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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傳) 정씨가전(鄭氏家傳)-이곡(李穀)-

천하한량 2007. 2. 14. 17:46

전(傳)
 
 
정씨가전(鄭氏家傳) 

 

 
 이곡(李穀)

정씨(鄭氏)는 서원(西原)의 큰 성(姓)이다. 족보에 실린 것으로는 별장(別將)인 이름을 극경(克卿)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극경은 증중랑장(贈中郞將)인 효문(孝聞)을 낳고, 중랑장이 조의대부 신호위 대장군(朝議大夫神虎衛大將軍)인 의(?)를 낳았는데, 처음의 이름은 준유(俊儒)였다. 대장군이 금오위(金吾衛)의 산원(散員)인 적성(赤城) 백이신(白利臣)의 딸에게 장가들어 감찰어사 증상서우복야(監察御使贈尙書右僕射)인 현(?)을 낳았고, 복야가 유릉직(綏陵直)인 평주(平州) 한휘(韓暉)의 딸에게 장가들어 도첨의찬성사로 시호가 장경공(章敬公)인 해(?)를 낳았고, 장경공이 부영(扶寧) 김공(金公) 구(坵)의 딸에게 장가들어 청하군(淸河君)인 책(책)과 판전교시사인 이(怡)를 낳았고, 다음에 중찬치사(中贊致仕)로 시호가 광정(匡定)인 홍공(洪公) 규(奎)의 딸에 재취하여 딸 둘을 낳았는데, 대언(代言)인 경사만(慶斯萬)과 종부령(宗簿令)인 최광(崔廣)에게 출가하였다. 청하군이 판삼사사(判三司事)인 상락군(上洛君) 김공(金公) 순(珣)의 딸이며, 도첨의 중찬인 양천(陽川) 허문경공(許文敬公) 공(珙)의 외손녀에게 장가들어 설헌(雪軒)선생 오(?)와 설곡(雪谷) 선생 포(?)를 낳았다. 전교(典校)가 모 벼슬인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판사(判事)인 곽침(郭琛)에게 출가하였다. 경씨(慶氏)는 지금 시중공(侍中公)인 복흥(復興)을 낳았고, 최씨(崔氏)는 판개성(判開城)인 맹손(孟孫)을 낳았다. 설헌(雪軒)은 모 벼슬인 아무의 딸에게 장가들어 곽침을 낳았는데, 벼슬이 정윤(正尹)이요, 다음인 선진(旋軫)은 지금 양가대사 조계종 연복사주지(兩街大師曹溪宗演福寺住持)가 되었고, 다음은 운(?)인데 정유년에 급제하여 지금 판전교가 되었다. 딸을 만호(萬戶)인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 삼사우윤(三司右尹)인 권주(權鑄), 규정(糾正)을 지낸 유정현(柳廷顯)에게 각기 출가시켰다. 설곡(雪谷)은 첨의참리(僉議參里)인 춘헌(春軒) 최문도(崔文度)선생의 딸에게 장가들어 간(?)을 낳았다. 벼슬이 안릉령(安陵令)이었는데 일찍 죽고, 다음은 연(衍)인데 추(樞)로 고치고 자(字)를 공권(公權)이라 했는데, 지금은 자로 행세한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 앉았다. 딸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인 원송수(元松壽), 정당문학인 정사도(鄭思道), 호군(護軍)인 이인부(李仁富)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원씨(元氏)의 딸은 첫째는 삼사좌윤(三司左尹)인 허금(許錦)에게, 규정(糾正)인 김약채(金若采)에게 각기 출가하였다. 정씨(鄭氏)의 아들은 홍(洪)인데, 정사년에 급제하여 예의정랑(禮義正郞)으로 있다. 이씨(李氏)는 아들이 셋인데, 박실(樸實)은 낭장이요, 강실(剛實)은 정사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신호위참군(神虎衛參軍)이며, 견실(堅實)은 승사(承仕)다. 첨서(簽書 공권(公權)을 가리킴)는 지도첨의(知都簽議) 한대순(韓大淳) 공의 딸에게 장가들어서 총(摠)이라 하는 아들을 낳았는데, 병진년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었고, 다음은 증(拯)과 탁(擢)이다. 딸은 내부령(內府令)인 이빈(李贇)에게 출가하였다. 정씨의 선대에서 경사를 쌓고 복을 내려 보내었으니, 대장군이 나라 일을 위하여 희생한 사적은 공신(功臣)을 봉한 문서에 기록되었고, 제사를 드리는 예전(禮典)에 실려 있으며, 장경공(章敬公)의 위대한 공업은 뚜렷히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그의 자손이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장군은 대성(臺省)의 관리로 서경분사(西京分司)에 있었는데, 마침 성주(成州)의 출신인 최광수(崔光秀)가 요(遼)의 잔당인 금시(金始)가 반란을 일으킨 기회를 이용하여 서경병마사(西京兵馬使) 최유공(崔愈恭)을 죽이고, 그 성(城)을 점령하여 관료들을 배치하고 정예 군대를 모집하여 “고구려를 다시 살린다.”