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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허정당 기(虛淨堂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57

기(記)
 
 
허정당 기(虛淨堂記)
 

순암(順庵) 삼장공(三藏公)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에 편액(扁額)하기를 허정(虛淨)이라 하였다. 손님 중에서 묻기를, “공은 비록 머리를 깎았으나 의관(衣冠)을 갖추고 비단옷을 입는 습관이 있고, 공이 비록 명예를 피하나 조정에서 포양하고 존중하는 칭호가 있고, 나오면 궁중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경상(卿相)들과 교제하고, 들어가면 선비와 중들의 손과 벗의 즐거움이 있으며, 부엌이 풍족하고 깨끗하고 마루와 문이 맑고 조용하여 혹 참선하고 염불하는 여가에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며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고금(古今)의 일을 헤아려 생각하고 고증하며, 흥(興)이 나면 큰 글자를 말[斗] 만하게 쓰고 시를 써서 종이에 가득하며, 인사하는 것과 얘기하고 웃고 하는 데까지도 인정에 맞도록 힘써서 화한 기운이 풍기는 곳마다 모두 만족하여 얻은 것이 있는 것 같으며, 손 중에 마시기를 좋아하는 자는 문득 술로 취하게 하기를 여산(盧山)의 옛 일과 같이 하니, 비록 세상의 부귀를 누리고 일을 좋아한다고 일컫는 자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 허정(虛淨)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공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으니, 함께 놀던 가정(稼亭) 이자(李子)가 옆에서 대답하기를, “손이 어찌 그 뜻을 알랴. 저 빈 것은 가득찬 것의 상대이고,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이 변한 것이다. 모든 물건의 이치가 가득찬 것에서 빈 데에 이르고, 더러운 것으로 말미암아 깨끗한 데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의 일로 말한다면 군신 부자는 윤리(倫理)의 실(實)이고, 거처ㆍ의복ㆍ음식은 살고 기름[生養]의 실이고, 가까이 몸에서 취하면 형기(形氣)의 실은 신체와 털과 살이 그것이고, 정욕의 실은 소리와 이익과 재물과 미색이 그것이다. 그 한 몸의 사리(私利)를 경영하고 만물의 오는 것을 대응할 때에 그 몸이 지쳐 병들게 하고, 그 사려(思慮)를 애태워서 은혜와 원수를 서로 맺는 것이 기름과 불이 달이는 것, 얼음과 숯불이 사귀는 것, 아교와 칠이 합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니, 그 깨끗한 것을 더럽히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세력이 궁하고 사리가 극도에 달하게 되면 시들어 떨어지고 휑하게 비어서 얼음이 녹듯 하고 구름이 흩어지듯 하여 몸도 오히려 보전할 수가 없게 되는데, 더구나 외물(外物)이겠는가. 오직 통달한 사람이어야만 물(物)에 구애되지 않고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 그대로 맡겨서 그 극진함을 기다린다. 극진하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 참으로 빈 것과 참으로 깨끗한 것은 그 속에 있지 않음이 없으니, 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일찍이 공에게서 들으니, ‘사람은 근본을 몰라서는 안 된다. 편안히 거처하여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 것은 임금이 준 것이 아닌가. 옷과 밥이 오는 곳을 생각하면 가시 같이 가시가 등에 있고, 고기 가시가 목구멍에 있는 것 같아서 날마다 할 일이 오직 임금의 복을 축원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인도하고 도와주어서 성취시키는 것이 스승의 은혜가 아닌가. 종교를 붙잡아 유지하고 산문(山門)을 회복시키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다면 일이 끝나는 것이다. 낳아서 기르기를 애쓰는 것이 부모의 덕이 아닌가. 망극한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생각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비를 세워 공덕을 기록하여 무궁하게 전한다. 또 모든 얻는 것이 있으면 얻는 대로 보시(布施)하여 부처와 스님에게 공양하는 것과 경(經)과 장(藏)의 절차와 빈객의 받드는 것을 날마다 할 겨를이 없어서 많이 감추어진 더러운 것을 버려 다함이 없는 보장(寶藏)으로 돌려보내니, 어찌 세상의 강상(綱常)을 멸절(滅絶)하고 공적(空寂)에 속박(束縛)되는 것만 아는 자와 방불이나 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공이 세속을 떠나지 않고 능히 세상에 나가며 마음을 쓰지 않고 능히 마음을 보존한 것이 외물에게 변화되지 않은 것 뿐임을 알겠으니, 이러면 진기한 보물도 능히 사치스럽게 하지 않으며 환란도 능히 의혹시키지 못하며 성색도 능히 빠지게 하지 못할 것이니, 어디를 간들 허정(虛淨)이 아니겠는가. 만일 외물이 없어진 후에야 빈 것이 되고 때가 없어진 뒤에야 깨끗한 것이 된다고 하여 반드시 성시(城市)를 멀리하고, 기한(飢寒)을 참아서 자디잘게 힘을 쓰고 급급하게 마음을 닦는다면 내가 알기에는 그 도(道)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질 것이다.” 하고, 손에게 말하고 나서 이어 집 벽에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