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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 보은 광교사 기(京師報恩光敎寺記) -이곡(李穀) -

천하한량 2007. 2. 10. 17:35

경사 보은 광교사 기(京師報恩光敎寺記)

 

 


 이곡(李穀)

연우(延祐) 정사년에 고려국 왕 모(某)가 이미 자리에서 물러나 경사(京師)의 저택에 머물러 있을 때에, 옛 성 창의문(彰義門) 밖에 땅을 사서 범찰(梵刹)을 창건하였는데, 3년이 지난 기미년에 공사가 준공되었다. 부처님을 모시고 승려가 거처할 곳과 재 올리고 법회 볼 때에 소요되는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이름을 대보은광교사(大報恩光校寺)라 하고, 전당(錢塘)의 행상인(行上人)에게 명하여 천태교(天台敎)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산으로 돌아갔다. 그 이듬해에 화엄교사(華嚴敎師) 징공(澄公)을 초청하여 절 일을 맡게 하였더니, 얼마 후에 왕이 명령을 받들고 강남으로 향을 가지러 가고 또 서역에서 교법을 구하느라고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더니, 태정(泰定) 을축년에 경사에서 세상을 떠나고, 징공도 바로 입적(入寂)하게 되니 그 문도들은 그냥 그대로 거기에 있었으나 일은 폐지되고 해이해졌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신 해 3월에 지금 고려국 왕과 심양왕(瀋陽王)이 부왕의 유언으로 본국의 천태사(天台師) 영원사 주지(瑩原寺住持)이고 중대광자은군(重大匡慈恩君)이며 특별히 하사한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선공(定慧圓通知見無?三藏法師旋公)을 불러서 그 절을 맡게 하였더니 선공(旋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본고향 사람이니 이 절의 옛 일을 알 것이다. 이 절의 기문을 지으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왕이 세황(世皇 원나라 세조(世祖))의 외손으로 좌우에서 계속해 모시고 있다가 하늘의 은총을 입어서 대덕(大德) 말년에 난리를 평정하는 데에 참여하여 황실(皇室)에 훈공을 나타냈고, 중년이 되어서는 왕이란 작위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불교에 전심하여 그 탑과 절을 짓고 불상을 제조하고 내전(內典)을 시주하였으니,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스님에게 시주한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절을 짓는 데에는 그 재목과 집을 웅장하게 하고 그 자재와 저축을 풍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불교 신자들로 하여금 그 도를 정성껏 닦아 임금이 장수하게 하고 나라가 복되게 하여 큰 이익이 무궁하게 가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십 수년도 못 되어 적임자를 만나지 못하여 기둥과 집이 위태하여 성치 못하고, 자재와 저축은 서로 빼내어서 제 이익을 삼았으므로, 종고(鍾鼓)가 고요해지고 향불이 쓸쓸해졌으니, 이른바 도를 닦았다는 것이 어떻게 되었으며, 왕의 숭상하는 마음이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제 두 왕이 능히 유명(遺命)을 따라서 적임자를 택하여 맡겼으니 뜻을 계승한 효도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선공 같은 이는 능히 선왕의 뜻을 본받아서 이전 사람들이 하던 짓을 답습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복전(福田)이라는 것이 그 기초가 더욱 견고하여 그 이익됨이 더욱 넓어질 것이니, 그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이 기문을 쓰노라. 절의 대지는 50묘(畝)가 조금 넘고 동쪽에 붙어 있는 3묘에 집 1백여 칸을 지었고, 양향(良鄕)에서 밭을 산 것이 3천 2십 묘가 되고, 소주(蘇州)에 있는 것이 30경(頃 백묘)이고, 과수원으로 방산현(房山縣)에 있는 것이 백 20묘이니, 모든 비용이 지폐로 50여 만 민(緡)이라고 한다. 지원(至元) 2년 8월 어느 날에 기문을 쓴다.


[주D-001]왕이 명령을 …… 겨를이 없더니 :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藩 지금의 서장(西藏))으로 귀양갔던 일을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지폐 : 원나라 시대에는 종이로 화폐(貨幣)를 만들어 썼으므로 그것을 지폐[楮貨]라고 문장상에 쓰지만, 전의 이름은 초표(?票)라 하며, 민(緡)은 꿰는 끈을 말하는 것으로 예전 엽전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서 그것을 백닙씩으로 꿰서 한 냥(兩)으로 하였다.