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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계림부공관 서루시서(鷄林府公館西樓詩序)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8:37

서(序)
 
 
계림부공관 서루시서(鷄林府公館西樓詩序)
 

내가 동경(東京 경주(慶州)) 객사에 이르러 동루(東樓)에 오르니 별로 아름다운 경치가 없으므로, 서루(西樓)에 오르니 자못 장대하고 아름다우며 탁 트여서 성곽(城郭)과 산천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 선공(旋公)의 대서(代書)로 쓴 의풍루(倚風樓) 석 자가 있고, 제영(題詠)한 것은 없었다. 오직 이 부(府)는 천 년의 왕도로 옛 사람의 유적이 왕왕 남아 있으며 본국에 와서 동경(東京)이 되어 또한 5백 년이 가까운 세월에 그 번화하고 가려(佳麗)함이 동남에 으뜸이었으며, 부절(符節)을 가지고 와서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베풀었던 자들 가운데 또 시인 묵객(墨客)이 많았으니, 반드시 홍벽(紅壁) 사롱(紗籠)에 은구(銀鉤) 옥저(玉?)와 같은 문필을 남겨두어 그 사이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바로는 오직 빈헌(賓軒)에 제(題) 한 절구 하나가 있을 뿐이니 선유(先儒) 김군유(金君綏)가 수창(首唱)한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지난번 관사가 화재를 만나서 시판(詩板)도 따라서 없어졌다.” 한다. 그러나 김군유의 시만 어째서 화재를 입지 아니했으며, 화재가 난 이후의 작품도 역시 어째서 보이지 않는 건지 혹자의 말도 족히 증빙되지 않는다.
그런데 향교 유생 한 사람이 말하기를, “김공의 시가 뜻밖에 남아 있어 족히 백 년 전의 풍류와 인물을 상상할 수 있다. 대개 그 시절에는 백성이 순후하고 정사가 간편하여 일을 만나면 선뜻 처리하고, 흥을 만나면 바로 발하여 부서(簿書)가 앞에 있고 사죽(絲竹)이 뒤에 벌려져도 사람이 그르게 여기지 아니하고, 자신도 혐의로 생각지 아니했는데, 백 년 이후로는 스스로 겉치레에 급급하여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혹시 그럴 때가 아닌가 저어하는데, 어찌 감히 구경하고 읊조리어 썩은 선비의 시비를 취하겠는가. 지금 선생은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베푸는 책임이 없이 진경(眞境)과 승경(勝境)을 탐색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만길의 풍악(楓岳)ㆍ설산(雪山)을 실컷 구경하고 또 철관(鐵關)을 넘어 동해로 들어가서 국도(國島)의 기이하고 신비한 데까지 궁극하고, 드디어 바다를 따라 남으로 향하여 총석정(叢石亭)의 옛 비갈(碑碣)과 삼일포(三日浦)의 단서(丹書) 6자를 어루만져 보고, 영랑호(永郞湖)ㆍ경호(鏡湖)에 배를 띄워 사선(四仙)의 유적을 찾고, 성류굴(聖留窟)에 촛불을 비추어 그 깊숙하고 괴이한 것을 궁극하고 마침내 이곳에 왔으니, 그 구경이야말로 실컷 배불렀다 할 만하다. 비록 그러하나 신라 고도의 장관(壯觀)과 조망(眺望)이 이누에 모였는데, 말 한 마디 없이 떠나는 것은 선생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이미 이르지 않았는가? 다만 능히 시인 묵객의 유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러나 제생(諸生)의 말을 듣고서 깊이 느끼는 바 있으며 또 세변(世變)을 볼 수 있었다. 인하여 장구(長句) 4운을 이루어 이 누에 오르는 자에게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