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동유기(東遊記)
이곡(李穀)
지정 9년 기축년 가을에, 금강산을 유람하려고 14일에 송도(松都)를 출발하여 21일에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밑 장양현(?陽縣)에서 자니 산과의 거리가 30여 리이다. 이튿날 일찍 조반을 먹고 산에 오르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어두웠다. 고을 사람이 말하기를, “풍악산(楓岳山)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구름과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번번이 있다.” 하였다. 동행들이 모두 걱정하는 빛이 있고 무언(無言) 중에 기도를 하였다.
산과의 거리가 5리쯤 되자 어두운 구름이 차츰 엷어지고 햇빛이 새어나오더니, 절재[拜岾]에 오르니 하늘이 개고 날씨가 맑아 산의 또렷함이 마치 칼로 긁어낸 듯, 이른바 1만 2천 봉(峰)을 뚜렷이 셀 만하였다. 이 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재를 경유하는데, 재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을 보려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이 재를, “절재”라 한다. 재에는 옛날에 집이 없었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쉴 곳을 마련했었다. 지정 정해년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이 천자(天子 원제(元帝))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해서 종각(鐘閣)을 지어 재 위에 달고, 그 곁에 절을 지어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여 우뚝한 금벽(金碧)의 빛이 설산(雪山)을 쏘니, 또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壯觀)이다. 낮이 못 되어 표훈사(表訓寺)에 이르러 잠깐 쉬었다. 한 사미(沙彌 동승(童僧))가 인도하여 산을 오르는데 그가 말하기를,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어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그리로 가는데 길이 험하고 깊으며, 서북쪽에 있는 정양암(正陽菴)은 태조(太祖 왕건(王健))가 창건(?建)한 절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존상(尊相)을 모신 곳으로 좀 높기는 하지만 비교적 가까와서 올라감직하며, 또 그 암자에 오르면 풍악산의 여러 봉우리들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음보살(觀音菩薩)이야 어느 곳엔들 안 계시랴. 내가 여기 온 것은 이 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자 함이니, 그 암자로 먼저 감이 어떠하냐.” 하였다. 이에 붙들고 기어서 올라가니, 과연 그의 말대로 매우 마음에 흡족하였다. 보덕관음굴에 가려 하였는데 날도 이미 저물어 가고 또 산속에서 묵을 수도 없기에, 신림(新林)ㆍ삼불(三佛) 등 여러 암자에 들러 시내를 따라 내려와 날이 저물어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 일찍이 산을 나오니, 철원(鐵原)에서 산까지가 3백 리인즉 서울과의 거리는 실로 5백여 리이다. 그러나 강이 거듭있고 고개가 첩첩하여 깊고 험절하니, 이 산에 출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의 이름이 불경(佛經)에 나타나 있고 천하에 널리 알려져 먼 건축(乾竺 인도(印度)) 사람도 때때로 와 구경하는 이가 있다.”한다. 대체로 보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니, 우리 나라 사람이 서촉(西蜀)의 아미산(峨眉山)과 남월(南越)의 보타산(補陀山)을 구경한 자가 있었으되 모두 말하기를, “들은 것만 못하더라.”한다. 나는 비록 아미산과 보타산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내가 본 이산은 실로 들은 바보다 나으니, 비록 화가의 재주와 시인의 재능으로도 비슷하게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23일에 장안사로부터 천마서령(天磨西嶺)을 넘어 또 통구(通溝)에 이르러 잤다. 모든 금강산에 들어가는 자는 천마의 두 고개를 경유하는데, 고개에 오르면 산이 바라보이므로 고개를 넘어 산으로 들어가는 자가 처음에는 험준한 것을 걱정하지 않으나, 산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본 뒤에야 길이 험난한 줄을 알게 된다. 서령은 조금 낮은데 오르고 내림이 30여리요, 몹시 험한 까닭에 발단령(髮斷嶺)이라 한다.
