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선생글 ▒

서(序) 기 박지평시서(寄朴持平詩序)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8:31

서(序)
 
 
기 박지평시서(寄朴持平詩序)
 

전 감찰지평(監察持平) 박윤문(朴允文) 질부(質夫)는 선대가 밀성군(密城郡)에서 살았는데, 그 형 중랑장(中郞將) 윤겸(允謙)이 인척의 관계로 복주(福州)에 살면서 대부인을 맞아들여 봉양하였다. 지원(至元) 무인년 8월에 대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곳에서 장사하니, 지평(持平)이 묘소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흙을 모으고 나무를 심으며, 또 예(禮)를 읽는 겨를에 염불(念佛)도 하고 사경(寫經)도 하여 명복을 빌면서 그 상기(喪期)를 마쳤다. 복주는 경상도에서 큰 고을이 되어 빈객이 많이 내왕하는데, 그 사이에 무릇 알고, 모르고 간에 복주를 경유하는 자는 반드시 점전(?前)에 나아가 위문하고 서울로 돌아오게 되면 칭찬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예전 신유년에 복주의 막관(幕官)이 되어 중랑(中郞)과 면식이 있었고, 신미년에 예문관에 들어와서 지평의 뒤를 이었으니, 박씨 형제와는 매우 익숙한 처지이므로 한번 책(冊)을 지고 가서 추향(?香)을 올리려고도 하였으나, 워낙 멀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친구들에게 물어서 가시(歌詩)에 의탁하여 그 감모하는 정을 부치며, 이에 이르기를, “효도라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당연히 할 바이므로, 옛날에는 하지 못하는 자를 가르쳤을 따름이요, 능한 자를 상 주지는 아니했는데, 후세에 와서 효행이 출중한 자가 있으면 관에서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었으니, 여기에서 풍속이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본국의 제도에는 부모의 묘소를 3년동안 지킨 자에게는 정문을 허락하게 되어 있으며 평소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그래서 근세의 사대부가 흔히 자기 집 종을 시켜서 대신 여묘살이를 하고, 끝마치면 종의 신분을 해방시켜서 임의로 떠나게 하니, 그 때문에 종살이 하는 자들은 다투어서 하려고 한다. 무릇 소인이 이득에 급급한 것이 마치 군자가 의리를 중히 여기는 것과 같으니,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이 어찌 종들이 상전을 사랑하는 것만 못하겠는가? 다만 습속에 끌리어 못하는 것이다. 지평은 평소에 그 어버이를 봉양하여 지극하지 않은 바 없었고, 어버이가 돌아가자 능히 예로써 장사하고, 장사하고서도 능히 일정한 상기를 마쳤으며, 또 능히 시묘하여 애도를 극진히 하였으니, 그 박한 습속을 도탑게 하고, 무너진 풍교를 격동한 것이 많았다.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하면서 중(中)을 지키기 위해 상기(喪期)는 3년을 지나지 못하게 하였다. 지평은 상기(祥期)가 이미 가까웠으므로 거문고를 타는 저녁이 되어 우리들의 시를 노래한다면 비록 자로(子路)의 용맹으로도 감히 비웃지는 못할 것이다.


[주D-001]추향(?香) : 생추(生芻)와 향을 말한 것인데, 영전(靈前)에 올리는 예물임. 동한(東漢) 사람 서치(徐穉)가 곽림종(郭林宗)의 모친상에 가 조문하면서 생추(生芻) 한 묶음을 올리고 갔다.
[주D-002]거문고를 …… 저녁 :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공자(孔子)가 대상(大祥)을 지낸 5일만에 거문고를 타는데 소리가 나지 않더니 10일만에 피리 불고 노래하니 소리가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