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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경사 금손 미타사 기(京師金孫彌陀寺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36

기(記)
 
 
경사 금손 미타사 기(京師金孫彌陀寺記)
 

불교가 중국에 선포되어 사람을 교화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런데 그 인과(因果)와 죄복(罪福)의 설이 능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라. 왕공(王公)으로부터 사서(士庶)에 이르기까지 분주하게 모여들어 받들고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중봉대부 중상경(中奉大夫中尙卿) 백안찰김공(伯顔察金公)이 그의 부인 포해군부인손씨(浦海郡夫人孫氏)에게 이르기를, “내가 대덕(大德) 초에 궁중에 입시(入侍)한 후로 온 집안이 은혜를 입어서 지금까지 30년이 넘어 이미 작위는 높고 의식은 흡족하다. 비록 밤낮으로 신중히 하여 나의 힘을 다하였으나, 다만 재능이 없어서 열성(列聖)의 돌보심에 보답하려고 하여도 방법이 없으니 불교에 귀의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사람들이 능히 부귀를 얻게 되는 것은 대개 전생의 인연이 금생(今生)에 때를 만난 것이라 하는데 잘 닦지 않는다면 후세에 어떻게 하랴.” 하고, 지순(至順) 2년 정월에, 불당을 완평현(宛平縣) 지수촌(池水村)에 창건하여 그 교를 넓히고, 금손미타사(金孫彌陀寺)라 하였으니, 이는 두 사람의 성(姓)과 부처님에게 구하는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었다. 그 해 8월에 부인이 죽자 절 북쪽에 장사지내고 명복을 빌게 하고, 그 묘지 바깥 땅 40여 묘를 모두 절에 주어서 스님의 식료(食料)로 쓰게 하고, 이어 집의 하인을 놓아 주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그 향화(香火)를 맡게 하였는데, 이름을 계홍(戒洪)과 계명(戒明)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공이 감동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부처님 받들기를 더욱 독실히 하더니 금년 가을에 병을 얻게 되었다. 후취 부인 윤씨와 의논하여 지폐와 은전 5천 냥을 내어서 그 절의 재정으로 보태게 하고, 그 아들 봉의대부(奉議大夫) 낭팔(囊八)과 도총관(都摠管) 타아적(朶兒赤)을 시켜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제 늙고 병들어서 이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 같으니, 원하건대, 자초지종을 갖추어 돌에 새겨서 뒤에 이 절에 사는 자로 하여금 나의 뜻을 잊어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내가 불교의 서적을 읽지 않아서 이른바 인과라든가 죄복의 설을 알지는 못하나, 안과 밖이나 저와 나의 구별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공이 어렸을 때에는 능히 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장성하여서는 임금에게 충성하였고, 이제 늙어서는 부처님을 섬겨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려 하니 그 마음이 가상하므로 기문을 쓴다. 지원(至元) 2년 10월 어느날에.


[주D-001]백안찰김공(伯顔察金公) : 이것은 원나라식 이름으로 이때 우리 고려 사람들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한 자가 많았으므로 많이 원 나라식 이름을 지었다. 원음(原音)은 베얀챠이지만 우리음으로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