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한국공 정공 사당 기(韓國公鄭公祠堂記)
사당 짓고 제사지내는 제도는 옛날부터이다. 그 어버이를 섬기는 자는 집에 사당을 짓고, 성스럽고 어질고 공덕(功德)이 있는 자는 나라나 고을에 사당을 지었으니, 그 제도를 상고할 수 있다. 한(漢)나라 이후로 예절이 때에 따라 변하여 사당에 영정을 만들어서 그 신주를 대신한 경우도 있었고 복(福)을 구함으로써 일상적으로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집의 사당 이외에도 제사지내는 당(堂)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은 한가지였다. 그 공덕에 크고 작은 것이 있으므로, 그 보답하는 것에도 후하고 박한 것이 있고, 그 제향하는 것에도 오래 가고 짧은 것이 있는 것이다.
전 휘정사(徽政使) 정공이 그 어버이를 위하여 사당을 지을 적에 그의 고향 사람인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더벅머리 어린 시절에 부모를 떠나서 이미 늙었고, 부모도 이제는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 반포(反哺)하는 정과 쌀을 져 나르는 한이 어찌 끝이 있으랴. 생각해 보면, 부모가 남겨 주신 이 불초한 몸이 원나라 내신(內臣)의 반열에 끼어 벼슬도 높고 녹도 많으며 3대를 추증(追贈)하게 되니, 은택이 구천(九泉)에까지 미친지라, 이에 당을 부처님 법당 옆에다 짓고 형상을 만들어 제사지내어 복을 받게 하고 그 제사가 오래 가게 하며, 또 열성조 천자의 은명(恩命)을 좋은 옥돌에 새겨서 그 집 아래에 세워서 천자께서 하사하신 것을 자랑하여 나의 사모하는 마음을 위로할까 하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글을 지으라.” 하였다. 이것이 한국공의 사당이 지어진 유래요, 기문을 제술한 이유이다. 상고컨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사(士)이고, 자식이 대부이면, 장사는 사의 예로 지내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지낸다.” 하였으니, 공경히 생각하건대,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인(仁)으로 사해(四海)를 거느리고, 효도로 천하를 통치하여 인심을 기르고,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모든 내외의 신하가 자줏빛 옷을 입는 관직 이상이면 모두 부모를 관직에 봉하고 죽은 부모에게는 증직(贈職)할 수가 있어서 각 등수에 따라 올라가게 되어 그 예수(禮數)가 극진하게 마련되었으나, 혹 제기나 장막에 문제가 있는 자에게는 허락하지 않아 비록 부모나 아내라도 다 그러하였다. 아, 이미 그 은택을 널리 베풀면서 또 그 행실을 따지니, 이른바 덕(德)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려 그 징계하고 권장하는 뜻이 병행되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일찍이 보건대 적선(積善)하고 적악(積惡)한 것에 재앙과 경사가 따르기 마련이니, 만약 그 자신에게서 받지 않으면 반드시 그 자손에게서 받는다. 가업을 계승하여 대대로 녹을 먹으며 은총을 누리고 권세를 믿고서, 밖으로 나갈 때에는 천여 명 말탄 사람이 호위하고, 들어와 한 번 식사하는 데 만전(萬錢)씩이나 소비하다가도, 재앙의 기미가 한 번 시작되면 후대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되기도 하며, 혹은 가난한 집에서 출생하여 벼슬길에 올라서 이름을 역사책에 전하고 효도를 귀신에게까지 지극히 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를 공평히 따져 보면 우연이 아니다. 