24일에 회양부(淮陽府)에 이르러 하루를 묵고, 26일에 철령관(鐵嶺關)을 넘어 복령현(福靈縣)에서 잤다. 철령은 우리 나라 동쪽의 요새이니, 이른바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만 명이라도 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개 동쪽의 강릉(江陵) 여러 주(州)를 관동(關東)이라 한다. 지원(至元) 경인년에 배반한 왕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哈丹) 등 적(賊)이 패하여 도망하여 동쪽으로 와서 개(開)ㆍ원(元) 여러 군(郡)으로부터 관동에 마구 들어오니, 나라에서 만호(萬戶) 나유(羅裕)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관을 지키게 하였더니, 적이 화주(和州)ㆍ등주(登州)의 서쪽 여러 주의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등주(登州)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을 척후(斥候)로 보내어 엿보니, 나공(羅公)이 적이 왔다는 말을 듣고 철령관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적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밟듯이 쳐들어와 온 나라가 들끓고, 인민이 그 해를 입어 혹 산성(山城)에 오르고 혹 해도(海島)에 들어가 그 적군의 칼날을 피하였다가 원 나라의 군사를 빌어 온 뒤에 섬멸(殲滅)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철령관의 험함은 참으로 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면, 비록 천만 명이 우러러 공격하더라도 어지간한 세월로는 들어갈 수 없을 터이다. 나공은 참으로 대담하지 못하였구나.
27일에 등주에 이르러 이틀을 묵으니, 지금은 화주(和州)라 한다. 30일에 일찍 화주를 떠나 학포(鶴浦) 어귀로부터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가 국도(國島)를 구경하였다. 국도는 해안(海岸)에서 10리 쯤에 있는데, 서남쪽 모퉁이로 들어간다. 물가에 흰 모래가 새하얀 비단을 깐 듯하고, 그 위에 평지(平地)가 5ㆍ6묘(畝)는 됨직한데, 모양이 구슬 반쪽 같고, 가운데에 집터가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이 살던 곳이다.”한다. 그 위에 산이 옥결(玉?)처럼 둘러 있는데, 산세(山勢)는 그리 높지 않으며 덩굴풀이 덮여 있고 나무도 없으니 그저 한 개의 흙언덕이다. 배를 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석벽(石壁)과 언덕이 차츰 달라진다. 그 석벽의 돌은 직방체(直方體)로 나란히 우뚝 서 있고, 그 언덕의 돌은 다 둥글게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이 앉을 수 있으나 가지런하지 않다.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높이가 수백 척쯤 되는데 그돌이 흰 빛이고, 바르고 곧으며 장단(長短)이 똑 같으며,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각각 한 개의 작은 돌을 이고 있어 마치 화표주(華表柱)의 머리 같은데, 머리를 들어 쳐다보매 아슬아슬 떨리고 놀라왔다. 작은 굴(窟)이 하나 있기에 배를 삿대질하여 들어가니, 점점 좁아져 배를 댈 수 없고, 굴을 들여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좌우에 묶어선 돌이 외면(外面)과 같되 더욱 가지런하고 그 위에 돌고 드름이 늘어진 것이 다 반듯하여 바둑판을 엎은 듯, 마치 한 톱으로 잘라 놓은 것 같으니, 이로 본다면 외면만이 이러할 뿐 아니라, 온 섬이 하나로 묶어진 모난 돌줄기이다. 그 굴이 깊고 험하여 정신이 떨려 오래 머무르지 못하겠기에 배를 돌려 북쪽으로 가니, 또 병풍을 두른 것 같은 한 면이 있다. 배를 버리고 내려가 서성거리며 만져보니 대개 돌이 굴과 다름이 없는데, 석벽이 그리 높지 않고 그 밑은 차츰 평이(平易)한데 둥근 돌이 널찍이 배열되어 천 명이 앉을 만하다. 구경 온 사람들이 반드시 여기에 앉아서 쉬되, 누가 머물러서 술을 마시면 풍파가 인다하며, 또 화식(火食)하는 자가 머물 곳도 아니라 한다. 석벽 옆으로 끼고 동남쪽으로 또 수백 보를 가니 석벽의 돌이 차츰 달라지는데, 네모난 철망(鐵網)을 이루어 물을 담아 조그만 둥근 돌을 가는데 길이는 5ㆍ6척이요, 줄기마다 똑 같이 한면이 다 그러하니 사람들이 철망석(鐵網石)이라 이른다. 이것이 국도(國島)의 대강의 경치인데, 그 기이한 모양은 도저히 글이나 말로는 그려낼 수 없으니, 참으로 조물주가 이처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포구로 돌아와 술을 들며 서로들 치하하였으니, 하나는 승경(勝境)을 보아서이고, 하나는 풍랑이 일지 않아서이다. 포구로부터 배를 저어 이른바 학포(鶴浦)라는 곳에 들어가 원수대(元帥臺)에 오르니, 백 이랑의 맑은 호수에 한 점 외로운 섬 또한 일대 기이한 장관이었다. 날이 저물어 머무를 수 없어 현관(縣?)으로 돌아와 잤다.
