높아지고 있으니 경계한다면 망령이요, 칭찬한다면 아첨이다. 그러나 안회(顔回)와 자로(子路)는 어떠한 인물인가. 그분들은 친히 성인을 모시어 아침저녁으로 성인의 훈계를 들었으니, 조존(操存)ㆍ성찰(省察)의 공부에 있어서는 진실로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순순히 증언(贈言)하였으니, 더구나 우리들이랴. 사청이 내외직을 계속 역임하여 비록 현달하였지만, 그 묵은 세덕(世德)과 부지런한 행동으로 공명과 사업이 물밀듯이 날로 나아가서 끝이 보이지 않으며, 더구나 그 장점을 유세하여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 않은 것은 그의 특징이다. 그러나 도덕이 몸에 배고 정사가 효과를 거두는 것이 또 오늘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진보할 여지가 아직도 많이 있을 것이니, 사청은 더욱 힘쓸지어다. 그렇다면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그 뜻을 견지하여 처음대로 변함이 없으면 되는 것이다.” 뭇 사람들이 “그렇다.” 하므로 드디어 써서 서문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