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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송 백운빈 환도서(送白雲賓還都序)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8:32

서(序)
 
 
송 백운빈 환도서(送白雲賓還都序)
 

우리 서울이 중국 서울과 거리가 겨우 4천 리 밖에 되지 않고, 또 가는 길이 위험하거나 경삽(梗澁)한 염려가 없으므로 급히 달리는 역마(驛馬)가 줄을 이어 상인 나그네들의 걸음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는데, 유독 벼슬길에 노니는 자가 오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본경(本京)에 비록 성(省)을 두었지만 국왕과 승상이 스스로 거느리고 또 그 요속으로 조정에서 명령을 받은 자도 다 스스로 불러 쓰는 것이요, 그 나머지 내외 관원들도 아울러 본국의 구제(舊制)에 따르고 있으니, 중원의 사대부는 올 길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번 이부(吏部)에서 관원이 많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비로소 유학 교수(儒學敎授)를 왕경(王京)에 보내어 이미 몇 사람이 되었다.
여양(?陽) 백운빈(白雲賓)은 젊어서 유업(儒業)에 종사하여 일찍이 광녕학정(廣寧學正)을 거쳐 도하(都下)의 유관(儒官)이 되었다. 지원(至元) 정축년에 왕경의 교수에 제수되어 도당(都堂)에 고하고 전례에 의하여 역마를 타고 부임하였다. 당도하자 국중에 집을 두고 제생을 불러들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을 가르쳐서 인재를 육성하다가 경진년 겨울에 임기가 차고 또 대직(代職)이 있음을 듣고서 승상부를 하직하고 날을 정하여 떠나기로 하니, 제생이 만류하고자 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내가 운빈보다 수개 월 뒤져서 동성(東省)에 참좌(參佐)하여 관도 또한 만기되었으나 오히려 서성대며 떠나지 못한 것은 제 땅이 그리워서였다. 나도 운빈을 따라가려 하면서 못 가는데 감히 제생을 위하여 만류할 수 있겠는가. 운빈이 떠날 때에 비록 상하(桑下)의 인연을 돌아다보는 생각은 없을지라도 또한 어찌 정이 없으리오. 이번 운빈의 걸음에 기증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
내가 이미 제군에게 시를 짓게 하고, 또 그 사실을 서술하기를, “이 세상의 유술(儒術)로 작위를 낚는 자들이 작위를 얻고 나면 시서(詩書)를 추구(?狗) 로 여기는 자가 있으며, 혹은 진취에 급급하여 변하여 다른 길로 가며, 혹은 늙도록 이룬 것이 없으면 도리어 신세를 그르쳤다고 이르는 자도 있는데, 운빈은 그렇지 않다. 관이 비록 현달하지 못하나 뜻은 변하지 않고 큰 옷과 넓은 띠로 그 처음 행동을 변함이 없으며, 아침에 풋나물과 저녁에 소금죽이 옛날과 다름 없지만 하는 말이, ‘부귀는 하늘에 있고 궁하고 달하는 것은 운명에 있으니, 유자가 어찌 이에 관여하겠는가?’ 하며, 지금 이 나라에 있을 적에도 풍속은 같지 않고 봉급도 넉넉지 못하지만, 태연하여 뜻에 불만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순순히 사람을 가르쳐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이야말로 존경할 만한지라 어찌 글로 써서 증별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주D-001]상하(桑下)의 인연 : 부도(浮屠)가 같은 뽕나무 아래에서 3일 밤을 묵지 않고 떠나간다고 한다. 애정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주D-002]추구(?狗) : 풀을 묶어서 개[狗]를 만든 것으로 무축(巫祝)의 사용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