9월 초하룻날에 흡곡현(?谷縣) 동령(東嶺)을 넘어 천도(穿島)에 들어가려고 그 형상을 물으니, 섬에 구멍이 있어 남북으로 통하는데 풍랑이 서로 드나들 뿐이라 한다. 그러나 천도로부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총석정(叢石亭)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8ㆍ9리이고, 또 총석정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면 금란굴(金蘭窟)에 갈 수 있는데, 그 사이가 또 10여 리인데, 주중(舟中)의 승경(勝景)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다. 이 날에 약간 바람이 불어 배를 탈 수 없어서 굴(窟)과 섬에 들어가지 않고 해변을 따라 총석정에 이르니, 애주수(崖州守) 심군(沈君)이 정상(亭上)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바 사선봉(四仙峰)이란 것은 그 돌이 묶여 서 있고 그 줄기가 반듯하고 곧은 것은 대개 국도(國島)와 같은데, 다만 그 빛이 붉고 그 석벽(石壁)의 돌이 울퉁불퉁 가지런하지 않을 뿐이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니 네 봉우리가 따로 따로 우뚝 솟아 있고 절벽이 깎아지른 듯 동쪽 바다 만 리를 바라보고 서령(西嶺) 천겹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 실로 관동(關東)의 장관이다. 옛날엔 비(碑)가 석벽 위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보이지 않고 유적이 있을 뿐이다. 또 동봉(東峰)에는 옛 비갈(碑碣)이 있는데, 표면이 떨어지고 닳아져 한 글자도 알 수 없으니, 어느 시대에 세운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新羅) 때에 영랑(永郞)ㆍ술랑(述郞) 등 네 선동(仙童)이 그의 무리 삼천 명과 바닷가에서 놀았다.” 하니, 이 비갈을 그 무리가 세운 것일까. 역시 상고할 수 없다. 사선봉(四仙峰)에 가니 작은 정자가 있기에 그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해가 늦어서야 통주(通州)에 이르러 잤다.
