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최씨전(崔氏傳)
이곡(李穀)
신사년 십운과(十韻科)에 합격한 최림(崔霖)은 아버지의 이름이 성고(成固)인데 낭장이요, 어머니는 장씨(蔣氏)인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다. 최림은 술을 좋아하며 시를 읊고 절간에 다니며 놀기를 좋아 하는데, 술을 받아 주지 않는 자라면 거기를 떠나버린다. 한계(寒溪)라는 중과 매우 뜻이 맞아서 친숙히 서로 쫓아다니므로 예법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상당히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워낙 재주가 높기 때문에 차츰 그를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계사년 가을 향시에서 내가 최씨와 함께 합격하게 되었는데,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를 보게 됐을 때에 최씨는 안질이 생겨서 글씨를 쓰기가 곤란하였다. 곧 탄식하기를, “내가 기왕에 합격된 것은 요행으로 된 것이다. 지금 나보다 재주가 높은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두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가 과거에 오른다는 것은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는데, 눈까지 이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나는 과거를 포기하겠다.” 하고, 마침내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미 본국에 돌아와서 병부원외랑으로 옮겨갔다가 병신년에 다음 해의 신정(新正)을 하례하는 표를 받들고, 서울에 왔다가 일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다가 요하(遼河)에 이르러 도둑을 만나서 사신ㆍ부사(副使) 및 삼절(三節)의 사람과 아전까지 모두 피해되었다. 아, 슬프다.
기주(?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아버지와 젊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분이다. 널리 배웠고 문장에 능하여 그에게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높은 과거에 합격하고 훌륭한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진공(秦公)은 늙어서도 오히려 과거장에 나다니려 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정해년 공거(貢擧)의 고시관이 되었을 때, 진공은 말하기를, “내가 가정(稼亭)과 어릴 적부터 같이 공부하였으니, 비록 요행으로 합격이 된다 할지라도 남들은 반드시 가정이 나를 보아준 것이라 할 터이니, 나로 말미암아 이런 이름을 얻는다면 이것은 내가 가정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지, 될 수 있는 일인가.” 하며, 마침내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이 5 품을 지냈으니 관료의 대열에 서게 됨이 확실하건만 물러가서 여러 학생들과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씨는 그의 사위였다. 그의 문장은 또한 진씨로써 미칠 바가 아니었으나 벼슬에 달하지 못하고 불행히 죽었으니, 아, 최씨의 화인가. 진씨의 화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는 최씨나 진씨가 모두 후세에 전하게 될 것이니, 이것으로나마 지하에서 행여 스스로 위로함이 있을 것이다.
최씨는 뜻이 크고 결단성 있게 말을 하였으니, 만일 그가 죽지 아니하여 그의 문장이 더욱 발전되었다면 마땅히 졸옹(拙翁)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벼슬에 있은 지 오래 되지 못하여 뜻을 나타내지 못하였고, 문장을 지은 것이 적어서 재주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의 정기는 요하(遼河)의 하늘에 흩어졌으며, 그의 넋은 요하의 들판을 가리었으니, 마땅히 학(鶴)이 되어 화표(華表)를 말하며 돌아오리니, 1천 년이 지난 뒤에 최씨의 전기를 읽고 또 그의 음성을 들으리로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나는 이것으로 그의 대강을 기록하여 최씨전(崔氏傳)을 지었다.
'▒ 가정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傳) 정씨가전(鄭氏家傳)-이곡(李穀)- (0) | 2007.02.14 |
---|---|
전(傳) 백씨전(白氏傳) -이곡(李穀)- (0) | 2007.02.14 |
전(傳) 초계정현숙전(草溪鄭顯叔傳) -이곡(李穀)- (0) | 2007.02.14 |
전(傳) 박씨전 朴氏傳 -이곡(李穀) - (0) | 2007.02.13 |
전(傳) 오동전(吳同傳) -이곡(李穡)- (0) | 2007.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