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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소포기(小圃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59

기(記)
 
 
소포기(小圃記)
 

경사(京師)의 복전방(福田坊)에서 빌린 집에 공지(空地)가 있어 고쳐서 작은 채소밭으로 만들었는데, 길이는 두 길 반이고 넓이는 3분의 1이어서 가로와 세로 8ㆍ9규(畦 두둑)로 만들어 채소 몇 가지를 계절의 선후에 따라 번갈아 심으니, 족히 소금과 양념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만하였다. 첫 해에는 비오고 볕나는 것이 제때에 맞아서 아침에 떡잎이 나면 저녁에 새잎이 나와서 잎이 윤택하고 뿌리가 기름져서 아침마다 캐어도 다하지 않으므로 나머지를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태 되는 해에는 봄과 여름이 조금 가물어서 항아리로 물을 길어다가 부어 주어도 마치 타는 불에 물을 붓는 것 같아서 심어도 싹이 트지 않고 싹이 터도 잎사귀가 나오지 못하고, 잎이 나도 피어나지 못하여 벌레가 다 먹어 버렸으니, 감히 뿌리를 바랄 수가 있으랴. 얼마 뒤에 장마가 져서 가을 늦게야 개어 흙탕물에 빠지고 진흙 모래를 뒤집어 쓰고 담 밑에 있는 땅은 모두 무너져 눌려서 지난 해에 먹은 것에 비교하면 겨우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삼 년 되는 해에는 이른 가뭄과 늦은 비가 모두 심하여 먹은 것이 또 첫해의 반의 반이었다. 내가 일찍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헤아리고 가까운 것으로 먼 것을 추측하여 천하의 이익이 태반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가을에 과연 흉년이 들어 겨울에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남(河南)ㆍ하북(河北)의 백성들이 옮겨 가는 자가 많고, 도적들이 일어나서 군사를 출동시켜 잡아 베었으나 종식시킬 수가 없었다. 봄이 되어 주린 백성들이 경사(京師)에 구름처럼 모여 도성 안팎에서 울부짖으며 구걸하느라 엎어지고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 조정에서는 근심하고 노력하여 유사들은 이리저리 분주하게 모든 것을 베풀어 구제하여 살리는 것이 이르지 않는 것이 없어서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죽을 쑤어 먹이기까지 하였으나 죽는 자가 반이 넘었다. 이 때문에 물가가 뛰어서 쌀 1말에 8ㆍ9천 냥이나 되었다. 금년에도 늦은 봄부터 하지(夏至)때까지 비가 오지 않아서 심은 채소를 보면 지난해와 같으니, 이제부터라도 비가 올런지. 듣자니, 재상이 절에 친히 나아가서 비오기를 빈다니 생각하건대, 반드시 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작은 채소밭은 역시 이미 늦었다. 문과 뜰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는 말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로다. 때는 지정 을유년 5월 17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