통주는 옛날의 금란현(金蘭縣)으로 옛 성(城) 북쪽 모퉁이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사람들이 금란굴이라 하며 관음보살이 머문 곳이라 한다. 다음 날 배를 타고 들어가 바라보니 어렴풋이 보살의 형상 같은 것이 굴 안에 있는데, 그 굴이 깊고 또 좁아서 들어갈 수 없었다. 뱃사공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에 산 지 오래입니다. 위로는 원나라 조정의 사화(使華)와 본국의 경사(卿士)들, 방백(方伯)ㆍ수령(守令)들로부터 아래로는 유람객들에 이르기까지 귀천을 막론하고 반드시 이 곳을 구경하려 하여 매양 저로 하여금 배로 인도하게 하옵기에 제가 실로 귀찮게 여겨 일찍이 조그만 통나무배를 만들어 혼자 굴 안으로 들어가 맨 끝까지 보고 나왔사온데,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기에 손으로 만져 보니 하나의 이끼가 낀 돌 뿐이었나이다. 그러나 나와서 돌아보니 또 무슨 형상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아, 저의 정성이 부족한 때문입니까. 혹은 마음 속에 늘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인 듯 보인 것입니까.”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상당히 이해되는 바가 있었다. 굴 동쪽에 석지(石池)가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음보살이 목욕하는 곳이라 하며, 또 바윗돌이 뾰족뾰족한데 그 크기는 사방 한 치쯤 되며 넓이는 몇 묘(畝)나 되고 모두 한편으로 기울어졌는데, 사람들이 통족암(痛足岩)이라 이른다. 관음보살이 발로 밟아 아팠으므로 바위가 그 때문에 기울어진 것이라 한다. 금란(金蘭)으로부터 임도현(林道縣)에 이르러 잤다.
3일에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렀다. 통주로부터 고성까지는 1백 50리인데 실로 풍악산의 등으로 그 산은 깎아 지른 듯 험절하여 사람들이 외산(外山)이라 부른다. 이 산은 내산(內山)과 기이함을 다툴 만하다. 그 동남쪽에 유점사(楡岾寺)가 있는데, 그 절에는 큰 종과 53불(佛)의 동상(銅像)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라 때에 53불이 이 종을 타고 서천축(西天竺 인도(印度))에서 바다에 떠서 와 고성(高城) 해안에 정박했다가 다시 유점에 와서 머물렀다.” 한다. 고성 남쪽에 게방촌(?房村)이 있으니 실로 그것이 산록(山麓)이다. 게방에서 60리를 올라가면 유점사에 이른다. 내가 처음에 동행자들과 반드시 유점사에 가서 이른바 종과 불상을 보리라 약속하였는데, 오는 길이 이미 멀고 험하여 말들이 다 등창이 나고 발굽이 아파 혹 뒤쳐지는 자가 생겨 다시 산에 오르지 못하였다.
4일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三日浦)에 이르렀다. 삼일포는 성북쪽 5리 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활처럼 생긴 하나의 큰 돌이다. 그 꼭대기에 돌감실이 있고 그 안에 석불(石佛)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彌勒堂)이다. 그 석벽 동북쪽에 여섯 글자 붉은 글씨가 있기에 가서 보니, 두 줄에 석 자씩 썼는데 그 글에, “술랑도 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 하였다. 그 술랑남석 네 자는 아주 분명하나, 그 아래 두 자는 희미하여 알아볼 수 없었다. 옛날에 고을 사람들이 유람하는 사람들을 대접하기가 괴로와서 쪼아 버릴 때 깊이가 5치쯤에 이르렀는데도 자획(字?)이 없어지지 않았다 하니, 지금 두 자가 분명치 못한 것은 대개 그 때문이다.
이윽고 배를 돌려 사선정(四仙亭)에 오르니, 이 또한 호수 가운데의 한 섬이다. 난간을 의지하여 빙 둘러보니, 이른바 36봉의 그림자가 호수 한 가운데에 거꾸로 되어 있는데, 호수는 백 이랑쯤 되고 맑고 깊고 넘실거려 실로 관동의 승경(勝境)으로 국도에 다음갈 만하다. 그 때에 마침 군수(郡守)가 없어 그 고을의 아전이 조촐한 술자리를 차렸는데, 혼자 마실 수 없어서 배를 명하여 나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호수가 사선(四仙)이 놀고 간 36봉이라 하며, 봉우리에는 비(碑)가 있던 것을 호종단(胡宗旦)이 모두 가져다 물속에 넣었다. 지금도 그 대석(臺石)이 여전히 남아 있다.”한다. 호종단이란 자는 이승(李昇)으로 당 나라 사람인데 우리 나라에 와서 벼슬하여 5도(道)를 순찰하면서, 가는 곳마다 번번이 비갈(碑碣)을 가져다가 혹은 그 글자를 긁어버리고, 혹은 부수고, 혹은 물속에 넣었으며, 종(鍾)ㆍ경(磬)으로 이름 있는 것들도 혹 쇠를 녹여 틀어막아 소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한송정(寒松亭)ㆍ총석정(叢石亭)ㆍ삼일포(三日浦)의 비(碑)와 계림부(鷄林府) 봉덕사(奉德寺)의 종들에서 볼 수 있다. 사선정(四仙亭)은 박군(朴君) 숙정(淑貞)이 존무사(存撫使)로 있을 때 세운 것으로 좌주(座主)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이 기(記)를 지었다. 삼일포로부터 성남하(城南河)를 건너 안창현정(安昌縣亭)을 지나 명파역(明波驛)에서 잤다.
