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영해부 신작 소학 기(寧海府新作小學記)
예주(禮州)의 소학(小學)은 장서기(掌書記) 이천년(李天年)이 지은 것이다. 이군이 부(府)에서 보좌관으로 있으면서 제생(諸生)을 보고 말하기를, “본국의 향교제도는 사당과 학교가 한 집 안에 있으니, 무례한 행동에 가까운데다가 또 여러 아이들을 끌어들여서 대성전 뜰이 떠들썩하게 하니, 무례하기가 더욱 심하다.”하고, 마침내 제생과 같이 부로(父老)들과 상의하여 부의 동북쪽에 땅을 정하고 농사 틈에 부역을 시켜서 며칠이 안 되어 완성되었다. 가운데를 전당(殿堂)으로 하여 노사구(魯司寇)의 상(像)을 모시고 좌우에 낭무(廊?)를 지어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곳으로 삼았으니, 낭무와 담이 높고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였다. 이에 제생 중에서 조금 장성한 자를 뽑아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고, 이군이 하루에 한 번씩 가서 그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상고하여 권하고, 징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더위와 장마에도 조금도 게을리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입에서 젖을 뗀 자식들까지도 모두 취학시켰다. 1년이 지난 뒤에 군이 전(箋)을 받들어 정해년 정단(正旦)를 하례하러 서울에 이르자, 교관(敎官) 중에 결원이 있어서 이군을 성균학유(成均學諭)에 임시로 전보(塡補)하였다. 어느날 길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온 영해의 제생을 만나서 말하기를, “자네 부(府)의 소학(小學)이 그 규모는 이미 이루어졌으나, 그 집을 때때로 수리하지 않으면 쓰러지고 무너지기가 쉬우니, 자네는 마땅히 글을 좋아하는 자에게 부탁하여 그 본말을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보여서 이루어진 공을 실추시킴이 없게 하라.” 하였다. 제생이 드디어 와서 내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본국에 문풍(文風)이 떨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대개 공리(功利)를 급한 일로 삼고 교화를 나머지 일로 삼아 왕궁(王宮)ㆍ국도(國都)로부터 각 고을에 미치기까지 학교가 모조리 폐지되어 없어지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군이 능히 여기에 뜻을 두었으니, 먼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하겠다. 다만 소학의 법규에 마땅히 무슨 글을 읽어야 하며 무슨 일을 익혀야 하는지를 모를 뿐이다. 만일 구두(句讀)만 익히면 그만이라 한다면 쇄소(灑掃)ㆍ응대(應對) 진퇴(進退)의 절차를 물을 것이 무엇 있으며, 글과 글씨만 공부하면 족하다 한다면 예(禮)와 음악과 활쏘기ㆍ말타기ㆍ글씨체를 알기ㆍ셈하기에 대한 글은 배울 것이 무엇 있겠는가. 이것은 시골 풍속과 학문이다. 나는 제생을 위하여 부끄럽게 생각한다. 제생은 힘쓸지어다. 그 집의 흥하고 폐하는 것은 마땅히 그 책임을 맡을 자가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는다. 지정 7년 5월 16일에 기록한다.
[주D-001]노사구(魯司寇) : 공자(孔子)를 말하니, 공자가 노 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벼슬을 하였으니 지금의 법무장관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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