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대도 천태 법왕사 기(大都天台法王寺記)
이곡(李穀)
지정(至正) 3년 계미년 봄에 법왕사(法王寺)가 완공되었다. 영록대부(榮祿大夫) 태의원사(太醫院使) 조공(趙公)이 나에게 기(記)를 청하며 말하기를, “나는 고려 영춘(永春) 사람으로, 지난 지원(至元) 계사년부터 내시(內侍)로 뽑혀서 액정(掖庭)에서 일을 보며 오늘에 이르렀다. 삼가 보건대,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신무(神武)하시고 죽이지 않으시고도 능히 천하를 통일하여 여러 성인이 서로 이어받아 만민을 쉬게 하고 기르는 것이 모두 인(仁)과 애(愛)에 근본하였으므로, 불씨(佛氏)의 자비(慈悲)의 도(道)와 신통하게 맞고 오묘하게 합하여 이것을 높이고 믿으니, 분(芬)이 마음으로 감동하고 사모하였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외람되게 미천한 몸으로 지나치게 황제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이미 늙어서 갚고자 하나 갚을 길이 없으니, 삼가 불법을 좇아서 절을 창건하여 위로는 임금 한 분의 수(壽)를 빌고,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빌며, 아래로는 민생을 영원히 이롭게 하려 하여 그 본말을 기록하여 오래 전하도록 도모하는 것을 장차 그대에게 부탁하노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신하가 된 도리는 몸을 바치고 힘을 다하여 당연히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간절히 임금을 축수하는 마음이 능히 그만두지 못하는 데에서 나오며, 또한 능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부처에게로 돌리나니, 이와 같이 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절을 짓는 이유이다. 상고하건대, 불씨의 법은 동한(東漢)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삼한(三韓)은 땅이 해가 뜨는 동쪽에 치우쳐 있어서 서역(西域)의 불교가 마땅히 늦게 이를 것 같은데, 지금으로 본다면, 산천 사이에 불가의 남은 자취가 가끔 중국보다 앞선 경우가 있고, 또 풍속이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기고 산 부모를 봉양하고 죽은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에 한결같이 불교대로 하며 혹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뭇 사람이 괴상하게 여기고 흉보아서 충성과 효도를 다하지 못함이 있다고 말한다. 아, 습관과 풍속이 오래 되어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캐어 볼 수 없는 점이 있다. 지금 천자의 도성 밑에서도 고구려라고 불리는 절이 여기저기 있으니, 공이 이 일에 급급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보다 앞서 유천 부사(有泉府使) 이공(李公) 삼진(三眞)이 안부리(安富里)의 집을 회사하여 부처의 사당으로 만들고, 이름을 법왕사(法王寺)라 하고는, 시골 중 자신(孜信)이란 자를 불러서 주관하게 하였다. 뒤에 권세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마굿간이 되었는데 이공은 그 값을 받아서 따로 다른 곳에 경영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고, 이미 늙고 또 병들어서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조공이 절을 경영한다는 말을 듣고 곧 그것을 그에게 붙여서 시주로 삼게 하였다. 공이 날마다 그 집에 호소하여 그 값의 반을 받아서 지폐(紙幣)로 만든 것이 2만 5천 냥이다. 자기가 희사한 1만 5천 냥과 전서사(典瑞使) 신공(申公) 당주(當住)가 도와 준 7천 냥을 합하여 금성방(金城坊)에 땅을 사서 자신에게 맡겨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이공이 죽었다. 공이 부인 최씨(崔氏)와 또 의복과 그릇 중에서 가치가 있는 것을 모두 팔아서 먼저 낭사(廊舍)를 삼면(三面)에 지어 사람들을 살게 하고, 다음에 전각을 그 가운데에 지어서 부처를 모셨다. 자신이 또 죽으니 경진년 2월에 천태사(天台師) 일인(一印)을 청하여 주석하게 하고, 석가(釋迦)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과 천태지자(天台智者)의 소상(塑像)을 금빛으로 만들어서 일심삼관(一心三觀)의 교라는 것을 천양(闡揚)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중궁(中宮)이 지폐(紙幣) 1만 냥을 내려서 그 비용을 도왔다. 그 이듬해에 동쪽과 서쪽에 당(堂)을 짓고, 또 남쪽에 행랑을 지어 북으로 꺽어 당(堂)과 맞닿게 하여 승도들을 거처하게 하고, 행랑 가운데에 문을 내어 삼문을 대신하고, 좌우에 전각을 지어 손님이 머무를 장소를 만들었다. 또 이듬해에 전각 뒤에 사방 한 길 되는 집을 지어서 그 집 동남쪽에 시자(侍者)를 거처하게 하고, 또 그 남쪽에 부엌을 지어 향을 쌓고 창고를 지어 물자를 저축하였는데 모든 저폐(楮幣)를 쓴 것이 14만 관(貫)이 넘었고, 칸 수는 80여 칸이었다. 높다 해도 사치한 데에는 이르지 않고, 낮다 해도 비루한 데에는 이르지 않고, 상(像)을 세운 것은 단정 엄숙하고 금빛과 푸른 빛은 눈부시게 찬란하여 위의(威儀)와 공양하는 제구로 절에 있어야 할 것은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해 10월에 황제가 서쪽 대내(大內)에 있을 때 금자연경(金字蓮經)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명하여 이 절에 간직하게 하고 중궁이 곧 향과 폐백을 보내 와서 염불하는 데 쓰게 하였다. 이듬해에도 그와 같이 하였으니, 이는 오묘한 법을 높이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또 공이 황제에게 보답하는 데 부지런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었다. 역사가 한창일 때에 인사(印師)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남들에게서 의식을 해결하는데 오히려 시주를 아끼는 것이 옳은가.”하고, 바랑 속에 저축한 5천 관을 모두 희사하고,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쇄노올대(朴?魯兀大)와 대부대감(大府大監) 주완택첩목아(朱完澤帖木兒)가 각각 2천 냥을 희사하여 장명등(長明燈)을 만들게 하고, 시골 사람 중 선(善)을 좋아하는 자들이 봄 가을로 돈을 거두어 대경(大經)을 듣고 외우기를 약속하여 해마다 상례로 삼아 갑술년에 시작하여 계미년에 마쳤으니, 전후 10년 동안도 얼마 안 되는구나. 일찍이 보건대 탑과 사당을 만들기는 어렵고 헐기는 쉽다. 비록 사는 곳을 크게 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더라도 후세 사람이 그것을 업(業)으로 하여 자기 이익을 채우고 이익이 다하면 절까지 따라서 망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런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치지 않으니 한갓, “내가 내 마음을 다하고, 내가 내 힘을 다하였으니, 뒷일은 내 걱정이 아니라고 염려할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공이 이미 이 절을 완성하고 또 그 일을 돌에 새기는 까닭은 그 뜻이 있는 데가 있는 것이다. 뒤에 이 절에 사는 자는 마땅히 생각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절은 고(故) 감찰어사(監察御使) 관음노(觀音奴)가 살던 곳인데, 땅이 사방 9무(畝)이다. 경영하려던 처음에 우연히 옛날 집 밑에서 조각돌을 얻었는데, 법왕사(法王寺)란 세 글자를 새긴 것이 있었다. 공은 대개 그 오랜 인연이 있음을 느껴 바로 편액(扁額)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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