고 성명하고, 격문을 전하여 서로 선동하였으니, 그것은 우리 고종(高宗) 4년 정축년이었다. 대장군이 지위는 비록 낮았으나 크게 노하여 신부(神斧)를 들고 필현보(畢玄甫), 신죽(申竹)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최광수를 공격하여 과연 도끼를 한 번 들어서 그를 찍어 죽이고, 그의 무리 80여 명을 베고 나머지는 따지지 않고 내버려두니, 변덕부리던 사건이 드디어 안정되었다. 고종은 크게 기뻐하여 특별히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 그대로 내시원(內侍院)에 참직(參直)하게 하고, 의관(衣冠)과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참가한 군관들에게 차등이 있게 상을 베풀었다. 장군(將軍)ㆍ시랑(侍郞)을 거쳐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강화(江華)에 도읍을 옮기던 다음 해에 필현보가 서경(西京)의 일로 반란을 일으켰다. 대신이 그를 불러들여 안무(按舞) 시킬 것을 의논하는데, 필연보가 일찍이 의(?)의 부하로 있었으므로 곧 의를 보내고 달려가서 임금의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이미 대동강에 왔을 때 따르는 사람이 갑자기 들어가지 말라 하였으나, 의는 용기를 내면서 말하기를, “명령을 받고 나온 이상 감히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는가. 죽는다는 것은 나의 본분이다.” 하였다. 이미 필현보를 보니 필현보는 대장군을 얻은 데 대하여 기뻐하며, 대장군을 주장을 삼으려 하며 일변 달래며 일변 협박하였으나, 대장군은 마침내 굴하지 아니하다가 피해되었다. 나라에서는 선대의 공신을 표창하는데 대장군을 꼭 참여시켰다.
어사(御史 견(?)을 가리킴)는 선대의 덕을 받지 않았고, 아들인 장경공은 어릴 때부터 힘을 내어 문장을 잘 하였다. 원종(元宗) 신미년에 나이가 18살이었는데, 사마 시험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과거에 급제하고, 또 이듬해에 비서성에 들어갔다가 바로 통문원녹사(通文阮錄事)와 대관승(大官丞)으로 바꾸었고, 여러 번 옮겨서 문한서(文翰暑)와 사관(史館)에 봉직하였다. 신사년에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올랐는데, 공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이 해에 충렬왕(忠烈王)이 합포(合浦)에 행차할 적에 따라갔는데 일본을 정벌하기 위함이었다. 계미년에 좌보간에 옮겼고, 겨울에 군기소윤(軍器少尹)으로 옮겼다. 을유년에 군부정랑(軍簿正郞)에 옮겼고, 병술년에는 보문서대제(寶文署待制)가 되었고, 정해년에 소윤비서(少尹秘書)가 되었다. 가을 7월에 임금을 따라서 북으로 올라와서 조현대부 군기윤(朝顯大夫軍器尹)에 승진되고, 겨울에는 군부사(軍簿司)의 총랑(摠郞)으로 전목부사(典牧副使)를 겸임하고, 무자년에는 전직(前職)을 그대로 가지고 춘관시독(春官侍讀)을 겸하였고, 얼마 후에 사관 수찬관(史館修撰官)에 보충되었고, 겨울에 전리총랑 문한시독학사(典理摠郞文翰侍讀學士)에 옮겼고, 경인년에는 밀직사 우부승지 우사의 대부 세자우유선(密直司右副承旨右司議大夫世子右諭善)에 발탁되었고, 임진년에 우승지에 승진되어, 남성(南省)의 시험에 고시관이 되어 정당(正堂)인 이언충(李彦沖) 등 62명을 뽑았다. 갑오년에 지신사(知申事)에 승진되었고, 원정(元貞) 을미년 가을 7월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가 되었고, 곧 국학 대사성에 옮겼다. 병신년 봄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옮겼고 겨울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세자원빈(世子元賓)을 겸하였다. 무술년 가을에 지사병조판서(知司兵曹判書)에 승진되었다. 8월에 표(表)를 받들고 성절(聖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갔더니 성종(成宗)이 그를 보고, 정말 사신답다는 칭찬이 있었다. 경자년에 밀직사(密直司)로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판삼사사가 되었고, 신축년에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事司)가 되었고, 갑진년 봄에 참리 첨의사(?理僉議司)가 되었고, 을사년에 찬성사 연영전 대사학 동수사(延英殿大司學同修史)에 승진되었고, 4월에 공거(貢擧)를 맡아서 장자빈(張子贇) 등 33명을 뽑았는데 이때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얻었다고들 하였다. 정승(政丞) 한종유(韓宗愈), 정승 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공의 문인이었다. 이해 6월 5일에 옛 질환이 일어나서 저녁이 되어 깨끗이 세상을 마쳤다. 유언에 의하여 장례를 간소하게 지냈다. 나이는 52살이었다.
