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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한주 중영객사 기(韓州重營客舍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8:15

기(記)
 
 
한주 중영객사 기(韓州重營客舍記)

 


 이곡(李穀)

지정 기축년 가을에 비가 심하여 마산(馬山) 객관(客觀)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한가하니 고을 사람들이 수축하려 하였다. 군수 박군(朴君)이 말하기를, “남쪽 낭사뿐 아니라 청사도 거의 무너졌는데, 왜 한 번에 새롭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지방에는 재목이 생산되지 않아서 8척 가량 되는 나무도 다른 산 백 리 밖에서 취하여 오고, 또 우리 고을에 사는 자가 대부분 권세 있는 사람에게 가리워져 있으니 누가 우리를 위하여 부역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박군이 말하기를, “어떻게든 해보라. 어려울 것이 무엇 있겠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묵은 집을 헐어 버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힘을 쓰지 않을 것이다.”하며, 하루아침에 다 철거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근심하였다. 박군이 이에 아전들의 재주를 헤아려서 능한 자는 큰 집을 맡겨 인부를 많이 주고, 재주가 없는 자는 적게 주어서 이미 나누어 주관하게 하고, 명령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편안히 살 방도로 백성을 부리면 비록 수고로와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지금 너희들이 이 땅에서 입고 먹으며 근심하는 탄식이 없는 것은 모두 웃사람의 덕택이다. 모든 빈객이 오는 것이 크게는 천자의 말을 선포하는 것이고, 작게는 본국의 명령을 반포하는 것으로 나라의 근본을 근심해서이니 이 관사를 세우는 것은 결국은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이번의 역사가 너희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가 아니겠는가. 하물며 묵은 집의 제도가 추하고 소박하고 또 무너져 가고 있어 사신을 받들어 조서와 명령을 들을 수가 없으니, 군수는 오직 공경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하는데 어찌 감히 태만하랴.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다. 이에 호수(戶數)를 조사하여 인부를 내고 오직 늙은이와 어린이만 뺐다. 바다를 건너 재목을 취하였으며 험하고 먼 것을 꺼리지 않고 돈을 거두어 돕고 도시락밥을 싸 가지고 먹이는 자가 어깨가 서로 스칠 정도로 많았다. 그 해 윤달에 역사를 시작하여 겨우 두어 달이 지나서 청방(廳房)과 낭무(廊?)가 지어지긴 했으나, 때가 바야흐로 춥고 어는 때여서 흙을 바를 수가 없어 우선 공사를 중지하게 하였다. 이듬해 2월에 준공이 되려 하는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서 면세(面勢)에 맞고, 사치하지도 않고 비루하지도 않아서 시의(時宜)에 적합하였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근심하던 자들도 마침내는 기뻐서 탄복하였고, 지난날에는 세력이 있어 방자한 자들도 지금은 모두 지시대로 따랐다. 또 고을 관원의 일보는 집과 서적을 두는 곳과, 물건을 두는 창고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규모와 계획이 이미 정해졌는데, 박군이 마침 체직되어 떠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은 정신이 아득하여 부모를 잃은 것처럼 여겼으니, 박군은 역시 능하다 하겠다. 내가 어려서 시골서 자라 백성의 화복이 실지로 수령에게 달려 있음을 알았고, 우리 시골에서 더욱 그렇게 보았다. 도성에 있게 되어서 우리 아전과 백성들이 가끔 도망하여 숨어서 고을 길이 가시밭이 되고 빈객이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군수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인(印)을 품고 가 버린다는 말을 듣고, 내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아전과 백성들의 죄일 뿐만 아니라, 땅을 지키고 있는 자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 조서를 받들고 돌아오니, 그 때에 이군(李君) 자(資)가 정사를 한 지가 얼마 안 되었는데, 아전을 통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조목과 법도가 있어서 한 고을 사람들이 이루어진 효과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런데 일찍이 반 년도 되지 못하여 조정으로 불리어 들어가고, 이군(李君) 자장(自長)이 이어서 정사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여 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는 말하기를, “국법에 수령이 사는 곳을 공아(公衙)라고 하는데, 이 고을 수령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백성의 집에 거처하고 있으니 어떻게 고을이 되겠는가.”하고, 그 고을 아전에게 명하여 부서와 부역을 나누어 며칠이 안 되어 완성하였다. 또 관사(館舍)를 차례로 수축하려 하였는데, 조금 뒤에 상사를 당하여 고을을 떠났다. 박군이 부임했는데 능히 두 이군의 재주를 겸하여 두어 해 동안에 이익이 되는 일은 일으키고 해되는 것은 없애어 일이 이루어지고 백성들이 화합하여 실로 전날의 한산(韓山)이 아니었다. 또 성의로 사람을 대우하며 빈객을 접대함에 게으른 모양이 없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는 물건과 침상이나 담요, 온갖 기구 등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완비되고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관청 창고의 장물(贓物)에서 취하여 쓴 것이고, 조금도 백성에게서 거둔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대단히 성하여 한 고을에서 으뜸이 되었다. 나는 같은 고을 사람으로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다행히 보고 들은 바가 있었는데, 이제 관사가 지어진 것을 보고 그 대략을 쓴다. 아, 이제부터 박군의 뒤에 오는 자가 한결같이 박군을 본받아서 완성되지 못한 공적과 끝나지 못한 일을 마침내 이루어 놓는다면 훌륭한 관리가 되지 못함을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시용(時庸), 자(字)는 도부(道夫)로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임명되었다가 전례에 따라 군수로 나왔다 한다. 경인년 3월 일에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