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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대원 고려국 광주 신복선사 중흥 기(大元高麗國廣州神福禪寺重興記)

천하한량 2007. 2. 10. 17:52

기(記)
 
 
대원 고려국 광주 신복선사 중흥 기(大元高麗國廣州神福禪寺重興記)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군(朴君)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에 부모를 하직하고 황제의 조정에 내시가 되어 무종(武宗) 때부터 두터운 은택을 입었고, 인조(仁祖)가 황통(皇統)을 계승함으로부터는 동궁의 옛 신하라 하여 사랑하고 대우함이 보통과 달랐다. 이런 때를 당하여 어찌 고향을 생각하고 부모를 그리워할 수 있었겠는가. 저번에 황제의 명을 받들고서 수레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어 귀향하여 부모님을 뵈었더니, 선친이 이미 늙으셨다. 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기를, ‘내가 밤낮으로 네가 귀하게 되기를 축원하고, 네가 돌아오기를 바랬는데 네가 이렇게 왔구나.’ 하셨다. 그리고는 데리고 신복사(神福寺)에 가서, ‘이 곳은 네가 총각 때에 놀던 곳으로 잡초만이 무성하던 곳이었다. 내가 집에 있는 것을 모두 다 내어 심지어는 옷가지나 수건까지도 희사해서 위로는 임금님을 위하여 복을 빌고 아래로는 너를 위하여 복을 빌었더니, 이제는 당당하게 큰 절이 되었다.’ 하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이 되었건만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여 하루도 감히 잊지 못하였다. 아, 낳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기르고 가르치셨고 마음으로만 생각하실 뿐이 아니고 또 부처님에게까지 비셨으니, 이것으로 부모의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으신 줄 알겠노라. 사람이 부모의 마음으로 마음을 가지는 자는 천하에 드물 것이다. 이제 선친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도 늙었으나 신복사의 중건을 기록하지 못함은 불초한 자식이 어버이를 잊는 큰 것이다. 연산(燕山)의 돌을 사서 그 자초지종을 기재하고, 아울러 선친의 말씀과 내 고향의 형제들의 이름을 새겨서 가져와 신복사 뜰에 세워 놓고, 후세 자손으로 하여금 우리 부자가 있었고 천성이 이와 같았다는 것을 알게 하겠으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것을 쓰라.”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느끼는 것이 없지 않았다. 부귀와 영달에 급급하여 만리 밖에 가서 벼슬하는 자가 어찌 다 그 고향을 생각하고 그 부모를 사모하겠는가. 또 우리 나라 사람으로 말한다면 그 황궁(皇宮)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 한때 위세가 대단한 자가 적은 것이 아니지만, 고향을 보기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처럼 보고, 친척을 대접하기를 길가는 사람 대하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런데 박군은 한 번 그 어버이의 말씀을 듣고 사랑하고 효도하겠다는 마음을 종신토록 잊지 않고, 반드시 좋은 옥돌에 새겨서 영원히 전하려 하니, 그를 위하여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은 광주(廣州)에 있는데, 처음 창건된 것은 고을과 같이 시작하였다가 흥하고 폐하는 것이 무상하더니, 이제는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법당이 있고 중이 거처하는 집이 있으며, 복도와 행랑이 깊숙하고 문과 뜰이 시원스러워 한 고을의 명승지가 되어 여러 지방의 선사들이 모이는 곳으로 되었다. 연우(延祐) 갑인년에 시작하여 지치(至治) 말년에 준공하였는데, 중 영구(永丘)가 실제로 그 일을 맡아서 주관하였다. 전에는 항상 머무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박군이 주(州)의 서쪽 마을 조산(鳥山)에 있는 좋은 땅 15결(結)을 시주하고, 그의 부인 김씨가 지폐(紙幣) 5백 관(貫)을 시주하여 공양할 재산으로 충당시켰다. 이 주는 삼한에서 여러 주목(州牧)의 으뜸이 되고, 박씨는 또 주의 대성(大姓)이 되어서 그 조부 수도(守道)로부터 이상은 다 본고을의 직책을 맡아서 한 고을의 어른이 되었었다. 아버지의 휘(諱)는 박견(朴堅)으로 중랑장(中郞將)으로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할 때에는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이 되었었다. 나이 78세로 태정(泰定) 갑자년 9월 2일에 집에서 죽으니, 광정대부 밀직사사상호군(匡靖大夫密直司使上護軍)을 증직하였고, 어머니 장씨는 당진군 태부인(唐津郡太夫人)에 봉하였는데, 원통(元統) 을해년 정월 25일에 죽으니 나이 84세였다. 박군에게는 두 형과 두 아우가 있었는데 맏형 효진(孝眞)은 검교별장(檢校別將)이요, 다음은 박연(朴璉)인데 낭장(郞將)이요, 아우 천우(天祐)는 벼슬하지 않았고, 다음은 박관(朴寬)인데 안산군(安山郡)의 원이었다. 여동생은 사온령동정(司?令同正) 이주(李注)에게 시집갔다. 효진은 3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박순(朴純)이요, 다음은 미찰실례(彌札實禮)니 지금 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으로 연경에서 숙위(宿衛)하고 있으며, 다음은 탈첩목아(脫帖木兒)이며 딸은 모두 선비에게 시집갔다. 천우는 세 아들이 있으니 인만(仁萬)ㆍ박평(朴平)ㆍ문보(文保)이다. 박관의 세 딸은 모두 선비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딸 그리고 외손이 매우 많으나 기록하지 않는다. 박군의 어릴 때 이름이 쇄로올대(?魯兀大)로 무종 초년에 명령을 받들고 입궐하여 내시가 되었는데, 황제가 항상 소(小) 쇄로올대라 부르고 이어 이름으로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의란국 대사(儀鸞局大使)에 임명되었다. 두 번째 옮겨서 조열대부 동지대도로 북겁령구 제색민장도총관부사(朝列大夫同知大都路北怯怜口諸色民匠都摠管府事)가 되었다. 성품이 신중해서 천자들의 지우(知遇)를 받았는데 조금 뒤에 물러나서 불사(佛事)로 노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