5일에 고성(高城)에서 자고 하루를 묵었다. 7일에 주인(主人)이 선유담(仙遊潭) 위에 술자리를 베풀어 약간 마시고 청간역(淸澗驛)을 지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조금 마시고 인각촌사(仁覺村舍)에서 잤다.
8일에 영랑호(永郞湖)에 배를 띄웠다. 해가 저물어 근원을 다 가보지 못하고 낙산사(洛山寺)에 이르러 백의대사(白衣大士)를 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관음보살이 머무르는 곳이다.” 하는데, 산 아래에 구멍이 있으니, 그것이 관음보살이 들어가는 곳이라 한다. 늦게 양주(襄州)에 이르러 잤다.
다음날 중구일(重九日)에 또 비가 와서 국화 술을 누각 위에서 마셨다.
10일에 동산현(洞山縣)에서 잤는데, 관란정(觀瀾亭)이 있었다.
11일에 연곡현(連谷縣)에서 잤다.
12일에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 성산(星山) 이군(李君)이 경포(鏡浦)에서 기다려주어 두 척의 배를 타고 중류에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날이 기울기 전에 경포대(鏡浦臺)에 올랐다. 대(臺)에는 전에는 집이 없었는데, 요즈음 호사자(好事者)가 정자를 지었으며, 그 위에 옛날 신선의 돌풍로가 있으니, 이는 차를 달이는 도구이다. 삼일포와 더불어 경치가 막상막하(莫上莫下)로되 명확하고 심원하기는 그보다 낫다. 비가 와서 하루를 묵고, 강성(江城)을 나와 문수당(文殊堂)을 구경하니, 사람들의 말이 문수(文殊)ㆍ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이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으나, 호종단이 물속에 넣어버리고 오직 귀부(龜趺)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송정(寒松亭)에서 전별주를 마시니, 이 정자 또한 네 신선이 노닌 곳인데, 고을 사람들이 유람자(遊覽者)가 많음을 귀찮게 여겨 집을 헐어 버렸고, 소나무도 들불에 타버렸으며, 다만 돌풍로ㆍ석지(石池)와 두 개의 돌우물이 그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 역시 네 신선의 다구(茶具)이다. 정자를 지나 남쪽으로 가니, 안인역(安仁驛)이 있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고개를 넘을 수 없어 거기에서 유숙하였다.
이튿날 일찍 떠나 역을 지나니 동봉(東峰)이 매우 험하였다. 등명사(燈明寺)에 이르러 일출대(日出臺)를 구경하고, 드디어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강촌(江村)에서 쉬고 고개를 넘어 우계현(羽溪縣)에서 잤다.
12일에 삼척현(三陟縣)에서 잤다.
이튿날 서루(西樓)에 올라 이른바 50천(川) 팔영(八詠)이란 곳을 마음대로 구경하고 나와서 교가역(交柯驛)에 이르니, 역은 현의 관아와 30리가 떨어져 있는데, 15리 지점의 바다를 임한 절벽 위에 원수대(元帥臺)가 있으니 이 또한 절경이었다. 그 위에서 약간 마시고 드디어 역사(驛舍)에서 잤다.
18일에 옥원역(沃原驛)에서 잤다.
