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청풍정 기(淸風亭記)
지정 기축년 여름 4월에 근친(覲親)하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머물렀다. 광주 목사(廣州牧使) 백군(白君) 화보(和父)가 편지를 가지고 달려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관사(官舍) 북쪽에 옛날 청풍정 터를 얻어서 네 기둥으로 된 집을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승경(勝景)이니, 청컨대 기(記)를 지어달라.” 하였다. 내가 가는 길이 바빠서 회답하기를, “뒤에 서울에 갈 것이니, 한 번 그 곳에 가서 구경한 뒤에 기를 지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이듬해에 광주에 이르니, 백군은 이미 소환되고 이군(李君) 아무개가 대신하여 부임한 지가 반 년이나 되었다. 그 때는 혹독하게 더워서 숨쉬는 것이 실낱 같았다. 마침내 이른바 ‘청풍정’이라는 곳에 올라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옷깃을 헤치니, 정신이 맑고 시원하고 머리가 나부껴 마치 매미가 시궁창에서 껍질을 벗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이군이 술을 내며 조용히 말하기를, “네 기둥의 체제가 간단하기는 하나 아침 저녁 햇볕이 동서쪽으로 비추어 앉아 있는 손님이 좋지 않게 여기므로, 내가 양 옆에 처마를 달고 남쪽 추녀를 만들어 각각 5천씩 하고 북쪽도 그와 같이 하니 조금 넓어지고 또 깊어졌다. 흙손질을 끝내고 단청을 하려 하는데 자네가 마침 이르렀으니, 어찌 술잔을 들어 낙성하고 세월을 써서 기록하지 않으리요.” 하였다. 내가 이미 백군에게 허락한지라 정자가 없어진 지가 몇 해인가 물으니 부로(父老) 중 아는 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없어진 것을 지은 것은 실상 새로 창건한 것과 같다. 《춘추(春秋)》에, “작(作)을 쓰고 지을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도 있고, 또 “노 나라의 창고인 장부(長府)를 어찌 다시 고칠 필요가 있으랴.”하고 말한 것도 있으니, 성인이 가르침을 남긴 뜻이 은미하다. 내가 광주라는 고을을 보건대, 삼면은 모두 높은 산이고 북쪽은 비록 광활하고 머나 지세가 평평하고 낮아서 공청과 민가가 우물 밑에 있는 것 같으니, 빈객이 오면 차라리 낮고 비루한 것을 안타깝게 여길지언정, 몇 걸음 사이에 이처럼 시원하고 상쾌한 곳이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 정자를 지은 것은 깎아내리는 예(例)에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래서 쓴다. 청풍의 뜻은 백군의 말에 다하였으니 나는 다시 덧붙여 말하지 않는다. 백군은 나와 같은 해에 등과한 친구요, 이군은 뜻이 같은 친구이다. 정사를 하매 모두 청렴하고 부지런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경인년 중하(仲夏)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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