장경공(章敬公)은 풍채가 잘났고 수염이 그림과 같았다. 평소에 있을 때에는 성품이 너그러웠으나, 일을 만나면 분명하고 날카로워 흔들 수가 없었으니, 대체로 마음이 강한 분이었다.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은 은총을 믿고 충렬왕을 그르치어 장차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세우려고 천자에게 표를 올리어 요청하려 하였다. 장경공은 그의 하는 짓에 대하여 분개하였으나 이를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길에서 송(宋)을 만났다. 성재(省宰)와 원재(阮宰)가 서로 만날 때에 예절을 차리도록 되어 있는데, 송방영은 교만하여 그대로 말 위에서 인사만 하려 하였다. 장경공은 거짓으로 못 본척하고 천천히 말에서 내리어 예절을 마치고 그의 길을 따르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의 직책인데 어째서 폐지하느냐.” 하고, 자기의 수행원을 시켜서 그 멱살을 잡고 그 뺨을 갈기게 했더니 송방영은 부끄러워하면서 가 버렸다. 이것이 강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경공은 벼슬에 들어가면서부터 늘 인사전형에 참여하였는데, 장경공이 올리든가 내치든가 하는 것이 모두 여러 사람의 의사에 일치되었다. 일찍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정동성 낭중(征東省郞中)이 된 적도 있었다.
청하군(淸河君)은 성품이 활달하고 얽매임이 없으며 집안 사람의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았다. 부인인 김씨(金氏)의 할아버지 충렬공(忠烈公)이 늘 그를 칭찬하기를, “책(?)은 정말 남자답다.” 하였다. 젊어서 집안의 공로로 여러 번 벼슬하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阮錄事)에 부임되었다가,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 흥위위 참군사별장(興威衛參軍事別將)을 지냈다. 대덕(大德) 8년에 흥위위 보승호군(興威衛保勝護軍)으로 조현대부(朝顯大夫)의 품계에 올랐고, 이듬해 가을에는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옮겼고, 겨울에 동경부 유수(東京副留守)로 나갔으며 12월에 예빈윤(禮賓尹)을 첨가하였다. 대덕 정미년에 충주 목사로 나갔는데, 정사가 엄정하고 밝았으므로 아전이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였고, 연우(延祐) 기미년에 친어군 대호군(親禦軍大護軍)으로 들어와, 중현대부(中顯大夫)에 올랐고, 지치(至治)의 연대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5년 동안이나 북경에 머물러 있었는데, 심왕(瀋王)의 세력이 날로 커졌기 때문에 신하로서 절의를 지킨 사람은 백에 둘이나 셋 정도였고, 돌아서서 임금을 욕하며 요행을 바라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청하군은 이때에 궁궐도감사(宮闕都監使)로 있었는데, 왕의 경비가 다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곧 도감(都監)의 묵은 예산 중에서 명목이 없는 것을 꺼내어, 가벼운 짐으로 만들어서 이를 북경의 저택에 보내었다. 충숙(忠肅)은 매우 이를 고맙게 여기어 정사를 회복한 뒤에 곧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에 임명하고, 바로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올리어 판선공(判繕工)을 시켰다. 마침 병이 생겨서 청하군(淸河君)에 봉하고 조용히 들어앉아서 정양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청백함을 나타내며 그의 공로에 보답한 것이었다. 나이 55살에 죽었다.