19일에 울진(蔚珍)에 이르러 하루를 묵었다.
21일에 일찍 떠났다. 울진현 남쪽 10리에 성류사(聖留寺)가 있다. 절이 석벽 밑 장천(長川) 가에 있는데, 절벽의 돌이 깎아지른 듯 천 척이요, 절벽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성류굴(聖留窟)이라 이른다.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또 어둑컴컴하여 촛불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절의 중을 시켜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또 고을 사람 가운에 많이 출입한 자에게 앞서고 뒤따르게 하여 들어가 보았다. 구멍 어귀는 좁으나 4ㆍ5보쯤 기어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며, 일어나 또 몇 걸음을 가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세 길쯤 솟았는데, 사다리로 내려가니 점점 평탄하고 넓어지며, 수십 보쯤 가니 평지가 있어 몇 이랑이 됨직 한데 좌우의 돌 모양이 이상야릇하고, 또 10보쯤을 가니 구멍이 있는데 구멍 어귀보다 더 좁았다. 엎드려 가니 그 아래는 흙탕물이 있었는데 자리를 깔아 습기를 막았다. 또 7ㆍ8보를 걸어 가니 조금 널찍한데 좌우의 돌이 더 이상야릇하여 혹은 당번(幢番)과도 같고 혹은 부도(浮圖 탑(塔))와도 같다. 또 십수 보를 가니, 돌이 더욱 기괴하고 그 모양이 더욱 여러 가지여서 이루 기록할 수 없으며, 그 당번과 부도 같은 것도 더욱 길고, 넓고, 높으며 크다. 또 4ㆍ5보를 가니 불상 같은 것도 있고, 고승(高僧) 같은 것도 있으며, 또 못물이 있어 매우 맑은데 넓이가 몇 이랑쯤 된다. 가운데에 두 개의 돌이 있는데 하나는 수레 바퀴통 같고 하나는 단지 같으며, 그 위와 곁에 드리워진 번개(幡盖)는 모조리 오색이 찬란하다. 처음 생각엔 석종유(石鐘乳)가 엉긴 것이어서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리라 여기고 지팡이로 두들기니, 각각 소리가 나고 그 장단(長短)을 따라 청탁(淸濁)이 있어 마치 편경(編磬)과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하나, 나는 이곳은 세속 사람이 함부로 구경할 곳이 아니라고 여겨 어서 나가자고 하였다. 그 양 옆에 구멍이 많은데 사람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한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도 그 끝까지 가 본 자가 없습니다. 혹자는 ‘평해군(平海郡) 바닷가에 닿는다’고들 합니다.” 하니, 대개 여기서 20여 리이다. 처음 들어갈 때 검고 더러울까 하여 아이종의 옷과 건(巾)을 빌려서 들어갔다가, 나온 뒤에 옷을 바꿔 입고 세수하고 양치하니 마치 꿈에 화서(華胥)에서 노닐다가 화들짝 깬 듯하였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조물주의 오묘함을 대부분 헤아릴 수 없다고 여겼는데, 내가 국도(國島)와 이 굴에서 더욱 그런 줄을 알았다. 그것이 자연히 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자연이라 한다면 그 기변(機變)의 교묘함이 어찌 이렇듯 지극하며, 일부러 만든 것이라면 아무리 귀공(鬼工)이나 신력(神力)으로 천만세(千萬世)를 다하였기로서니 또한 어떻게 이런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는가. 이날 평해군에 이르렀는데, 군에 이르기 5리 전에 소나무 만 그루가 있고, 그 가운데 정자가 있어 월송정(越松亭)이라 한다. 네 신선이 노닐다가 우연히 이 곳에 들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한다. 평해군이란 곳은 강릉도(江陵道)의 남쪽 경계로, 북쪽 철령(鐵嶺)으로부터 남쪽 평해까지 대개 1천 2백여 리이다. 평해 이남은 곧 경상도의 경계로 내가 일찍이 갔다 온 곳이기에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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