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주행기(舟行記)
기축년 5월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으로부터 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하늘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 반사군(潘使君)이 이미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뱃머리를 돌려 북으로 향하여 가다가 늦게 고성(古城)에 닿았다. 이튿날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唐) 나라에서 소장군(蘇將君)을 보내어 이전의 백제(百濟)를 쳤으니, 부여는 실상 백제의 고도(故都)이다. 그 때에 포위를 당하여 매우 급하게 되자 임금과 신하들이 궁녀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궁녀들은 의리상 적군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여 떼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물에 떨어져 죽었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이름지은 것이다. 부여 감무(監務)가 음식을 바위 모퉁이에 있는 절에 마련하였다. 해가 한낮이 지나서 닻줄을 풀어서 조금 서쪽으로 가니 여울돌이 있는데 높고 구부러졌으며, 그 밑은 깊고 맑아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가 이미 와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캄캄해져서 갈 곳을 알지 못하였다.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용이 그 밑에 살고 있어서 본국을 호위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당 나라의 술법을 쓰는 자가 계교를 써서 낚시밥을 던져 그 용을 낚았다. 용이 처음에는 버티고 올라오지 않다가 힘이 다하여 끌어내니 그 때문에 돌이 음푹패였다. 지금도 깊이와 넓이가 한 자 남짓하고 길이가 한 길쯤 되어 물가에서부터 꼭대기까지 깎아서 만든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조룡대(釣龍臺)라 한다. 이 대로부터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 남쪽 언덕에 절이 있는데 호암(虎岩)이라고 한다. 바윗돌이 벽처럼 서 있고 절은 바위 앞에 있다. 바위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있는데 마치 잡고서 올라온 것 같다. 바위 서쪽에 천 자나 되는 낭떨어지 언덕이 있고,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 하는데 백제 때에 하늘과 통할 수가 있어서 사람을 등용할 때마다 그 이름을 써서 대 위에 두고, 임금과 신하가 복장과 흘(笏)을 갖추고 북쪽 언덕 모래톱에 열지어 엎드려서, 하늘이 그 이름에 점을 찍기를 기다린 후에야 취하여 썼다. 고을 사람들의 서로 전하는 말이 이와 같다. 호암으로부터 걸어서 그 대에 이르면 대에 남은 터는 없고 오직 돌이 반공에 솟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부여의 4가지 노래요, 이 지방의 빼어난 경치여서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오는 이유이다. 나의 고향이 이곳과 겨우 60여 리이고, 젊어서부터 지나다닌 것이 또 한두 번이 아니지마는,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다. 나는 스스로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과 손님을 태워서 공급하는 것이 거의 백 사람이나 되고 왕복하는데에 사흘도 넘었으니,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역사에서 그 일을 빠트렸고 또 상고할 만한 비문의 기록도 없으며, 일이 또 괴이한 데 가까우니 고을 사람들의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물며 보는 것이 많이 듣는 것에 미치지 못함에랴. 내가 이것으로 인하여 기록하여 뒤에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경계로 삼고, 또 나의 잘못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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