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종형 헌납군에게 준 시의 서문[贈宗兄獻納君詩序]
우리 조상은 대대로 진양(晉陽)의 사족(士族)이었다. 진양은 삼한(三韓) 시대에는 진한(辰韓)에 예속되었고 삼국 시대에는 신라에 예속되었고 고려 시대에 가서 신라를 통합하였는데, 우리 좌사랑중(左司郞中) 공(公)이 현왕(顯王)의 조정에 공이 있어 문하시랑 동평장사(同平章事)를 증직하였고, 그 뒤에 사문박사(四門博士) 공(公)이 고왕(高王)의 조정에 벼슬하였는데, 당시에 바야흐로 난리가 많으므로 어버이의 늙음을 빙자하여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가 그 아들과 손자를 가르쳐서 대대로 과거에 올랐다. 그 끝 손자의 증손은 우리 증조인 진원군(晉原君) 공(公)이요, 그 둘째 손자의 증손은 헌납군의 증조인 천남처사(川南處士) 공(公)이다. 대대로 같은 시골에 살며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고 출입할 때에 서로 기다리고, 환란이 있으면 서로 구원하며, 농사짓고 글읽는 즐거움을 같이하고, 명절 때에 어울려 놀며 친애하는 것이 촌수가 멀다 해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 헌납군이 나보다 9살 많아 먼저 향교에 들어갔고 내 나이 15세에 비로소 향교에 가서 같이 글도 읽고 시도 지은 지 5년 만에 뜻밖에 내가 먼저 과거에 급제하고 헌납군은 학업에 더욱 진전하여 그 뒤 12년 만에 높은 과거에 뽑혀 성균관에 벼슬하다가 갑자기 예관(禮官)으로 옮기고 다시 나가 군수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백성에게 은혜로운 정사를 한 점을 칭찬하였다. 벼슬을 내놓고 한가히 산수(山水) 사이에 있은 지 수십 년 만에 조정의 공론이 노성(老成)한 사람을 존중히 여기어 간관으로 천거하니, 헌납군이 나이 70여 세가 되었지만 정신과 기운이 조금도 쇠하지 않아서 조정에 들어올 적에 긴 눈썹과 흰 머리로 화락하게 나아가고 물러가니, 주상은 예(禮)로 대우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쳐다보았다. 거룩한 조정에 빛을 내는 것이 적지 않았다. 여러 사대부들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은 시를 지어 축하하니, 좌정승 이곡 선생(移谷先生)이, “동년생(同年生)이다.” 하며, 극진한 예로써 대우하고 그 시에 화답해 주었다. 헌납군이 나에게 그 책 위에 서문을 써 달라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재상을 팔다리라고 하고, 간관(諫官)을 이목(耳目)이라고 하였다. 팔다리와 이목이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원수(元首)의 한 몸이 된 것은 같으니, 어떤 것은 중하고 어떤 것은 경하다 할 수 없다.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임금이 알아줌을 입어서 간관이 되었다면 또한 잘 만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나는 재주도 없이 공연히 정승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헌납군은 임금의 부름을 받아 간관이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조상들의 덕을 쌓고 어진 일을 행한 음덕이 우리 두 사람에게 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팔다리의 책임은 내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많지만 이목의 책임은 그대가 잘해야 한다.” 하였다. 헌납군은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나, 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감히 힘을 다하여 우리 조상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할 생각을 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서 그 말을 서문으로 쓴다.
'▒ 가정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論) 조포 충효론(趙苞忠孝論) -이곡(李穀) - (0) | 2007.02.10 |
---|---|
설(說) 배갱설(杯羹說)-이곡(李穀)- (0) | 2007.02.10 |
서(序) 송 양광도 안렴사 안시어시 서(送楊廣道按廉使安侍御詩序) -이곡(李穀) - (0) | 2007.02.10 |
서(序) 계림부공관 서루시서(鷄林府公館西樓詩序) -이곡(李穀) - (0) | 2007.02.10 |
서(序) 송 김회옹 부 화평부서(送金晦翁赴化平府序) -이곡(李穀) - (0) | 2007.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