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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조정숙공 사당 기(趙貞潚公祠堂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51

기(記)
 
 
조정숙공 사당 기(趙貞潚公祠堂記)
 

지정(至正)으로 원년을 고치던 봄에 내가 정동막(征東幕)에 있을 때 찬성사(贊成事) 조공이 그 조카 평원군(平原君)과 가전(家傳)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며 말하기를, “선군(先君) 정숙공(貞肅公)의 공로가 사직에 있어 덕을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인데, 비록 산소에 지명(誌銘)이 있기는 하나 신도비(神道碑)가 없고 가승(家乘)이나 국사(國史)는 사람이 보기가 어려우니 오래되면 인멸되고 매몰되어 아는 이가 없을까 두렵다. 또 선군이 일찍이 집 뒤에 당을 짓고 평소에 거처하는 처소로 삼고 지원(祗園)이라고 칭하였다. 이제 그 속에 선군의 화상을 걸고서 때에 따라 제사지내고 네모난 돌을 뜰 가운데에 세우고 그 공덕을 두루 새겨서 자식과 손자들로 하여금 익히 듣고 새겨 들어서 선군의 뜻을 실추시키지 않고 선군의 훈계를 잊지 않게 하려니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마침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으므로, 그 부탁을 들어 주지 못하였다.
이제 정숙공의 아들 삼장법사 선공(旋公)이 연산(燕山)에 머무르고 있으면서 나를 볼 때마다 그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비록 부처의 법을 배우기는 하지만 하늘처럼 끝없는 부모의 은혜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는데, 그 말이 더욱 간절하고 그 청하는 것이 더욱 근실하여 내가 이에 그 대강을 서술한다.
세상이 생긴 지가 오랜지라 한 번 다스려지면 한 번 어지러워진다. 근래에 당 나라가 쇠약해지자 오대(五代)가 크게 소란하였고, 요(遼)ㆍ금(金)과 송나라가 남쪽과 북쪽으로 분열되어 전쟁하는 것이 그치지 않아 민생이 매우 도탄에 빠졌다. 하늘이 큰 운수를 열어 주어 성인이 계속해서 나오고 이름난 신하가 무리로 나와서 천하를 통일하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켰으며 문자와 궤도(軌道)를 통일시키고 풍속을 고쳤으니, 주역에 이르기를, ‘크구나. 건원(乾元)이여. 만물이 의지하여 시작한다.’ 하였음은 오직 황원(皇元)이 그러한 것이다. 정숙공은 태종(太宗) 9년 정유년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겨우 변채(?蔡)를 거두었으므로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남쪽으로 정벌하고 서쪽으로 토벌하는 것이 채 끝나지 않았고, 본국은 비록 이미 화친하였으나 권신(權臣)에게 통제되어 도읍을 강화로 옮기고 제후의 임무를 제때에 하지 않아 천자의 군사가 국경을 누르게 되었으니, 이 역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느냐 편안해지느냐 하는 기회요, 사람의 마음이 향하느냐 배반하느냐 하는 때여서 풍속과 습관이 변하기 시작해서 삼한이 다시 건설되는 때였다. 이런 때를 당하여 우리 나라와 중국이 처음으로 통하게 되니, 천자의 덕을 선포하고 백성들의 정을 통하게 하는 데에는 통역하는 사람에게 의뢰하는데 공은 한어(漢語)를 잘하고 언변에 능숙하다 하여 발탁되어 높이 오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장 차림으로 조정에 서서 빈객들과 말을 하였는데, 끝내는 임금을 높게 하고 백성을 보호하여 사직의 신하가 되었으니, 공의 일생을 보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지원(至元) 기사년에, 충렬왕이 세자로 들어가 뵐 적에 공이 실로 따랐고, 갑술년에 황제의 딸을 이강(釐降 공주를 신하에게 시집보냄)하여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는데, 그 임금 앞에 들어가 대하면 이익이 되고 해가 되는 것을 일일이 진술하고, 나와서는 신하가 되어 어렵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권간(權姦)을 주륙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도읍을 회복하여 나라를 안정시켜 바닷가 백성들이 희희낙락하게 베개를 높이 베고 이제까지 미치게 하였음은 공의 공로가 많은 것이다. 처음 조정에서 보낸 흑적(黑的) 이 감정을 품고 말을 만들어서 분란을 일으키려고 이미 황제에게 잘못 듣게 한 것과 탐라와 평양 사람이 내군(內郡)으로 직속되어 도리어 그 주인에게 짖었던 것과 주둔해 있는 장교들로 해친 자들을 곧 모두 파면해서 가게 하였고, 그 뒤 떠돌아다니는 백성과 노략질 당하여 요동과 심양에 붙들려 있던 자를 모두 나라로 돌아오게 한 것이라든가, 간사한 신하들이 의논을 제창하여 두 번째 일본을 정벌하자 전쟁으로 인해서 우리 나라를 해치려는 일을 중지시킨 것도 모두 공이 애써서 잘 대답한 힘이었다. 모든 왕이 공을 보내서 주청(奏請)함에는 황제가 곧 불러 들여 보고 위무하기를 참으로 두텁게 하며 말하는 바를 들어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한번은 이르기를, “너는 고려 사람이 아니냐. 