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송 게리문서(送揭理問序)
법이란 것은 그 정사를 행하기 위한 것이니, 인정과 법을 병용하는 것이 또 정사의 최선이다. 성조(聖朝)가 흥기하여 미처 법을 제정하지 못하다가 지원(至元)에 신격(新格)이 나오고 지치(至治)에 통제(通制)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관리는 지키는 바가 있고, 백성은 피할 바를 알게 되었다. 우강(?江) 게이충(揭以忠)은 세상에 이름난 유가(儒家)로서 문장과 기예를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고, 더욱 형명(刑名)의 학에 능하니, 정동성(征東省)의 전 승상이 진작 그 재주를 알고 들어서 조정에 아뢰어 지원 정축년에 본성(本省)의 이문(理問)에 제수되고, 나도 그때에 막관(幕官)으로 등용되어 같은 날에 부임하였다.
게(揭)군이 나더러 말하기를, “정사가 여러 문(門)에서 나오게 되면 백성이 명령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방금 사해(四海)가 한 집안이 되었는데 어째서 중국의 법이 이 나라에 행하지 못하는가.” 하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고려는 옛날 삼한의 땅으로 풍기와 언어가 중국과 같지 아니하며, 의관과 전례(典禮)가 스스로 하나의 법이 되어 있어, 진(秦)ㆍ한(漢) 이래로 능히 신하를 삼지 못했는데, 지금 성조에 있어서는 친(親)으로 말하면 구생(舅甥)이 되고, 은혜로 말하면 부자와 같으니, 민사(民社)ㆍ형정(刑政)은 다 옛것을 인습하게 하고, 이치(吏治)는 관계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일국의 명령과 일성(一省)의 권병(權柄)을 총괄하여 전임하므로 국왕 승상(國王丞相)이라 칭하니, 그 우대하는 은혜와 부탁의 중함이 어떻다 하겠는가. 요즈음 와서는 국법이 점점 해이해지고 민풍이 더욱 효박하여 자기끼리 서로 혼란을 꾸미고 다투어 고발하기를 일삼으니, 성리(省吏)의 통제(通制)를 집행하는 자는 말하기를, ‘온 천하가 왕토(王土) 아닌 곳이 없다.’ 하고, 국신(國臣)의 구법을 지키는 자는 말하기를, ‘세조황제의 유훈이 그 나라의 토풍(土風)은 고치지 말라고 되어 있다.’ 하여, 이에 저기를 벗어나서 여기로 들어오고 경한 데로 나아가며 중한 것을 버리어 다 주장하는 바 있으므로, 어디로 적당히 따라갈 바를 모르는 형편이다. 법의 행하지 못하는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군은 이르기를, “그렇다. 나는 이미 명을 받은 것이 있으니, 오직 법을 받들어 행할 따름이다.” 하더니, 이윽고 조리가 매우 분명하고 청탁이 행해지지 아니하며 서리는 사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아 백성들이 그 공변됨에 복종하였다. 요컨대, 조정의 대체를 잃지 아니하고 본국의 옛 풍속을 동요시키지 아니한 것이니, 인정과 법을 아울러 쓰는 것을 나는 군에게서 보았다. 금년 겨울에 임기가 차고 또 어버이가 늙어감을 생각하여 문득 돌아갈 뜻을 두니 군을 아는 자는 모두, “마땅히 시(詩)가 있어야 한다.” 하여,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나는 앞에 한 말을 써서 떠나가는 그에게 주고 인하여 부탁하는 것이다. 영형(令兄) 집현공(集賢公)이 당시 유림(儒林)의 종장이 되어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는데 나는 그 문하에 출입하여 동(東)으로 돌아오는 날에 그 교훈을 받들고 주야로 잊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나는 공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다. 군이 돌아가거든 행여 나를 위하여 감사를 드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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