이제 한국공 선조의 공이나 덕이 비록 당시에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귀한 아들을 두어서 그 보답을 받기를 이같이 하니, 어찌 그 공덕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물며 휘정공은 옛사람의 글을 읽고 대장부의 뜻을 행하며 자신에게는 청렴한 것으로 다스리고, 일 처리하는 데에는 공평한 것으로 하였으며, 궁중에서 은총을 받고 모시며 귀족 틈에 높이 올라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부모까지 현달하게 하였으니 훌륭하지 않겠느냐. 한국공의 이름은 인(仁)이요, 성은 정씨이니 고려국 하동(河東) 사람이다. 숭록대부 요양등처 행 중서성 평장정사 주국(崇祿大夫遼陽等處行中書省平章政事柱國)에 증직되었고 한국공(韓國公)으로 추후 봉작(封爵)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성량(性良)이니, 자선대부 하남강북등처 행 중서성좌승 상호군(資善大夫河南江北等處行中書省左丞上護軍)에 증직되고,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후 봉작되었으며, 어머니 포씨(匏氏)는 영양군부인(榮陽郡夫人)에 추후로 봉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공윤(公允)이니 중봉대부 영북등처 행 중서성 참지정사 상호군(中奉大夫嶺北等處行中書省?知政事上護軍)에 증직되고 영양군공(榮陽郡公)에 추후 봉작되었으며, 할머니 최씨는 영양군부인에 추후 봉작되었다. 부인 이씨는 한국 태부인(韓國太夫人)에 봉작되었다. 아들 5형제가 있으니, 맏이는 윤화(允和)로 벼슬이 정윤(正尹)에 이르렀고, 다음은 윤기(允琦)니 벼슬이 호군(護軍)에 이르렀으며, 그 다음은 독만달(禿滿達)로 즉 휘정공(徽政公)이요, 다음은 부좌(夫佐)이니 벼슬이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에 이르렀고, 다음은 모(某)라고 하는데 벼슬하지 않았다. 딸이 세 사람이고, 손자와 손녀가 몇 명 있다. 처음 대덕(大德) 경자년에 휘정공이 나이 11세 때 내시로 충렬왕을 따라서 황제를 뵙고, 그대로 남아서 궁중에서 일을 하였는데, 성종(成宗)이 그의 총명하고 똑똑함을 사랑하여 임인년에 조칙으로 태학에 입학시켜 귀족들의 자제들과 함께 글과 예절을 배우게 하니 이미 큰 뜻을 알았으므로 인종(仁宗)이 사시는 곳에서 모시고 심부름하게 하였다. 지대(至大) 기유년에 전보감승(典寶監丞)에 임명되고 관계(官階)는 봉훈대부(奉訓大夫)였다. 얼마 후에 전서대감(典瑞大監)으로 승진되고, 감(監)에서 원(院)이 되고 여섯 번 승진하여 사(使)가 되고, 자선대부(資善大夫)에 가자되었으며, 이용감(利用監)의 서리가 되어 금옥부(金玉府)를 감시하게 되었으니, 그 인종의 사랑과 대우를 받는 내시들 중에서 그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천력(天曆) 초기에 장패경(章佩卿)이 되었다. 얼마 후에 다시 전서사(典瑞使)가 되었고, 또 네 번 옮겨서 광록대부(光祿大夫) 휘정사(徽政使) 연경사(延慶使)를 거쳐 제조장알사사(提調掌謁司事)가 되었다. 휘정사로 있을 때에 힘써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해 올리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으므로 선비들의 여론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갔다. 내가 일찍이 속관(屬官)이었으므로 공과 친밀함이 깊고, 공을 아는 것이 자세하므로 감히 그 대략을 서술한 것이다. 한국공은 나이 79세로 원통(元統) 계유년 12월 12일에 집에서 죽었고 다음 해에 봉작하는 은총이 내렸다. 태부인은 이미 봉한 지 여섯 해 되는 지원(至元) 기묘년 7월 19일에 죽었으니, 나이가 74세였다. 그 후 또 7년이 되어서 사당을 지었는데, 때는 지정(至正) 5년 을유년 3월이다.
[주D-001]쌀을 져 나르는 한 : 옛날에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젊어서 집이 가난하였는데 백 리나 되는 곳에 가서 쌀을 져다가 부모를 봉양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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