어떻게 그리도 아뢰고 대답하는 것이 상세하고 명석하냐.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조금도 동쪽 나라 사람 같지 않다.” 하였으니, 아, 중흥의 공을 따진다면 공의 위에 있을 자가 없을 것이다. 공의 휘는 인규(仁規)요, 자는 거진(去塵)이니 평양군 사람으로, 아버지의 휘는 조영(趙瑩)이니 금자광록대부 추밀원부사(金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를 증직하였고, 어머니 이씨는 내원승(內園丞) 문간(文幹)의 딸로서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을 봉하였다. 부인의 꿈에,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얼마 있다가 태기가 있어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남달리 뛰어났고, 장난하고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니, 조금 자라 글읽기를 알면서부터는 대강 큰 뜻만을 통하고 곧 그만두고 가서 군사 직무에 종사하여 처음에는 장교로 시작하여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고, 지합문사(知閤門事)가 되고,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좌승선(左承宣)이 되어 네 번째 승진하여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가 되고, 또 승진하여 어사대부 태자빈객(御史大夫太子賓客)이 되었고, 빈객에서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가 되었다가 곧 평장시랑(平章侍郞)으로 승진되었는데, 경인년에 특별히 가의대부 고려왕부 단사관(嘉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하고, 이어 금으로 된 호부(虎符)를 내려서 그 재능을 표창하였고, 임진년에 시중(侍中)을 더하였으며, 대덕 을사년에 또다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승진되었다가, 정미년에 나이가 많음으로 사직할 것을 청하자 공신 칭호를 하사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하고 군부(軍府)를 설치하고 사무 관원을 두게 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물어서 결정하게 하였는데, 이듬해에 병이 나자 아들들이 훌륭한 의원을 청하여 보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상투를 하면서부터 나라 일에 봉사하여 나이 이제 70이 넘었고 벼슬이 1품에 이르렀다. 또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는 것인데 의원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하였다. 그때에 여러 아들들이 모두 서울에 가 있고, 오직 충숙공만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으므로 부탁하기를, “그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그 집을 다스려야 한다. 《시경》에도, ‘형과 아우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도모함이 없으리로다.’고 이르지 않았느냐. 네 집에는 동기(同氣)가 많이 있으니 부디 화내고 다투지 마라. 남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너의 형제가 다 오거든 모두 훈계하고 그것을 가법(家法)으로 삼으라.” 하고, 4월 25일에 병이 위독하자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서 운명하니, 나라의 여러 선비와 서민들이 좇아가서 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이 평생에 정직하다고 들었는데, 이제 그 죽는 것을 보니 바로 살아 있을 때를 알 수 있겠다.” 하였다. 부고가 왕에게 올라가니, 왕이, “하늘도 무심하여 원로를 남겨 주지 않았다.”고 탄식하며, 부의하고 장사지내는 데 예절을 다하게 하고, 시호를 ‘정숙공(貞肅公)’이라고 하였다. 배필되는 이는 사재경(司宰卿) 조온려공(趙溫呂公)의 딸로서 5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조서(趙瑞)로 과거에 급제하여 특별히 회원대장군 고려부도원수 삼사사(懷遠大將軍高麗副都元帥三司使)로 임명되어 시호를 장민공(莊敏公)이라 하였고, 둘째는 조연(趙璉)으로 벼슬이 중의대부 왕부단사관 첨의찬성사(中議大夫王府斷事官僉議贊成事)에 이르렀는데 시호를 충숙공(忠肅公)이라 하였고, 또 셋째는 연수(延壽)로 춘관(春官)에 급제하여 특별히 소용대장군 관군만호 삼사사(昭勇大將軍管軍萬戶三司使)에 임명되었고, 넷째는 의선(義旋)으로 특별히 정혜원통 지견무애 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三藏法師)의 호를 하사한 천원연성사 주지 겸 본국 영원사 주지 복국우세 정명보조 현오대선사 삼중대광자은군(天源延聖寺住持兼本國瑩原寺住持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禪師三重大匡慈恩君)이고, 다섯째는 조위(趙瑋)로, 지금 중대광 첨의찬성사(重大匡僉議贊成事)로 있고, 큰딸은 좌승선 노영수(盧穎秀)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강절평장(江浙平章) 오마아(烏馬兒)에게 시집갔으며, 셋째는 대호군(大護軍) 백승주(白承珠)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호부 시랑(戶部侍郞) 염세충(廉世忠)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몇 명이 되는데 원수의 큰아들은 조굉(趙宏)이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전교 부령(典校副令)에 이르렀고, 다음은 천사(千?)