설헌(雪軒)의 자는 사겸(思謙)이다. 연우(延祐) 정사년 과거에 급제되어 벼슬이 첨의평리(僉議評理) 개중대광(階重大匡)에 이르렀고, 추충진의 보리공신(推忠陳義輔理功臣)의 칭호를 내리고, 시호를 문극(文克)이라 하였다. 공은 일찍이 임금의 명령을 받고 제거정동유학(提擧征東儒學)이 되었는데, 대체로 충숙왕이 현릉(玄陵)에게 전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니, 이러므로 현릉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설곡(雪谷)은 자(字)가 중부(仲孚)다. 태정(泰定)은 병인년에 나이 18세였는데, 잇달아 진사과와 급제과(及第科)에 합격하였다. 계림(鷄林) 최졸옹(崔拙翁)에게 다니며 놀기를 좋아하여 그의 문장 쓰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그의 시나 문장은 속스러운 기가 없었다. 비순위참군(備巡衛參軍)과 전의직장(典儀直長)을 지냈으며, 지원(至元) 정축년에 예문관에 들어와 수찬이 되어, 표를 받들고 북경에 갔었다. 마침 충숙왕이 우리 나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심양도(瀋陽道)의 길에서 올라가 뵈었다. 충숙은 첫번에 보고 그를 사랑하여 머물러 두고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무인년에 갑자기 계급을 특진하여 좌사보(左思補) 지제교, 성균관 사예, 예문관 응교지제교로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게 하였다. 기묘년 정월에 충숙왕이 죽고 신사년에 충혜왕(忠惠王)이 서고 나서 전리총랑(典理摠郞)에 옮겼고, 이해 여름에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좌사의대부 예문관 직제학지제교(左司議大夫藝文館直提學知製敎)에 임명되고, 가을에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계가 올랐다. 사의대부(司議大夫)는 옛날의 간의대부였으므로 글월을 올려, 규탄한 바가 많았기 때문에 정권을 잡은 자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얼마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와 집에 들어있는데, 어떤 사람이 왕에게 참소하기를, “정씨의 형제가 중국으로 달아나 태제(太弟)를 끼고 옹호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이리하여 명을 내리어 형제를 모두 쫓아내게 하여 문극(文克)은 영해(寧海)로 가고, 설곡(雪谷)은 울주(蔚州)로 가게 되었다. 설곡은 비록 귀양살이로 있으면서도 태연스럽게 시를 읊으며 지냈다. 지금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시의 구절을 보면 백성을 사랑으로 따뜻이 하며 아전을 엄하게 다룬 것이 나타나서, 지금까지도 칭송을 한다. 갑신년에 북경에 갔었는데, 승상인 별가석화(別哥昔化)공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장차 천자에게 추천하려 했는데, 불행히 병에 걸려서 을유년 가을 7월 14일에 객지 여관에서 죽었다. 첨서(簽書 공권(公權))가 이때 나이가 13세였는데 널을 받들고 돌아왔다. 나의 아버지 가정공(稼亭公)이 그를 곡했는데, 그 시에, “걱정이 많고, 마음을 슬프게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대체로 이때에 같이 객지에 있으면서 잠시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반드시 본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글씨가 일대의 명필이었다. 우리 집 병풍에 쓴 8폭을 신축년 겨울에 버리고 갔으니 아깝다. 부인이 일찍이 홀로 되어 아들을 엄하게 가르쳤고, 나이가 70이 다 됐는데도 더욱 건강하다. 첨서는 어려서는 병이 잦았는데 자라면서 차츰 의학에 통하여 능히 몸에 나쁜 것을 제거하며 원기를 도와서 나이가 50이 다 되는데 정신과 광채가 피어났다. 아마 만물을 창조한 이가 설곡이 불행하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기어 첨서에게는 후하게 하려는 것인 듯하다. 첨서는 나와 같은 해에 급제하였고, 또 일찍 간관으로 있었으므로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대략 차례대로 서술하여 역사를 기록하는 이에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