이니 진사에 급제하여 지금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있으며, 또 다음은 천유(千裕)이니 지금 원윤(元尹)으로 있고, 딸은 안길왕(安吉王) 야아길니(也兒吉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판서(判書) 김경직(金敬直)에게 시집갔으며, 또 다음은 연덕대군(延德大君) 진(?)에게 시집갔다. 단사관의 큰아들 사민(斯民)은 지금 낭장(郞將)으로 있고, 다음 덕유(德裕)는 지금 봉훈대부 왕부단사관 판전의시사(奉訓大夫王府斷事官判典儀寺事)로 있고, 다음은 윤선(允瑄)이요, 또 다음은 보해(普解)이니 머리를 깎고 중천태교선(中天台敎選)이 되어 있고, 딸은 만호(萬戶) 권형(權衡)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우상시(右常侍) 김상린(金上璘)에게 시집갔다. 만호의 큰아들은 충신(忠臣)이니 지금 선무장군 관군만호 삼사좌윤(宣武將軍管軍萬戶三司左尹)이 되어 있고, 다음은 조신(趙信)이고, 딸은 낭장(郎將) 김휘산(金暉山)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상호군(上護軍) 윤지표(尹之彪)에게 시집갔다. 찬성사의 아들 흥문(興門)은 지금 소부윤(少府尹)이 되어 있다. 외손도 몇 명 되는데, 큰딸의 아들 노탈(盧?)은 지금 경양군(慶陽君)에 봉해졌고, 딸은 판서 허부(許富)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삼사사(三司使) 김상기(金上琦)에게 시집갔다. 셋째 딸의 아들 충윤(忠胤)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 되었고, 딸은 상호군 이권(李權)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별장(別將) 김오만(金五萬)에게 시집갔다. 넷째 딸의 큰아들은 효신(孝臣)이니 지금 삼사좌윤으로 있고, 다음은 불노(佛奴)니 지금 익정사승(翊正司丞)이 되어 있고, 딸은 호군 민현(閔玹)에게 시집갔다. 증손 이하는 매우 많으므로 다 기재하지 않는다. 공은 성질이 명랑하고 민첩하며 국량이 웅장하고 크며 말수가 적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사람들과 대할 때 관대하고 화평하며 일을 대하면 강직하고 정대하여 네 임금을 보좌해서 장하게도 원로가 되었다. 성품이 또 선을 좋아하여 베푸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더욱 불교에 독실하여 청계불사(淸溪佛寺)를 창건하고 임금을 위하여 복을 축원할 때, 묘전(妙典)을 금으로 쓰고 해장(海藏)을 먹으로 판박이고 불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등 이루 다 기록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집을 다스리는 데에 이르러서는 엄격하여 자식을 가르치기를 의(義)로써 하여 공이 늙기 전에도 자손들이 많이 달관 명사(達官名士)가 되어서 중외(中外)에 널리 퍼져 있었고, 죽은 뒤에도 모두 가훈을 따라서 효도하고 우애하기를 화락하게 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을 못하니, 뻐꾸기가 새끼들에게 고르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것과 할미새가 형제들의 어려움을 급히 보아 주는 것에 부끄럽지 않으리라.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시간이 오래 되면 잊는 것인데, 공이 죽은 지가 36년이 되는데도 민멸되지 않게 할 것을 생각하여,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처럼 하는 것이 이 같으므로 이것을 기록하노라.


[주D-001]정동막(征東幕) : 원나라에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이라는 임시 관청을 두었는데, 그것은 군사와 관계되는 관청이므로 막(幕)이라고 하였으니 막사(幕舍)라는 뜻이다.
[주D-002]변채(?蔡) : 여진족이 건국한 금(金)나라가 한때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지금 북경에 서울을 정하고 강성한 국가가 되었으나, 몽고족의 공격으로 북경에서 쫓겨 하남(河南) 지방인 변(?), 지금의 개봉(開封)으로 서울을 옮겼으나, 그것도 유지하지 못하고 또 쫓기어서 채주(蔡州)로 갔다가 채주의 함락으로 멸망되었다.
[주D-003]흑적(黑的) : 몽고족으로 우리 고려에 감독관으로 와 있던 자인데, 악질이어서 고려에게 많은 폐해를 주었던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